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 가을엔 모두가 돌아오는 법
“방학 동안 기타 좀 연습했어”
오랜만에 나타난 현준이 기타를 잡았다. 어느덧 술꾼이 되어버린 우리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장단을 맞추며 술잔을 훨훨 비웠다. 취한다는 것. 형편없이 취한다는 것. 우리 생활에 어떠한 도움도 될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 혈기를 토하기도 하고, 낙망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희열의 순간을 축하하기도 했으며, 누군가를 끝없이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왜 술을 마시는 거지. 언제나처럼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고 우리의 대화는 난파선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그 김소현이란 애랑 일남이랑 사귄 적이 있다고?”
“그런데 왜 헤어지고 인제 와서 다시 만난다고 징징대는 건데.”
“다른 놈들이 탐내니까 아까운 것이지. 원래 내 것일 땐 몰랐는데, 남들이 탐내서 자세히 보니 번쩍번쩍 빛나더라. 그런 거 아니겠어”
여름 비수기를 맞아 내부 새 단장 한다고 인테리어를 바꾼 카페의 페인트 냄새에 중독되고 더위에 지친 우리들은 엄청나게 맥주를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는 현준마저도 분위기에 취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일남이었다.
“날씨도 좋은데 우리 밖에 나가서 한잔 더 하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지 몸도 못 가누면서 밖에 나가자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현준도 일남에게 술을 그만 마시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무 취한 것 같단 말이지. 그럼 가야지. 이제 그만 가야 한단 말이지”
일남은 말이지를 반복하며 눈동자에 힘을 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리는 양쪽에서 그를 호위하며 거리로 나왔다. 그런데 일남은 버스정류장이 아니라 공원을 향해 걸었다.
“어! 저거 정말 신경 쓰이게 하게”
중얼거리며 현준이 따라붙었지만 일남은 빠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한참을 따라가서 공중화장실 주변벤치에 녀석을 주저앉힐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딜 그렇게 열심히 가는 거야”
“김소현을 만나야겠어”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웃게 한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동지들아, 내가 그녀에게 갈 수 없다면, 그녀를 나에게 데려다주라”
이제 모든 상황은 명확해졌다. 일남은 농성하는 한 사람의 투사가 되어 외치고 또 외쳤다.
“김소현. 너 나와라. 네가 아무리 피하려 해도 우리는 만날 운명이다. 지난번엔 내가 잘못했다. 빨리 나와라. 안 나오면 내가 간다.”
스터디 끝내고 술 먹는 내내 일남은 김소현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일남의 입에서 그 이름이 마구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일남은 이번에는 현준에게 그녀를 만나러 가겠다고 사정사정했다. 현준이 허락하지 않자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잔디밭을 뒹굴며 칭얼거렸다.
하굣길의 모든 학생들이 우리 모습을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일남 자신이야 취해서 모르겠지만 참으로 황당하고 쑥스러워 일남을 한방 쥐어박았다.
“너 정신 안 차릴래. 도망간 마누라 찾는 놈팡이 몰골로 누굴 만나러 간다는 거냐.”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 모든 것을 바로 잡아야 해.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내버려 두면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자세였다. 일남은 학교 정문을 향해서 “소현아~~”하고 외쳤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방책도 없었다, 떼매고 가기엔 너무 큰 덩치였고, 버리고 가자니 우리 마음이 너무 약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 알코올의 힘은 나를 충동짛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데려다 주지.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내가 그녀를 데려오면 어버버 하지 말고 분명하게 고백할 준비 해라”
꼼짝 말라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일남은 차렷 자세를 취했다. 학교를 향해 돌아서는 나를 현준이 붙들었다.
“넌 또 왜 이러는 거야. 어디서 그 애를 찾아온다는 거야. 그리고 데려올 수도 없을 걸. 괜히 망신만 당하지 무슨 소득이 있다는 거야. 어찌 너희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를 않냐”
“아냐, 어차피 언젠가는 한번 해야 할 일이야. 일남이 저렇게 목을 매는 데 지금 해치워야지."
현준의 만류는 내 고집을 한층 강하게 했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말려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일남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끝장내겠다 생각했다. 현준의 예상과는 달리 김소현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우리가 술 마신 가게 옆 카페에서 친구들과 함께였다. 너무 빠른 만남에 뭐라 말을 붙여야 할지 혼란이 왔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 소현 씨 지금 바쁘십니까?”
“무슨 일이죠?”
일단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했다. 김소현도 나를 쳐다봤다. 취기가 오르는지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별게 아니고요. 돈 좀 빌려주세요. 술 먹다 보니 돈이 조금 모자라는데, 주인아저씨는 현금만 받는다 하고,
마침 소현 씨가 눈에 띄었네요. 염치없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김소현이 나에게 돈을 빌려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약점이었다.
내가 술을 먹었다고 하면 일남이 함께 있다는 것은 뻔했다. 일남이 곤경에 빠져있다면 완전히 모른 척하긴 힘들겠지 생각했다. 고운 마음씨의 소현이 완곡하게 거절했다.
“미안해요. 도와주고 싶지만 가진 돈도 없고, 부탁하는 분이 절박함도 없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그럼 옆에 친구분께?”
“아니! 이 사람이! 그런 무례가 어딨 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내 친구들까지 물어봐 달라고요?. 나하나 희롱하는 것으로 부족한 겁니까.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데"
김소현이 진짜로 화를 냈다.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성격인데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벌이고 있는지 느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애들한테 휘둘리지 말라고. 절대 넘어가지 마. 흔들리지 마. 이런 애들에게 인질로 잡히면 안 돼. 어디 여기까지 따라와서 횡포야"
주변의 친구들이 더 흥분했고 김소현은 더욱 화난 표정으로 단호하게 거부했다.
“제가 갈게요!”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서지연이 말했다. 잊고 있었다. 여기에 그녀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내가 한 발 물러섰다. 김소현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엉뚱하게 서지연을 데려간다면 상황은 두배로 나빠질 것이다. 일남의 문제가 현준에게 까지 틔는 상황. 밖에 있는 현준에게 둘러 댈 말도 없고. 여러모로 안 맞은 위기의 순간이었다.
서지연과 함께 나오니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기력이 다한 일남은 벤치에 앉아 잠들었고 그를 지키던 현준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지연이 따라 나오는 것을 보자 벌떡 일어나 가버렸다. 이제 할 일은 일남을 두들겨 깨워 집에 보내는 것뿐. 내가 일남을 흔들고 있을 때, 뒤에서 다가 온 그림자가 그의 목을 받쳤다. 김소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이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서지연도 사라졌다.
버스를 타고 오며 생각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소현이 온순하고 지연이 더 활달한데 오늘 반응은 반대였다. 어쩜 내가 그들에 대해 잘 몰랐거나 아님 그들이 일남이나 현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현재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어쨌든 김소현은 일남과 함께 갔고 서지연은 혼자 갔다. 내일 녀석들이 어떤 표정으로 나타날지 궁금했다. 나는 무엇을 변명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수발들기 피곤한 녀석들. 버스가 63 빌딩을 지나갔다.
또 지나쳤다. 걸어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