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패거리- 여름을 이기는 방법
현준이 학교에 나왔다. 몸이 아픈 김에 징병 검사를 다시 받아 군 면제란다. 재수할 때 1급 판정을 받았었는데, 재검을 해서 면제라니. 도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 축하할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 모를 일이다.
알려진 것보다 녀석의 상태가 많이 나쁜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입원이나 수술 한번 안 하는 걸 보면 일반인은 잘 모르는 희귀 질환이 분명했다. 현준의 실연과 건강을 안주 삼아 술을 또 마셨다.
오랫만에 도서관에 갔다. 내 앞자리에 민성원이 있었다. 성원의 얼굴을 보니 슬금슬금 웃음이 났다.계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구도.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이상한 그래프가 잔뜩인 책만 들여다봤다.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어”
점심을 먹으러 나온 식당에서 일남은 숟가락 들 생각도 않고 탁자부터 쳤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또 속 썩이는 여자라도 나온 거야”
“그게 아니고 공부 말이야, 지금 방식으론 안 된다고, 이젠 전공과목이 점점 많아지는데. 단순히 강의 듣고 책 만 붙잡고 있어서 되겠어”
“그래서?”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다음 학기에는 우리 방법을 바꿔보자. 지금처럼 따라가는 공부를 해서는 안돼, 우리가 먼저 나가 있어야 해. 앞서가는 공부를 해야지.”
”그럼, 예습 복습 철저히 해야지”
일남이 늦더위에 지쳐서 푸념한다고 생각하며 그의 말을 반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현준은 밥만 먹었다.
고등학교에서 공부는 했지만 공부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다. 이제 대학생답게 공부하는 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하고 모색하고 있었다. 과목별 예상 문제를 풀고 달달 외우는 방식은 대학입시에나 먹히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무언가 부족하고 허전했다.
지나간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 복사 노트 몇 장 가지고 시험을 때우려는 부류들도 있었다. 단순히 취득한 학점만으로 그들과 구분되기 힘들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만큼은 연구해야 했다. 밥먹고 담배피면서 계속 생각했다. 다음 학기에는..
해답은 민성원이었다. 때로는 무엇인가 입술로 중얼중얼거리면서 어떤 때는 연습장에 길고 난해한 미적분 문제를 풀어놓기도 하고, 때론 눈물이 그렁그렁 도서관 뒷편 숲을 응시하기도 하면서 그녀는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처럼 공부해야지.
민성원의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과 휴식이 되었다.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다른 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심 후에는 담배피며 떠들거나 소파 한쪽 편에서 자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녀만은 흐트러짐 없이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하면 한학기안에 고시라도 붙을 기세였다. 물론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에도 어디선가 공부하고 있으리라는 나의 착각도 곁들여졌지만.
“야, 힘든데 이제 술 좀 덜 마시고,그냥 중국집이나 가서 탕수육이라도 하나 먹자, 원기 회복하게.”
저녁에는 일남의 제안으로 기름기 많은 중국 음식을 먹으러갔다. 사장 아저씨가 훤한 웃음으로 반길 때마다 나는 아직도 이 집에 외상이 남아있나 걱정하지만 그냥 마음 좋은 화교 아저씨 일뿐. 우리는 정말 배가 고팠던터라 죽어라고 먹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래도 느끼하니까 소주 딱 한병만 먹기로 했다.
“낮에 말했던 구체적으로 생각해 봤는데, 강력한 스터디 그룹을 결성하면 어떨까.”
현준의 한마디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나도 가끔씩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다만 우리의 진로 계획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 좋은 생각이긴 한데 같이 공부하면 서로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공부하는 내용이 좀 다라지지 않겠니”
일남도 같은 걱정을 했다며 조정안을 내놨다.
“그 점은 문제가 안돼, 내 생각은 이래. 우리가 어차피 모든 과목을 함께 토론할 수는 없고 한 학기에 두 과목 정도, 전공 과목 위주로해서 정해진 시간에 미팅을 하면서 진도를 미리 뽑아놓으면, 다음 학기에 전체적으로 따라가기가 조금 더 수월해질 거야, 물론 현준 너도 그 두 과목은 우리와 함께 하는 거지. 수업도 같이 듣고”
“그러면 되겠구나. 어차피 시작은 빨리해야 하니까, 멤버는 우리 셋뿐인가”
“아니지. 우리끼리하면 도토리 키재기지. 우리 반에 우등생들을 끌어들여야지. 일단 정영주부터.
우리 셋만 하면 놀러다니다 흐지부지 될 수 있어.정영주가 섬세하게 지켜야지. 그리고 어차피 두 과목을 하려면 두 명씩 짝을 지어 책임을 맡는 거지”
일남의 각오는 단단했다.반면 현준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정영주와 서지연은 관계가 걸리는 듯 했다.
“그리고 한 명을 스페어로 추가하려 하는데, 윤영식은 어떻겠냐”
영식, 영식은 우리 반에서 가장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그 애 옆에 가면 뭔가 휘감길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다. 공부는 잘하지만 우리하고는 밀도가 달랐다.
