첫인상 - 그것은 착각이었다.
일남과 술을 마시는 시간이 늘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해수 이야기를 했다.
일남이 계속 술을 사는 이유가 해수 때문인가 의심이 들었다. 해수는 누구라도 탐낼 만한 구석이 있었다.
“나도 그만큼 예쁜 아이를 하나 봐 뒀는데.”
일남의 뜬금없는 고백. 해수만큼 이쁜 아이라고. 사실 해수가 엄청나게 이쁜 건 아니지. 해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녀만의 아우라, 분위기였다. 지적이고 차가운 분위기. 특히 나와 함께 있을 드러나는 폭력성.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텐데.
“너도 봤을 거야. 도서관 4층에 자주 오니까. 걔가 공부하는 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마구 뛰곤 한다고.”
내가 도서관에 갈 때면 4층을 이용하는 이유는 거기가 가장 밝기 때문이다.
거기서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을 눈여겨본 적은 없지만, 일남의 말에 4층 열람실의 구석구석을 그려보았다. 입체 영상을 만들고 360도 카메라를 돌려보는데 의외로 선명하게 한 방향으로 시선이 몰려갔다.
4층 열람실이 ㄱ자로 꺾이는 모서리 부근에 앉아 공부하는 한 여학생이 있다.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느낌이 익숙했다. 꼭 다물고 공부하는 입술의 선이 해수를 닮았다. 크고 맑은 눈을 지그시 내리 깔고 책을 응시하는 모습. 안경을 쓰지 않고 좀 더 서구적인 얼굴이라고 할까.
“바로 그 애야, 경영학과 다니는 애, 민성원이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녀석이 먼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일남은 또 한잔의 술을 마셨다.
“어쨌든 난 그 애가 맘에 들어, 난 요새 며칠 동안 도서관에 가질 못했어. 그 애 얼굴만 바라봐도 가슴이 부풀어 올라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야. 어떤 때는 두 시간 동안 그 애만 바라보고 앉아 있기도 했어. 괜히 그 앞을 서성이기도 하고, 그 애가 복도에 나와 서 있을 때면 그 옆에서 아무나 붙잡고 마구 떠들기도 했지. 나를 좀 쳐다봐 달라는 식으로. 친구들을 수소문해서 그 애 이름도 알아냈어. 사귀는 애도 없대”
일남 답지 않았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전개였다. 이 세상 누구와도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와도 친하지 않은 아이가 이름만 아는 여자애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다니. 그래 술이나 먹어라. 계속 먹어라.
“그럼 말이라도 한 번 붙여봤니?”
“아니, 한 번도 못 해 봤어,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안 돼. 한 번은 용기를 내서 그 애 앞에 가서 서긴 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서 왔어. 그 애가 그냥 저건 모냐? 그랬을 거야.”
“경영학과 애들한텐 한번 다리 놔 보라고 할까”
“쉽지 않대. 철벽이래. 공부하고 학회하고 무슨 창업 동아린가 한다는데, 그게 다래”
“그래도, 너 정도면 한번 관심은 줄 텐데. 자신감을 가져. 멋지게 대시하면 성공할 수 있어”
나는 일남의 용기를 북돋았고,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애는 지금도 공부하고 있을 거야. 매일 늦게까지 공부하거든. 지금 한번 보러 갈래”
“뭐야. 술 마시다 말고. 달려가서 고백이라도 하려고”
"지금 가서 말할 거야. 그래 딱 좋은 밤이야. 벚꽃 사이로 산책이라도 가겠냐고 물어봐야지"
일남은 눈에 광기가 올라왔다. 내가 더 재밌을 것이란 상상으로 그를 독촉했다.
“그렇지. 지금 올라가서 얼굴만 보고 오면 안 되는 거야. 저돌적으로 부딪쳐 보는 거야.
미리 실망하지 마.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거야. 같이 나가서 벚꽃 길을 걷자고 말하는 거야.
