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으로

by NIL

다시 처음으로 - 할 말 없을 때 쓰는 수법

더위에 지쳐가다가 드디어 너무 나른해진 오후. 탁상 선풍기를 목덜미에 들이대고 땀과 싸우고 있을 때 뒷덜미에 차가운 손이 다가왔다. 뒤에서 촉수처럼 다가온 손길을 목덜미를 거쳐 이마를 짚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여인의 손임을 느낀 순간 가슴이 떨렸다. 도대체 이 서늘한 감촉의 여성은 누구인가. 내가 지쳐있는 순간, 그 존재를 잊을만하면, 아니 한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아이. 해수였다.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야”

반가움 속에서도 인사말보다 먼저 튀어나온 것은 궁금증이었다. 다른 학교 학생인 해수가 어떻게.

“응, 걸어서, 날씨 좋은데, 뭐 하는 거야. 나가자 어디 바람이라도 쏘이러 가자”

이 대담한 느닷없음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누굴 닮아 그런 건지.


“느닷없이 어딜 가자는 거야. 그러고 진짜 어떻게 들어온 거야. 예고도 없이 쳐들어와 가지고.”

“뭐!, 못 나갈 이유라도 있냐. 선약 있냐.”

우리 목소리가 약간 컸는지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어릴 적 친구들이 나에게는 해수 엄마라는 엄마가 있다고 놀릴 만큼 나는 해수의 말에는 꿈쩍 못했다. 멀리서 일남이 다가오며 해수에게 아는 체를 했다. 해수는 길게 대답하지 않고 짧게 손을 흔들었다. 일남의 지속적인 시선에 나도 먼저 간다는 손만 흔들고 나왔다.


“뭐야, 어딜 가자는 거야.”

“그냥, 나 오늘 기분 별로야. 나도 자존심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 맨날 너 잡으러 다녀야겠냐”

“그렇지 않아도 내가 한번 연락할라 그랬다. 네가 반박자 빨랐던 거지”

“응 바다, 아니면 풀장. 여름엔 그런데 한번 가줘야 하는 거 아냐?”

“음마. 얘가 더위 먹었나, 그런 곳에 가려면 미리 전화해서 준비해 가지고 약속 잡아가야지. 근육이랑 수영복이랑 그런 거 챙겨야 하는데...”

해수가 드디어 웃었다.


“풋.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그래. 오후 3시에 나타나서 가자고 할 곳은 아니지. 근데 그게 챙긴다고 막 생기는 거냐. 근육이라는 거. 사실 이 동네에 볼일 있어 왔다가 집에 혼자 가기 싫어서 데려다 달라고. 아무리 더워도 다 그럭저럭 짝 맞춰 살 맞대고 다니는데 데 혼자 집에 가려니 심심하잖아. 그래서 같이 가자고.”

“더운데 왜 살은 맞대고 다닌데. 끈끈하고 땀띠 나게. 나에게 집착하지 마. 너의 짝을 찾아야 할 텐데"

“내가 니 친구들 처럼 가벼운 시람이 아니네. 눈도 높고 맘도 깊지. 내 수준 맞는 사람..”

“크. 니 수 주니어 아니라 널 재미있게 하는 사람 찾는 거지. 재미없는 거 싫어하니까. 잠시도 가만히 안 있고."

“그래서 네가 10년 동안 우리 집 안 오는 거구나. 재밌게 해 줄 자신이 없어서.”


어린 시절 해수와 나의 마을은 전원주택 단지였다. 말이 그렇지 사실상 변두리 중에 변두리였다. 행정구역상 서울이지 모든 생활환경은 시골 농촌이었다. 자라면서 우리 집이 서너 번 이사하는 동안 해수네는 계속 거기 살았고 몇 년 전에 새 집을 지었다. 그 후로 동네는 고급 빌라촌을 탈바꿈했고 지금은 미래형 커뮤니티가 되었다. 물론 땅값/집값 모두 엄청 올랐다. IMF를 버틴 금융인이라 자랑하는 해수 아버지의 탁월한 식견이었다. 개울 건너 논밭들은 신도시로 개발된다는 소문이 휨 쓸고 있어 앞으로가 더 기대되기도 했다. 딸만 둘인 그 집에 들어가는 것도 쏠쏠해 보였다.


