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 무지개를 잡는 아이들
When evening falls
저녁이 되면
She'll run to me
그녀는 내게 달려올 거야
Like whispered dreams
마치 살랑거리는 꿈과 같고
Your eyes can't see
그대의 눈으론 볼 수 없겠지
- Rainbow, catch the rainbow(1975)-
그날 이후 녀석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랐다. 현준은 서지연에게 부담 주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일남은 일남대로 침묵했다. 답답한 마음에 일남에게 열을 냈다. 녀석은 히죽 웃기만 했다. 카페에는 20세기 음악이 흘렀다. 궁정의 아가씨가 찾아올 것이라는 마구간 소년의 기대. 과연 그녀는 올까?
“역시 내가 큰 일 했지. 그날 내가 소현이 보고 싶다 하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 일단 저지르니까
현준이한테 좋은 일이 생기잖아. 너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정성껏 도와줄게."
일남은 현준이 서지연과 다시 잘 이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웅크린 구름같이 언제나 비가 그치길 기대하며
무지개를 쫓았다.
현준이 왔다. 일방적으로 불러냈다. 현준은 너무 착하다. 그렇게 착할 수가 없다. 술도 못 먹는 녀석이 술꾼들의 카페에 왔다. 그래서 현준이 좋다. 서로 눈치 보며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 셋을 카페 사장 형이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 밥은 먹고 다니냐. 초저녁부터 사내 셋이 모여서 뭐 하냐?"
계속 무지개에 대해 생각했다. 무지개를 잡을 기회였는데 놓쳐버렸다. 일단 현준부터 처리해야 했다. 그쪽이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의 마음은 변함없고 서지연이 다시 다가올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확인했으니까. 현준만 마음을 돌리면 되는데. 그날처럼 다시 우연한 만남을 만들어 볼까. 좀 더 내버려 둘까.
“지난번 일이 있은 후에 얘는 김소현을 다시 만났냐?”
직접 묻지 않고 나에게 우회적으로 물었다. 없는 사람 씹듯 대답했다.
“아니. 완강해. 얘도 모 지가 잘한 것이 없으니까 더 이상 까불지도 못하고. 그날이야 술 김에 떠들었지만 지가 지은 죄가 있는데 제대로 하겠어. 내세울 것이 뭐가 있냐. 사귈 때 잘해준 것도 없는데”
"내가 뭘.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
'최선이란 말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냐. 진심이라 그러면 모를까."
현준이 나직하게 타일렀다. 두 놈의 대화를 반쯤 비웃었다. 너네 둘 다 똑같은 놈이라고.
“너야말로 서지연이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할래?”
“그것은 더욱 가능성 없는 이야기지. 언젠가는 마음이 변할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지연에게 모질게 한 만큼의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심하게 굴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해.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어”
너그러운 미소의 현준도 이 부분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자신이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녀를 차 버린 것은 건강한 사람과 미래를 만들라는 배려였다고 우겼다.
“너의 건강에 대한 그때 판단이 오버였고, 지연이 다른 남자를 만난 것도 아닌 것이 다 밝혀졌는데, 계속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잖아. 야구에서도 오심이라 판단되면 판정을 번복하는데.”
“우리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 모른척하고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너의 문제를 청산하면 좋잖아. 앞으로도 계속 서지연과 마주칠 테고 어떤 식이든 오해를 풀고 원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은데.”
일남이 다시 나섰다. 침묵이 흘렀다. 현준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계속 완강하게 거부했다. 아직도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두 사람. 불편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심심할 정도로.
“돈가스 먹고 학원 가야겠다”
현준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저녁만 먹고 현준은 가버렸고 일남은 남아서 다시 맥주를 마셨다.
“기필코 내가 재들을 다시 만나게 할 거야.”
“어떻게?”
“짜식아, 이럴 땐 상대편을 공략하는 거야. 중앙 돌파로 나가는 거야. 너희들은 항상 측면 돌파를 시도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거라고.”
술 마시고 시끄럽게 하는 것이 중앙 돌파인지 모르겠지만 일남은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일주가 지난 후, 일남으로부터 희한한 초대가 왔다. 느닷없이 개강 파티를 한다고 다 모여서 한잔 하자는 제안이었다. 심지어 모임 날짜가 자신의 생일이라는 생각도 못한 부제를 붙였다. 너무나 속이 들여다 보이는 방법이었다. 우리야 그렇다 치고 영문과 이이들도 초대한다는데 그 내막은 모를 일이었다.
