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기 좋은 계절- 더위가 지치게 한다
쉬는 시간,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 4층 열람실, 일남은 수학 문제와 씨름 중. 맞은편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민성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놀랬다. 아주 자연스럽게 민성원을 찾고 있다니. 땀도 식힐 겸 연습문제 몇 개 풀어보는데 썩 잘 풀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누군가의 책을 밀어 놓고 본격적으로 엎드렸다. 수업시간되면 깨우라 신신당부하고 눈을 붙였다. 눈꺼풀이 말려 들어왔고, 차가운 책상면이 볼을 식혔다.
15분 정도 지났다 생각될 때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깼다. 시계를 보니 30분이 지나 있었다. 수업 시간에 늦었나, 침을 흘린 건 아닌지 턱 주변을 만지는데 뒤편에 누군가 서 있는 듯했다. 곁눈질로 보니 청바지 차림의 여학생이었다.
“죄송하지만 제자리인데요”
내가 밀어 놓은 책들의 주인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지나치게 당당한 요구가 불쾌했다. 평소에 내가 자주 앉던 자리인데 오늘 하루 점유했다고 까불고 있어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한쪽으로 기대고 자서 그런지 어긋난 목뼈를 하나씩 맞추며 돌아보았다.
내 앞에 있는 것은 민성원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당황했다. 소지품을 서둘러 챙겼다. 얼핏 노트를 접으며 보니 역시 침을 흘렸다.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대충 둘러메고 못하고 열람실을 나왔다.
도대체 그녀는 거기에 언제부터 서 있던 것일까.
자기 책을 널브러뜨리고 엉뚱한 놈이 자고 있다고 얼마나 욕했을까. 침까지 질질 흘리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방을 챙겨 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더 이상 공부한다고 폼 잡고 도서관에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망한 하루 집에 가서 잠에나 가자. 마치 도서관에서 쫓겨나는 듯한 내 모습이 불쌍했다. 졸리면 잘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잘못이라고 내가 달아나야 하나. 일남이는 어디 간 거야!
다음 날은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내 자리를 탈환해야 했다. 어제의 민성원은 대단했다.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장일남 앞에 자리를 잡고 공부할 줄이야. 다시 그런 상황이 없게 하려는 마음에 부지런하게 움직였으므로 버스에 그녀는 없었다. 도서관에도 없었다. 긴장이 풀렸다.
노트를 펼쳤다. 역시 침을 흘린 게 분명했다. 한 장을 찢어버렸다. 그런데 그 뒷장에 나타나는 글씨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내용도 생소했다. 노트를 접어 표지를 봤다. 너무 흔한 구닥다리 스프링 노트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 그녀의 노트를 깔고 자다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노트를 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나의 실수를 고백하고 돌려주거나 그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살짝 올려놓는 방법 중 하나였다.나는 모르는 일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녀의 노트는 적당한 곳에 눈에 띄지 않게 버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노트를 펼치는데 얼핏 보기에도 새것이었다. 어제 내가 도망친 후 노트가 없어진 것을 알고 새로 샀으리라.
확실히 노트를 돌려주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었다. 누가 가져갔는지 모를 테니 의심받을 이유도 없고. 침 자국 때문에 찢어버린 부분은 보상할 수 도 없다. 계속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녀의 그 눈초리가 레이저처럼 달려와 뒤통수를 쪼개는 것처럼 느꼈다.
그녀가 무섭다.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모르는 사이인데. 지난번에 들이댄 건 일남이었다. 옆에 서 있었을 뿐이었고, 서둘다 노트를 잘 못 들고 간 것뿐인데 그녀가 무서웠다. 계속 경계 태세.
드디어 민성원이 자리에서 일어서 나갔다. 나는 이때다 싶어 노트를 들고 가서 그녀의 책 사이에 밀어 넣었다. 아뿔싸! 너무 세게 밀었는지 책상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조용한 열람실 안에 노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내 가슴도 한껏 떨어졌다. 제기랄, 저것을 다시 올려놔야 하나,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가. 망설임 끝에 서성거리 듯 주변을 돌아 노트를 주워 책상에 올려놓았다. 임무 완수. 기분 좋았다.
“이번엔 뭘 훔치려는 거예요?”
나는 왜 중요한 순간에 머리를 잃어버리는 것일까.
“뭐, 꼭, 훔친다기보다는, 지나가다 보니 노트가 떨어져 있길래.”
“그렇다면, 고마워요”
하나도 고맙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히려 네가 어제 저지른 일을 다 알고 있다. 즉, 그녀는 내가 어제 일부러 노트를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잠결에 실수했다고 해명을 해야 한다. 그러기에는 분위기가 삼엄하다. 그녀의 찬바람에 덜덜 떨며 한마디도 못하고 나와버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하현준이 달라붙어 큰소리를 냈다. 현준은 신났다.
“네가 하는 짓 다 봤다. 그런 식으로는 일이 안된다.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여야지”
“무슨 소리야,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경영학과에 내 친구 있는데 다리 한 번 놔 볼까, 아님 내가 주변에서 바람 잡아 줄까”
“미안하지만 난 걔한테 관심 없고, 아니, 나는 어떤 여학생에게도 관심 없다고. 그냥 어제 실수로 노트를 가져가서 돌려주려고 한 것뿐인데 바닥에 떨어뜨려서 약간 당황했다고나 할까”
“어련하시겠나, 네가 아무리 부인해도 옆에서 보는 사람은 다 안다. 민성원, 개는 보면 볼수록 괜찮은 애인 것은 확실하고, 네가 뜻이 있다면 우리 모두 너를 위해”
“괜찮기는, 삐죽하게 생겨 가지고는, 거기다 성격은 툴툴거리기나 하고.”
현준과의 대화는 끝났다. 강의실에서 일남도 합류하고 하루가 마구 지나갔다. 학교 앞 거리는 언제 보아도 생기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냥 그들의 젊음. 나의 젊음이 기분 좋았다. 아무 데나 쏘다니면서도 신났다. 이 거리에 있음이 나의 생명을 느끼게 했다. 전봇대 하나, 보도블록 한 장, 함부로 뒹구는 페트병조차도 나의 지문이 느껴졌다.
”너희들은 낮부터 술 마시면 밤에는 뭐 하냐, 밤엔 공부하냐? “
카페 '산 타' 형의 질문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우리는 밤에도 술 마시는 것 같은데.
내 마음에 내리는 비처럼 닐 영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축축한 목소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See the sky about to rain, broken clous and rain.
Locomotive, pull the train, whistle blowing through my brain.
Signals curling on an open plain, rolling down the track again.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날은 더워지고 비가 올 것 같은데, 시험은 계속 되는 중.
놀기 좋은 계절은 아무것도 못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