“잠깐. 나 저기 좀 갔다 올게”

도서관 로비에서 바로 나오지 않고 멈칫하더니 해수는 수위 아저씨에게로 향했다. 손에 뭔가를 들고 팔랑거리며 돌아왔다.

“신분증이 없어서 이거 맡기고 들어갔지. 이게 바로 5만 원짜리 지폐 신권이다. 아저씨가 아주 융통성이 있으셔서 다행이지. 못 들어갈 뻔했어”


그녀답다. 출입증도 신분증도 없이 도서관이 들어올 수 있는 융통성은 수위 아저씨보다는 해수의 몫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탔다. 오후 4시 무렵의 기차 안은 한적했다. 에어컨도 제법 시원했다. 졸다가 슬며시 잠이 들었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채 머리를 맞대고 잠들었다. 어깨를 서로 부딪치며 가다가 해수가 흔들어 깨웠다. 버스에서 내렸다. 거기에 우리가 함께 다녔던 유치원이 있었다. 전형적인 시골 교회의 부설 유치원이었다. 교회의 건실한 청년부 신도였던 선생님이 유부남과 바람나 도망갔다는 것을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교회 뒤편으로 철길이 지나갔다. 그 철길은 지금은 사라지 흑연 광산으로 연결된다. 광산에서 돌과 흙을 싣고 저수지 옆을 거쳐 교회를 지나 어딘가 공장으로 향하는 그 철길은 지금도 기차가 다니는지 모르지만, 지친 현대인의 힐링 산책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철길을 따라가다 저수지를 반 바퀴쯤 돌면 해수네 집이었다. 그러니까 버스로 두 정거장쯤 미리 내린 것이다. 칠걸 침목을 깡충거리며 뛰어가던 해수가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언니 결혼한데!”

“그래!. 뭐야. 왜 벌써. 이제 겨우 졸업했는데..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이야?”

“언니를 사랑하는 사람.”

새삼스레 해수를 쳐다보니 언니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니를 시집보내는 것이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건 알겠는데, 너무 이른 것 아냐. 요즘은 서른 넘어도 결혼 안 하는데.”

“몰라. 근데 그게 언제 하는지는 아직 안 정했어. 남자랑 결혼한다는 것만 정했지.”

“정해지면 알려워. 결혼식에 꼭 가도록 할게. 한 때 내가 좋아했던 그녀의 결혼식."


너 유치원 때 생각나니”

언젠가 나중 일이 될 언니의 결혼식을 넘어 해수의 생각은 옛날 인연으로 향했다.

“내가 그네 타다가 형식이하고 싸운 일?”

“하하. 그거 내 평생 최초의 3각관계지. 그때 너네 둘 다 잘리는 건데, 원장이 별말 없이 넘어간 걸 보면, 뭔가 자기도 켕기는 게 있었던 거야. 문제 만들지 않고 조용히 있다 도망가려고 마음먹었던 거지"


마당에 단 두 개뿐인 그네를 해수와 내가 차지하고 노는데. 우락부락한 형식이 녀석이 다가와서는 자기가 해수와 놀게 나더러 그네를 양보하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돌을 집어 들었고 우리 둘이 뒤엉켜 뒹구는 동안 해수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셋 모두 일주일 동안 유치원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는 유치원에 돌아갔고 한 달 후, 오늘처럼 더웠던 날, 원장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그냥. 그때 정말 네가 아니었다면 그 녀석에게 순순히 그네를 양보했을 거야.”

“내가 없었다면 너희 둘 다 그네 타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걸”

얼마 전 형식이는 군에 갔다. 그 환송회에서도 그네 사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해수를 보고 유치원을 보니 그 사건이 먼저 떠오른 것이다. 기차가 지나가던 길. 레일에 귀를 대고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를 들었다. 형식이는 레일 위에 대못을 놓고 기차가 밟고 가길 기다렸다. 그러면 대못이 칼이 된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기차보다 엄마가 빨리 왔다.


기찻길과 저수지, 그 너머 논과 밭. 아주 멀리 흑연 광산. 어린 시절 우리가 걸어 다니던 동네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철길 주변으로 분위기 좋은 카페촌이 생겼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며 한 집 두 집 카페들이 불을 켜기 시작했다. 동네가 낯설어졌다.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실까?,”

“여기까지 와서 뭐 하러 돈을 써. 우리 집이 코 앞인데. 우리 집 뷰가 이 카페들보다 훨씬 좋다."