모임 장소에 도착했을 때. 서지연을 체포하다시피 끌고 오는 영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김소현도 따라왔다. 계속 꼬리를 빼는 서지연을 두 친구가 목을 휘어 감고 제어했다. 우리 패거리 다섯과 영문과 두학생,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진짜 일남이 생일인 줄 알고 온 일남의 고등학교 동창들. 사람을 모으는데 까지는 성공했는데 현준과 서지연 사이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야, 오늘 내 생일인데, 이렇게 다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모 얘기들 좀 하지. 우리끼리만 있는데 서로 아는 체도 안 할 거야. 내가 먼저 소식을 전하면 나 여기 김소현 양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오늘 생일이라고 오늘만이라도 웃는 얼굴 보여달라고 살살 빌었지”
김소현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녀는 어느새 고전 미인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발칙한 놈. 일남은 현준과 서지연의 재회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그녀를 구워삶은 것이다. 저 순수한 처자는 그렇게 쉽게 넘어온 거고.
“현준! 너 이런 식으로 내 생일 분위기 망칠래, 말도 없고 이러다 분위기 폭발하면 누가 책임질 거야”
내적 갈등을 마감했는지 현준에게서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만으로 심경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현준은 웃지만 그 내면까지도 웃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내가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데, 도서관에 깜빡 놓고 왔어. 잠깐 다녀올게”
현준은 우리의 기대를 깨뜨렸다. 서지연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운 자리에 함께 해준 그녀에게 우리들이 민망했다. 서지연은 김소현과 영주를 원망 어린 눈길로 쳐다봤다. 이런 상황을 예감하고 그녀는 안 오겠다고 했지만 영주가 다른 동창들도 올 것이라고 설득했다는 거다.
현준이 난처한 지리를 도망쳤다고 생각할 무렵 현준은 진짜로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현준의 선물을 시작으로 우리도 각자 준비한 선물을 내놓았다. 일남은 선물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술잔이 돌기도 했지만 선물 증정이 끝나자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말 없는 두 사람이 다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깜깜했다.
‘그동안 미안했어. 다시 시작해 보자’
한마디 못하는 현준이 원망스러웠다. 가슴에 담긴 말을 털어놓지 못하는 두 사람 모두 심란했다. 차라리 단 한 번만이라도 대차게 싸웠으면 싶었다. 저렇게 서로 노려보지만 말고.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오실 줄이야. 좀 더 일찍 알아봤다면 제가 좀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야 알아보게 되다니, 너무 늦지 않았다면 저에게 기회를 한번 주지 않으시겠어요?”
서지연의 표정이 당황과 기쁨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현준의 그 말투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날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현준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의 아이로 돌아갔다. 커다란 웃음을 가진 아이.
“아름답다는 칭찬이 항상 지겨웠어요. 아름답다는 것은 충분히 자랑일 수 있는데,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언제 가는 사라지겠지요. 어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듯이.”
“저런.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현준이 강하게 부정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일남을 위한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친구들은 두 사람에 거 시선을 거두고 둘 만의 대화가 이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 그들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 김소현의 흐뭇한 고전 미소와 신난 일남의 떠들썩함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모두 우리를 위해 수고하셨어요. 지난번 밤에 빌려드린 돈 갚으시고요. 일남 씨. 제 생일은 다음 달이니 잊지 미시고요. 영주야 오늘 끌고 와 줘서 고맙다. 소현이는 너희들 연애에 디사는 나를 이용하지 말고. 너희들은 계속 술 마셔. 술 안 먹는 이 친구는 내가 데려갈게”
우리가 처음 알았던 서지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모든 친구들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새로운 한 학기가 시작되었다.
We believed we'd catch the rainbow
우리는 우리가 무지개를 잡게 되리라 믿어 왔어
Ride the wind to the sun
바람을 타고 태양을 향해서
Sail away on ships of wonder
경이로운 배를 타고 출항하며
But life's not a wheel
하지만 인생은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야
With chains made of steel
강철로 된 사슬도 달려있지 않지
So bless me
그러니 나를 축복해 줘
“일남이 생일날. 선물 가지러 간다고 나갔잖아, 그때 어디 갔었냐. 진짜 궁금해”
“그냥 교문 앞 횡단보도 앞에 앉아 있었어. 어떡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그러다 문득 횡단보도 건너오는 사람 한 명 찍어서, 그 사림이 보도로 올라올 때, 왼발이면 지연에게 다시 인사하고 사과한다. 오른발이면 그냥 집으로 가버린다에 걸고 기다렸는데 결국 왼발이 걸렸지”
"왼발 걸릴 때까지 여러 번 한 건 아니고?."
그 중요한 순간에 어딘가 분위기 있는 곳에서 고뇌했을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가 떠들썩한 거리의 소음 속에서 사람들의 발을 바라보며 선택을 했다는 점이 어처구니없었다. 웃음 뒤에 눈물이 났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만들지 않고는 돌아오기가 힘들었나, 지난 시간 속에서 새로운 운명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으리라.
그런데 나의 운명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