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갈등 - 여름이 지난 것은 맞는데...
유쾌한 패거리는 나를 자유롭게 했다. 든든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으로 여름이 지치지 않았다.
더 즐거운 일은 제자리로 돌아온 민성원이었다. 방학 동안 여행을 갔는지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드디어 돌아왔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는 징조였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반가움이 있었다.
작은 흥분을 깨뜨리고 나온 것은 일남이었다.
“아직 책 펴지마”
일남은 나를 소파 쪽으로 끌고 갔다. 날이 더우니 나가서 카페에서 공부하자고 했다.
“현준은? 언제 오는데."
다른 아이들의 동향을 묻다가 깨달았다. 지난번 이야기했던 김소현이라는 학생이 어딘가 카페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날이 덥다는 핑계로 다시 끌어들이는 얄팍한 음모. 거기에 마음씨 좋은 친구처럼 응해주어야 하나. 나는 오랜만에 민성원을 보는 시간인데.
“뭐 다들 같이 간다면 가지. 그래도 일단 여기 자리 잡았으니, 스터디 그룹 모임 시간에 맞춰 갈게.”
“너 다른 음모가 있는 거 아냐. 저 앞에 여학생과 헤어지기 싫어 그러냐. 의리도 없는 놈.”
“웃기지 마라. 누가 의리가 없고 음모를 꾸미는데. 내가 너 같은 놈인 줄 아냐. 너 김소현인가 하는 애 때문에 나가자고 하는 거 아냐. 지난번처럼 또 도와달라는 거 다 알아. 치사한 놈.”
”짜샤. 그게 모 치사한 거냐. 너도 시원한 곳에 가면 좋은 거지.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지도 않을 텐데 ’
자칭 리더 일남은 떠났다. 성원을 슬쩍 보았다. 특유의 무표정으로 책을 들여다보는 그녀를 앞으로 자주 보겠군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내 친구도 아니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한적 없는 진짜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왜 그리 반가웠을까. 앞으로도 학교에서 그녀와 마주칠 것이고, 같은 버스를 타고, 마주 앉아 공부하기도 하겠지. 또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장면도 볼 거야. 그러면서 계속 궁금해하겠지.
새로운 교재를 꺼내 들고 춤추는 활자들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책이든지 머리말이 가장 중요하다. 거기에는 그 책을 보아야 하는 이유와 보는 방법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민성원 설명서는 어디 있을까.
쿵하는 소리가 열람실 안을 울렸다. 바로 내 앞에서 난 소리였기 때문에 열람실 전체를 울렸다고 느낀 것이지 사실은 나만 들은 소리였다. 성원이 두꺼운 책을 세차게 덮는 소리였다. 그 책은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 새 책이었다. 성원도 우리처럼 다음 학기에 공부할 과목을 예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책을 덮어버린 성원은 그대로 일어나 나가 버렸다. 남아있는 두꺼운 책을 바라보았다. 훔쳐다 팔면 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원은 갑자기 어딜 간 걸까. 시계를 보니 점심 먹기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지 만지만 성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학중이므로 열람실은 단축 운영한다. 명분은 도서 정리 때문이라지만 사서들이 휴가를 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마감 종이 울려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온 그녀는 오늘 단축 운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나.
직원이 다가와 퇴실을 종용했다. 할 수 없이 내 책위에 성원의 책을 올려놓고 쓰러지지 않게 턱으로 받치며 밖으로 나왔다. 공부도 안 할 거면서 무슨 책은 이렇게 많이 가지고 온 거야. 가방은 없는 건가. 처치 곤란이었다. 어쨌든 내 짐을 챙기고 그녀의 책을 가지런히 놓고 주저앉았다.
이제 어쩌나. 우리 스터디 모임시간도 다가오는데
더 기다릴 수도 없었다. 멤버들이 다 모였을 텐데. 사실 그 책을 챙겨달라고 부탁받은 것도 아니고 성원이 책을 잃어버리든 말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는데. 가야겠다 하는 순간, 그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도 그녀는 당황했다. 열람실 문 앞으로 다가가 두드려보기도 하고 문 앞에 널브러진 책들 중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거기에 서 있는 내 모습도 보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모두가 떠난 복도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녀와 나의 시선이 딱 마주치는 순간, 나는 턱으로 내 무릎 앞에 놓인 그녀의 책을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은 내 턱짓을 따라 움직였고 안도와 부끄러움이 볼을 스치며 말없이 다가와 책을 챙겼다. 가방을 다 챙기고 돌아서며 그녀는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그냥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잠깐이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는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일남이 있었다면 뻥치치 말라했을 테지만 난 그렇게 느꼈다. 현실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괘씸했다. 텅 빈 복도에 혼자 남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며 그녀를 기다렸을까 자문하지만 대답은 없고 배만 고팠다. 어서 아이들과 만나 스터디고 뭐고 밥이나 먹어야겠다.
여름이 갈수록 우리의 스터디 진도는 느려졌다. 더위가 우리를 지치게 했고 우리가 공부할 분량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럼에도 명랑함을 잃지 않으려 열심히 놀러 다녔고 그 모든 것을 다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여름은 열심히 지나갔다.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우리끼리 떠드는 못난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어떤 날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다른 날에는 더위에 지쳐버리고, 그러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그렇게 더한층 성장하면서 여름이 지나고 있던 어느 날, 드디어 김소현이 나타났다.
김소현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놀랐다. 아니 어이가 없었다.
김소현, 그는 누구인가? 영문과 학생이라고만 알았던 그녀는 우리가 고전 미인이라 말하던 그녀였다.
일남의 머릿속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했는지 얼굴이 좀 작아졌지만 그녀는 분명 고전적인 둥근 얼굴을 가진 고전 미인이 분명했다. 다시 기억을 되살려 보면 분명히 일남은 그녀에게 어떤 매력도 느끼기 어려워 헤어졌는데 다시 사귀고 싶다니 일남을 불러 작전을 물었다. 언제나 일남의 작전은 하나뿐. 침투하여 때려 부수는 것.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