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어느 날

by NIL

어느 다른날 - 매일 조금씩 변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창밖만 내다 보고”

해수가 나의 상념을 깨웠다. 나도 모르게 민성원과 해수를 비교하고 있었다.

성원이 해수만큼 시원한 성격이라면 일남이 대시하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어떤 여자 애에 대해 생각했어, 자꾸 생각나는데 내가 당할 수가 없네!”

“뭐라고! 드디어 너에게도 그런 날이 왔구나. 아무 때나 떠오른다면 정말 이건 사건이다. 사건, 어떤 여자야?”


해수가 흥분하며 탁자를 쳤다. 그 앞에 놓인 커피잔이 출렁하며 방울이 튀었다.

내가 다른 여자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인가. 해수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일남이 왔다. 우리를 발견한 녀석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지난번 만남 이후로 해수는 일남이 맘에 안 들었던 게 확실했다. 일남은 해수를 좋게 보고 자주 이야기하는데 해수는 일남을 재수 없는 놈으로 여기고 비방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사건까지 알게 되면 해수는 일남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까. 일남뿐 아니라 나는 또 얼마나 구박받을까.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긴 것이다.


“오다가 친구를 만나서 같이 왔어!”

일남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여기들 있었구나. 오늘은 내가 쏠게”

일남의 뒤에는 185cm가 넘는 큰 키에 폴로셔츠를 입고 빙글거리는 한 녀석이 있었다. 하현준이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지”

“너희 둘 뿐인 줄 알았는데. 여성분이 함께 계시는구나. 방해되면 나는 다른 자리로”

“아니어요.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요. 이 동네 오면 항상 있는 일. 저는 김해수예요. 얘 보호자”

“아 그렇군요. 우리들이 딱.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죠. 특히 이 녀석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해서”


항상 키 큰 아이들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녀석이라 처음에는 운동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회계사 시험 준비 중이고 그러다 보니 우리와 시간표가 맞지 않아 자주 어울리진 못했다.


“내가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었어, 쨔짠, 내가 독수리상 앞을 지나는데 누런 지폐 하나가 툭 떨어지는 거야, 독수리 날개 밑으로! 자, 너희들 맥주 한잔씩은 내가 살 수 있어. 이런 돈은 같이 써야 하는 거야. 이돈 안 쓰면 독수리상이 노여워하실 거야”


“그런데 미안한데 우리 일행이 한 명 더 있는데, 그걸로는 모자랄 텐데......"

일남이 어렵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일남을 위로하려고 오라 그랬는데 현준을 만났고, 또 누가 온다는 거야.


"내가 엊그제 소개팅했는데, 너무 우아한 상대를 만난 거야. 고전적 미인이랄까. 카사블랑카에서 온.

그래서 오늘 다시 만나기로 했어. 금방 올 거야. 그 친구 오면 나는 갈 테니. 그 돈은 너희 셋이"

너는 바람, 나는 나뭇잎
네게 흔들려 떨어질까 두려워
하늘을 날아 내게 온 너


대충 상황을 들은 현준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럼 모두 같이 가자고 했다. 원래 공돈이 생겼다고 쓰다 보면 자기 가진 것 이상 쓰게 되는 거라고. 그래서 복권 맞은 사람이 그 돈을 지키기 어려운 거라고 떠버렸다.


진짜 어리둥절한 것은 나였다. 도서관에서 생쑈를 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뉴페이스라니. 새로운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번개 모양, 쐐기 모양, 낯선 도형들을 치우느라 바빴다.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저도 서양문화사 수업을 같이 들었거든요.”

내 말은 하나도 우습지 앉았는데 그녀는 웃었다. 일남과 현준도 그냥 웃었다. 해수만 웃지 않았다.

고전적 미인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떠들썩하게 얘기가 이어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서로를 소개하고 가벼운 반응에 한바탕 웃고 했다. 이날의 우연한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즐거웠고 술값은 현준이 냈다.

현준은 다양한 분야에 아는 것도 많아 대화를 주도하며 화제는 이리저리 넘나들었다. 현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재수를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평소 그와 어울려 다니는 키 큰 아이들이 재수 학원을 같이 다닌 아이들이라는 것. 어린 시절의 꿈은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이 녀석이 맘에 들었다. 녀석의 천진난만한 말들이 맘에 들었다.


현준은 자신이 15년 후에는 유명한 사람이 될 거라 했다. 물론 어떤 분야에서 어떤 식으로 유명해질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모색 중이라 했다. 일남은 그것은 예쁜 여학생을 아직 사귀지는 않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언젠가는 그중 한 명과 사귀게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 했다. 고전 미인이 살짝 웃었다. 일남은 현준도 우리와 비슷한 족속이라며 웃었다. 아직 사춘기가 안 지난 녀석이었다.


반복되는 수다에 해수가 지루해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뭔가 해수와 마무리할 것이 남았다는 느낌에 잡아끌고 옆 건물의 카페로 들어갔다. 그 카페의 한 복판에는 커다란 칠판이 서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무엇인가 이야기를 적고 가지만 다음날엔 그 칠판은 다시 깨끗해진다.


해수가 만나자고 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내 친구들만 떠들었다. 바뀐 분위기에 한참 긴장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녀는 홀짝거리며 커피만 마셨다.


“다 마셨네, 아까 만난 네 친구들. 공부는 열심히 하니? 대학 다니며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할 텐데,

맨날 술만 마시고 여자 얘기만 하고, 걱정이 되네”

“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잘하는 아이들이야, 그리고 인제 한 학년 지났는데 앞으로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지”

“글세, 꼭 그런 것은 아닌데, 처음 만남 만으로도 운명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비씬 커피 마시고 이런 이야기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가 실망만 컸다. 그런데도 밤새 해수의 말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일남과 현준에게 좋은 친구일까. 그건 그렇고 일남의 연애는? 이번에는 정착하는 걸까.

시험 기간이 열렸다. 도서관 4층 열람실에서 공부했다. 일남과 고전 미인도 함께 공부했다.

같은 공간에서 나는 누군가를 바라만 보았다. 시끌 거리며 현준이 나타나면 같이 농구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