“윤영식라면 고시생 말하는 거지. 걔는 수학에 관심이 없고, 우리랑 많이 다른데.”
"그렇지 않아, 우리에게 부족한 끈기가 있는 아이야. 오히려 우리와 한패가 되길 동의할까 가 문제지”
“ 끈기가 아니고 끈적한거지. 뭐 다섯 명이면 적당하겠다. 한 팀이니까.”
농구광 현준이는 다섯이라는 숫자로 불안을 덜어냈다.일남은 자신의 계획을 계속 밝혀나갔다.
월요일 저녁에 다섯이 모두 모여 학습계획을 만들기로 했다. 학업 계획을 끝내고 자연스럽게 소주 한병을 시켰다. 화제는 다시 현준의 건강 문제로 돌아갔지만, 그냥 조심하며 살면 되는 것이라며 얼버무렸다. 그래서 소주 한병 더 먹고 일남의 연애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무심코 서지연의 근황이 나왔다. 현준의 얼어버린 눈빛에 대화가 멈추었다. 궂은날이면 쑤셔오는 신경통처럼 현준은 아직도 아픔을 가슴에 담고 있는지. 화제를 전환시키기 위해 일남이 느닷없이 시비를 걸어왔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 민성원 그렇게 자주 보는데 말은 안 하냐?”
“왜 그것이 궁금한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것인가”
“뭐, 특별히 하는 얘기는 없어. 그냥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거지”
"그렇게 마음이 통할 인상이 아닌데, 그 얼굴만 보면 난 가슴이 떨려.무서워서."
그날 이후 일남은 성원을 쳐다보지 못했다. 반면 성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우리를 그림자 취급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을 나올 때도 그녀는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술먹지 말자고 중국집에 왔는데 술도 수다도 지치지 않았다. 월요일 만남을 기약하며 억지로 헤어졌다.
10시를 기점으로 학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 자리잡고 앉았다.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계속 타는 사람들로 먼저 탄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같은 요금 내는데 역시 동작이 빨라야 한다. 여유롭게 사람들을 둘러보는데 한 여학생이 유난히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좌석에 앉은 누군가와 말하고 있었다. 지난 번 도서관 로비에 같이 있었던 남학생 같았다. 도대체 모하는 놈인데 여학생을 서게 하고 지가 앉은거야.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재밌게 할까. 혹시 도서관 앞자리에 앉은 멍청하게 생긴 남학생 이야기를 하나. 내가 먼저 내리니까 내릴 때 그들 옆을 지나가야 한다. 지나가면서 얼굴도 보고 살짝 윙크라도 해줄까.
내가 아는 척을 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언젠가처럼 피식 웃을까, 아니면 화를 낼까. 어느새 버스는 마포 대교를 건너고 있었고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이 빠르게 다가왔다. 내려야 할 곳.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면서 성원 쪽을 지나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생각하고 살짝 윙크 했다. 그녀는 웃지도 화난 표정도 아니었다. 그냥 멍한 표정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민성원이 아니었다. 순간 버스가 멈췄다. 내려야 하는데 문이 안 열리고 한참의 시간도 멈췄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국집에서 먹은 술이 다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광장에 내려선 순간 잘못 내렸음을 알았다. 한 정거장 더 가야 했는데 너무 서둘러 내렸다. 터벅터벅 걸었다. 도대체 버스의 그 여인은 누구야. 민성원은 왜! 어디로 간거야. 터벅터벅 걸으며 시간을 5분 앞으로 돌리고 싶었다.
신경 쓰지 마요 그렇고 그런 얘기들
골치아픈 일은 내일로 미뤄 버려요
인생은 한번 뿐 후회하지마요
진짜로 가지고 싶은걸 가져요
“요즘 우리 일남이 이상하게 조용하다. 새로운 건수를 만들 때가 됐는데......, ”
“그렇지 않아도, 요즘 눈길 가는 친구가 있어. 다음 주쯤 트라이해 볼 생각이야”
지금까지 일남이 트라이해서 실패한 경우는 민성원밖에 없었다. 사실 그 처음의 실패 때문에 그 이후로 더 조심하고 더 경계하며, 어떤 때는 안목을 의심케 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던 일남이었다.
“누군데 혹시 우리가 아는 애야”
“영문과, 김소현이라고 하는데.. 고상하고 우아해”
“또 영문과야, 거기에 고상하고 우아하다. 어디서 들어 본 이야기인데.”
도대체 이 녀석은 모 하는 짓인가. 언제 철이 들꺼나, 여자 친구 사귀는 일을 분기별로 시도하니.
내심 일남이 보여 줄 한 편의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왔다.
영문과 김소현은 콧데 높기로 소문난 친구라 하니... ... 아뿔사, 서지연도 영문과인데..
우리의 스터디 모임은 영문과와 함께 해야 할 수 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