나중에 그때 한번 해보는 건데 하고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라고, 자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먼저 행동하는 자가 승리하는 거야”
녀석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우자 의외로 쉽게 나를 따라나섰다. 계속 마셔댄 술의 취기로 잠시 비틀했지만 정신은 말짱해 보였다. 도서관 4층 열람실에 학생은 많지 않았다. 일남을 돌아보니 파랗게 긴장이 올라와 있었다. 다시 도서관 밖으로 끌고 가서 담배를 하나 물렸다.
“너는 전투를 앞둔 인디언 전사야. 대지의 영령과 인간이 뜻을 모으며 승리를 결의하지, 지금처럼”
내가 기도하는 시늉을 하며, 인디언식으로 인사를 했다. 인디언들이 승전을 위해 어떤 의식을 올리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냥 담배를 피웠을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라도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다시 열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결전의 순간임을 느낀 일남은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민성원 학생은 그 자리에 정물처럼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열람실의 절반 이상은 텅 비어 있었고, 너무 조용하여 누군가의 볼펜 굴러가는 소리까지 크게 울렸다. 일남을 따라가던 내가 멈춰 섰다. 그 아이가 누군지 불현듯 기억났다. 그렇다. 그 버스 안의 아이였다.
나는 매일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항상 같은 자리 앉아 있는 그녈 보곤 해
하지만 부담스럽게 너무 도도해 보여 어떤 말도 붙일 자신이 없어
그랬다. 내 기억의 그녀가 어딘지 익숙해 보이는 이유는 해수와 닮아서가 아니었다.
일남의 싸움은 실패할 것이다. 아니 실패해야만 한다. 그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서글펐다.
그의 한걸음마다 나의 촉각이 반응하고 머리칼이 솟아올랐다. 드디어 그가 멈춰 섰다. 나의 신경도 우뚝 섰다.
“저......, 저......, ,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너무 작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남은 불안하게 떨리지만 조금 더 큰소리로 말했다.
“저..... 저하고 얘기 좀 하자고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흔한 일이라는 듯 당당하고 자신 있게 일남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같이 나가지요”
그에 비하면 일남은 자신감이 덜 했다. 다섯 누나의 트레이닝이 이 순간만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람실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리며 아주 길게 느껴지는 대치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그냥 여기서 말씀하세요.”
일남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마신 술이 벌겋게 올라오고 방금 피운 담배가 역하게 머리 위로 김을 뿜었다. 어떤 식으로든 응원해야 하지만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내가 일남에게 다가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일남이 드디어 아주 깊숙한 울림이 있는 말을 했다.
“민성원, 너와 사귀고 싶다. 같이 자고 싶다. 벚꽃 보라 자자”
열람실 안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도 우리 쪽을 쳐다봤다. 나는 잠시 멈칫하며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얼른 일남의 어깨를 감사 안았다. 느닷없이 같이 자자니, 벚꽃은 어디 가고 냅다 자러 가자니. 내 얼굴이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작 당사자인 민성원은 반응이 없었다. 내가 일남을 끌고 나오는 동안에도 그야말로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통수에 따가움을 느끼며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그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요.”
성원의 대답이었다. 열람실은 다시 소란해지고, 나와 일남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도서관을 나왔다.
이미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고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또 술을 마시며 오늘은 잘했다고 다시 기회가 올 것이고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랴 설득하고 위로했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 네가 들어간 것이라고.
그건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날은 나의 인생에 그녀가 들어온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고 또 웃었다. 지구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던 일남을 생각하며 웃지 않으려 했지만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같이 자러 가자고. 맹랑한 놈.
버스 안에서 혼자 웃어대고 있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맨 뒷자리에서 레이저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있었다. 그렇지. 같은 버스, 항상 같은 자리 앉아 있는 그녈 보곤 해. 다시 고개를 돌려 앞만 보고 달렸다. 내릴 때 다시 보니 그녀는 허공을 향한 채 눈감고 하루를 되새기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다시 그녀를 보았다. 버스 탈 때마다 그녀를 찾게 되었다. 어쩌다 마주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보아야 했다. 그녀의 출몰 시간대를 기억하고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에 한 두대의 버스를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보지 못하는 날은 걱정했다.
분명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일남이었는데, 왜 내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