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움에 대하여
“이번에는 너냐. 아무리 예뻐도 나는 신경 안 쓴다. 너희들의 짝 찾기에 나는 지쳤다.
끓여 먹든 삶아 먹든 네 맘대로 해라. 나는 모른다. 나에게 말하지 마라.”
“그냥 한번 보라 것뿐인데, 저기 저 여학생. 딱 내 스타일이라고. ”
영식이 꼬리를 말았다. 지나치게 짜증을 내는 내 모습도 싫었다. 하지만 일남과 현준의 연애사에 지쳐있는 나에게 영식마저 들이대자 짜증을 낼 수밖에.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딱 얼어붙고 말았다.
또 너냐. 그 여학생은 민성원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 번쯤 등장하는 것은 맞는데 그것이 영식을 통해서라니. 정신이 어지러운데 영식만 신나서 떠들었다.
“어때, 대단한 미모지. 저런 애가 우리 학교에 있었다는 점이 놀라워. 거기다 공부도 열심히 해. 경영학과 애들이 저렇게 하루 종일 공부하는 애는 거의 없대. 조용하고 품위 있는 자태, 딱 나의 이상형이라고.”
뭐가 이상형이라는 건지. 민성원과 장일남 사건을 알고 하는 말인지. 그녀와 내가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마주 보고 공부했다는 것을 알면 이 녀석은 뭐라고 할까.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습게도 그런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성원을 다시 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기쁨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것 좀 그 애 자리에 놔줘”
“네가 직접 갖다 놓지 왜 그런 일을 시키는 건데..”
“왠지 쑥스럽다고,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갖다 놓는 것은 네 주특지잖아.”
"쑥스러울게 뭐 있냐. 나른한 오후에 시원한 음료 한잔 마시라는 건데.. 배짱으로 하는 거지”
"그러니까 네가 좀 해달라고"
나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영식이 행동할 뜻은 없었다. 음료수를 받아 들고 민성원의 옆을 지나며 슬쩍 올려놓았다. 성원 옆에 앉았던 남학생이 쳐다봤다. 눈으로 웃었다. 멋대로 생각하라 하면서도 그놈이 지켜보는 것이 찝찝했다. 성원은 반응 없이 책만 들여다봤다. 잠깐 고개를 들고 손을 대지 않으면서 음료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원하게 마시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내 신호를 본체도 않았고 주인 없는 음료수만 외롭게 떨었다. 그렇게 대치의 시간이 흘렀다.
일남이 나타나서 영식과 함께 뒤죽박죽 대화가 이어졌지만 뒤통수가 따갑고 음료수의 상황이 궁금해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영식은 그냥 뒤에서 내 모습을 바라고 있을 것이 신경 쓰였고, 기분 전환을 위해 같이 나오지 않는 일남을 원망했다. 혼자 투덜거리며 카페 산 타'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 사장 형은 바에 앉은 여자 손님과 대화하느라 내가 들어서도 본체도 하지 않았다.
여자 손님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그 손님은 우리 스터디 멤버 영주였다. 영주는 무슨 일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나. 이유를 캐묻고 싶었지만 나설 분위기가 아닌 듯해서 뒤편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뒷모습을 보며 영주의 최근 모습을 생각했다. 유난히 뭔가 우울해한다 할까, 외로워한다 할까,
그러고 보면 함께 어울린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영주의 존재감을 잊고 있었다. 누군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타나서 도움이 되곤 했다. 일남이 생일에 현준과 서지연이 다시 엮인 것도 70%는 영주의 공이었다. 그런데 정작 영주의 문제는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녀 차례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녀의 문제는 무엇인지.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어떤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건가. 친구들이 알면 안 되는 문제. 그래서 저기서 술을 마시나. 꼭 그렇지도 않지. 비밀이라면 우리들이 몰려올 것을 뻔히 알면서 여기 있지는 않을 텐데. 나의 상상이 한없이 뻗어 나가다가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냈다. 지난봄에 잠깐 보았던 장면.
벚꽃이 활짝 피었던 그날. 나무 그늘 아래서 분명히 보았다. 유난히 창백한 얼굴의 소년. 영주와 함께 있었다. 다만 그때는 영주와 친하지 않아 관심 없이 흘러갔던 풍경. 물 건너왔던 아이. 그 아이가 돌아갔다는 생각. 교환 학생으로 왔던 그 아이가 돌아간 이후 그 소년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소년은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그래서 영주가 슬픈 건가. 잠시 후 나는 그것에 대한 확인도 없이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다. 갑자기 영주는 비련의 주인공으로 내게 뒷모습을 보이며 맥주를 마셨다. 안타깝다. 영주는 실연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일남과 영식에게 빨리 오라고 불렀다. 함께 영주를 위로해야지.
“난 매일 술을 마시지만, 이렇게 다 모여서 먹는 것은 진짜 오랜만인데. 일남이 생일 후 처음인가”
"현준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듯 영주가 말했다. 왠지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언제 붜 실연을 아픔을 술로 달랬는지. 말려야 했다.
“그래 오늘 모처럼 사는 이야기 좀 해보자. 그동안 너무 공부만 했어.”
