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서비스- 요즘도 이런 말을 쓰나요?
“오늘 시험 끝나면 데이트하러 가겠네......”
“데이트?”
“왜 거 있잖아. 해수라는 애.”
“아! 해수! 오늘은 약속 없는데. 너야말로 고전 미인 만나러 가야 하지 않니?”
“그래 걱정이야. 약속은 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애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 애한테 미안해, 같이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점점 지루하기만 해. 권태기인가 봐.”
"벌써 그러면 안 되지. 네가 만든다 생각하지 말고, 그 애 생각도 들어봐. 판단을 잘해야지?”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너무 미안하잖아. 그 애는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데 나는 별생각 없다는 걸."
“그건 아닌데, 그 애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전혀 모르던 두 사람이 만나 사귀고 이야기해 보니 잘 안 맞을 수도 있는데, 넌 벌써 헤어질 걱정하고 있는 거냐.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그 애 생각하는 척하는 네가 더 웃긴다.”
“그래도 그렇지.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의 선택으로 내가 시작한 거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그만둔다면 그 애는 뭐야.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선택되었다가 또 의지와 상관없이 헤어진다면......”
“그런 사소한 이유로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지금 너의 태도가 바람직하지도 않아. 막말로 너희들이 같이 잤냐, 아니면 모 키스라도 했냐. 그냥 몇 번 만난 것 갖고 오버는.......”
벤치에서 떠들고 있는 우리 앞을 누군가 지나갔다. 낯익은 얼굴에 씩 웃어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민성원이었다.
시험은 순조롭게 끝났고 특별히 기분 좋을 이유가 없는데 기분이 좋았다. 나른한 기운으로 열람실을 나오다 문득 민성원을 보니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앞에서 쿵쾅거리며 짐을 챙기는 것이 신경을 건드렸나. 나도 모르게 살짝 윙크했다. 시험이 끝나서 먼저 가니 미안하다는 의미로. 방학 동안 잘 지내라는 뜻으로.
그녀는 나를 빤히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축배를 들었다. 일남과 현준이 함께 했다. 어둠이 내리며 카페 '산 타'의 손님은 계속 늘었다. 아직 시험이 남은 애들이 불쌍했다. 우리는 즐겁게 술을 마시며 여름 방학 동안의 학업과 여행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음을 알았다. 회계사 시험 준비 중인 현준, 빨리 졸업하고 가업을 물려받을 계획인 일남,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꿈꾸는 나까지. 우리의 조금씩 다른 미래 속에 공통 관심사는 연애였다. 녀석들 둘은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나만 없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 크게 보이는 것에 주눅 들곤 했다. 서울의 서쪽 변두리 출신으로서 다른 지역에서 온 아이들을 사귀긴 힘들었다. 강남 애들은 그들대로, 지방 아이들은 또 그들대로 자기들만의 그룹이 있었다. 생각의 기준이 달랐고 자주 가는 술집도 달랐다. 지하철 몇 호선을 타고 오느냐에 따라 옷차림도 달랐고, 그 들가 어울리지 못해 계속 위축되는 시간이었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법도 몰랐다. 어릴 때부터 알던 해수를 제외하면 또래의 여자와 얘기해 본 적도 없었다. 주변 남자아이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뻥이라 생각했다. 정말 사랑하는 여자는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이지 아무데나 껄떡대서 생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축배를 들고있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여성은 없었다.
딱히 정리할 것도 없으면서 도서관에 나와 노트를 끄적거렸다. 졸음을 달래기 위해 로비의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지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시험이 남은 학생들의 발걸음이 바빴다. 커피가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 졸음은 사라졌지만 심란한 마음은 여전했다. 생각만 많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봄날에 다가온 친구들, 영원한 리베로 일남, 커다란 웃음 속에 숨어있는 현준,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 같은 카페 '산 타'사장님, 언제나 뒤를 지키고 있는 해수, 그리고 머신에서 커피를 뽑고 있는 성원, 아니, 이 타이밍이 아닌데. 민성원은 내가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었으니, 지금 그 얼굴이 떠오르면 안 되는데, 느닷없이 성원이라니.
성원은 실제 내 앞에서 커피를 뽑고 있었다. 느닷없는 출현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어떤 이유라도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시험 끝났다고 룰루랄라 놀러 갔어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 민성원의 모습을 한 번 더 보는구나. 그녀가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들이 날개치며 흘러갔다. 처음 일남이 그 앞에 섰을 때의 차가운 표정으로부터 내가 살짝 윙크했을 때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 그리고 며칠 전의 찬바람도는 모습. 그런 모습들. 그녀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친구와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제 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학교에 나올 계획이 없으므로 당분간 그녀를 볼 수 없으리라.
멀리서 키 큰 남학생 하나가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세 사람은 무엇인가 열심히 토의했다.
시계를 보고, 그녀를 한 번 보고, 그녀가 언젠가처럼 한 번 웃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돌아섰다. 더운 기운이 유리창을 때리고 지나갔다. 다시 생각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그런데 왜 항상 혼자라고 생각했을까.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주로 보았기 때문일까. 방학 계획은 무엇일까. 분명 좋아하는 것이 있을 텐데, 내가 그녀를 도울 일이 없을까. 그래도 한 학기 동안 이래저래 여러 번 마주치면서 가까워진 느낌. 일남의 무례한 행동을 사과하고 만회해야 한다는 의무감. 계속 우리를 마주치며 불편했다면 뭔가 다른 방식의 보상, 애프터서비스를 해야 하지 않나. 포장은 그렇지만 그 밑에 깔린 진짜 내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