해수의 짧은 대답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수지 뷰, 논 뷰, 광산 뷰. 집을 새로 지어도 그것은 그대로겠구나.”


카페와 주점이 늘어선 것은 서울을 뺑뺑 둘러 이른바 교외라고 불리는 동네마다 나타나는 현상. 그 동네의 특성이 없는 풍경이었다. 다시 철길로 올라갔다. 레일을 발고 누가 안 떨어지나 내기하면서 해수의 집으로 향했다. 해수가 먼저 떨어지고 나도 떨어지며 자연스레 철길에 걸터앉았다.


“결국, 우리는 너무나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중얼거리는 해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농담이 아니고, 여기서 우리 집을 바라보면 아버지의 젊은 날을 상상하게 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나무 한 짐 지어다 주고 고등학교 입학하고, 성실하게 공부해 대학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고 굳건하게 가정을 지켜나가야만 했던.”

“과장이 좀 심하다. 625 때도 아니고 무슨 나무 한 짐 팔아서 고등학교 가냐. 가난한 집안에서 고생하신 건 알지만 남자들 일생이 다 그렇지 뭐. 가장으로 산다는 거. 나 같은 날라리도 결국은 그렇게 돼. ”

“그래도 현재는 여유가 필요해. 가장 될 때 되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던 일 다 때 리치 우고 여기까지 나를 데려다주는 여유. 우리가 특별히 사귀는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친구일 뿐인데. 그럼에도 아무 말도 없이 내 뜻을 따라 주었잖아. 그렇게 해서 너에게 도움 될 것 하나 없는데”


“짜샤. 그건 반대잖아. 친구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거지. 내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이라면 이렇게 충동적으로 따라 나서진 않지. 좀 더 로맨틱한 계획을 만들지.”

“그래. 그렇겠지.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사랑이라는 말.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얼마나 금기시하는지. 젊은 청춘들에게 가장 흔한 말이면서도 가장 듣기 힘든 말이었다. 그런데 거침없이 해수에게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왔다.


“난 아무래도 너를 사랑하나 봐”

해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대답할 말을 잃었다. 해수가 그런 말을 하다니.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나도 해수를 좋아한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시 말해서 해수와 결혼해서 애를 낳는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 마당에 해수의 지금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해수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너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 우리의 내부에는 선이 그어 저 있지.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다 보면 너는 나를 잊게 될 거야. 아까 도서관에서 본 네 친구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만나고 할 테지만 어느 날부터 너와 나는 소식도 모르게 될 거야.”


이제야 해수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해수는 가까운 장래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해. 어쩌면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가정에 고립되어 버리지. 그것이 여자의 한계는 아닐 거야. 언니가 시집가겠다는 말을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해. 남자는 사회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인데 반해 여자는 그 남자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남자는 자신의 책임감을 영예로 여기는데, 여자는 책임감을 갖는 걸 두려워해. 여자도 남자의 그늘보다는 자기 인생이 중요한 건데 말이야."


해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 같아서는 해수에게 평생 변치 안 는 좋은 친구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고 싶었지만 참으로 애매하고 별 의미도 없는 약속이 될 것 같아 말도 꺼내지 않았다. 사실 그 약속을 지킬 자신도 없었다. 한참을 저수지를 바라보다가 일어서 다시 걸었다.


“쓸데없는 생각.!”

겨우 한마디 했을 때 해수는 다시 명랑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 시간도 충분한데 밥이나 먹고 가라”


해수네 집에는 어머니 혼자뿐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집에 왔을 때, 가족을 기다리며 혼자 있는 어머니를 보며 해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는 따뜻한 콩나물굴을 끓여 주셨다. 언제나 하시니 말 한마디를 덧 붙였다.

"아무리 더워도 뜨거운 것을 잘 먹어야 장모님께 사랑받는다."


그랬다. 사위가 온다는 말을 들으면 장모는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한다. 씨암탉이든, 장어구이든, 콩나물 국이든 방금 조리한 뜨거운 음식을 잘 먹고 감탄하고 고마워하는 놈이 훌륭한 사위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