화제를 돌렸다. 현준과 서지연의 재회 이후의 소식부터 전했다. 일남의 연애 전선에 대해서도 물었다. 내심 영주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빌드업했다.
“나는 여기서 처음 말하는데, 나 아까 그 여학생 포기했다. 음료수에 꿈쩍 안 하는 걸 보면 절대 아무도 그 학생을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영식은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영식과 와 민성원을 엮어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열 내다가 혼자 포기해 버린 것이다. 어떤 면에선 불쌍했고, 한편으론 미안했지만 모두의 무관심에도 즐겁고 씩씩하게 사는 것 또한 영식의 장점이었다.
“나도 그 애 봤는데, 나는 너희들이 돌아가면서 그 애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 친구 서지연이 만큼 활달하지도 않고, 김소현이만큼 이쁘지도 않고.”
“너 만큼 영리하지도 않고..”
일남이 영주의 말에 반응했다. 민성원에 대한 감정의 찌그러기가 있는 듯 근거 없는 비방을 했다. 오히려 영식이 그녀에 대한 찬사를 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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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특별한 분위기가 있어. 아주 모랄까. 그 모지. 오만과 편견. 어쩌다 그 애가 한번 웃으면 세상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야. 거기다가 눈을 크게 뜨고 총총히 바라보면 어떤 남자도 그 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숨이 막혀.우리 모두는 그 애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돼. 그래서 아무도 대시할 수 없는 거야.”
영식의 변론에 내심으로 동의했다. 모두가 탐내지만 아무도 독점할 수 없는 보석. 어떤 날은 얼음장처럼 쏘아붙이고, 어떤 날은 장난스러운 윙크를 하기도 하는 그녀. 대부분의 시간은 호수 같은 분위기로 주변을 감싸고 있다가 나의 시선 속에서 잠시 미소를 띠며 뭔가 물어볼 것 같은 그녀의 눈빛.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나의 주된 미션이니까.
성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화제는 다시 영주에게로 향했다. 영주는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 했다.
“언젠가 말했지. 나는 스무 살에 한번 이별한다고, 그런데 지금 우리 몇 살이냐. 스물한 살이지. 나는 하나도 안 변했어. 근데 벌써 나는 몇 번 이별을 하는 거니. 두 번, 세 번, 아닌 것 같아. 이번 이별이 나에게는 최초의 이별인가 봐. 왜냐고. 이번에야 말로 진짜 아픈가 봐. 언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이별하겠지. 그땐 또 처음인 것처럼 많이 아플 거야. 그땐 분명히 열심히 살았을 테니까 더 아플 거야. 아무리 많은 연습도 그 아픔을 익숙하게 만들지는 못해. 우린 항상 처음인 것처럼 아프게 이별하는 거야”
스무 살의 감성으로 평생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스무 살을 넘어섰다.
“제길.. 성실하게 성공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빛나지 않은 곳은 여기밖에 없을 거야”
일남이 투덜대고 있었다. 어쨌든 성공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자. 한 계절만에 이렇게 입장이 바뀌다니.
“우리 이렇게 맨날 술만 마시지 말고 다 같이 어디 놀러라도 가자. 가을 여행”
영식의 느닷없는 제안에 모두 동의하며 주말여행 계획으로 화제는 다시 흘렀다.
“나는 비행기 타는 여행을 하고 싶은데.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영주가 느닷없이 비행기 이야기를 꺼냈다. 주말여행과 비행기를 엮는 비약에 놀라 돌아보니 그녀는 땀을 닦으며 맥주를 벌컥였다. 땅 하고 잔을 내려놓으며 정말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난 아직 비행기를 못 타 봤어!”
“저런 저런.. 다음에 우리 집에 가자. 비행기 타고 가자. 나는 수도 없이 탔다. 집에 갈 때마다"
일남이 말했다. 일남은 고향은 제주도였다. 중학교 때부터 서울 살이를 했다. 일남이 아버지는 서울 동대문 어딘가에 상가를 하나 가지고 있다 했다. 누나들이 시집가고 대학 가고 서울로 올라올 때 일남도 딸려보내며 그 상가 임대료 받아서 생활비를 충당하게 했다. 중학생 때부터 건물주였던 아이. 누나들 집에 돌아다니며 얹혀살지만 생활비에 당당한 남자. 장일남이었다.
“멍청한 놈. 그럴 땐 어디 갈 거냐고 물어야지.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서 뭐 하냐."
"그렇지. 영주가 말하는 것은 국제선이지."
"뉴욕. 나는 거기에 가고 싶어."
대화가 거기서 끊겼다. 뉴욕. 나도 거기에 가고 싶은데. 어떤 때는 월가의 주역으로, 다른 날에는 예술가로 거리를 누비는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영주가 뉴욕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런 꿈이나 성취를 위한 차원이 아니리라. 그냥 뉴욕을 동경하는 것은. 거기에 살고 있는 한 소년 때문에, 유난히 창백한 그 아이.
“우린 그냥 그 애가 혼자 외롭고 쓸쓸해서 네가 가이드하면서 도움을 주었던 것 정도로 아는데, 우리 모두에게 그랬던 것처럼.”
“물론, 처음에는 그랬어, 어쩌면 그 애가 체류 기간이 끝나면서 비행기를 타던 순간까지도 그러고 싶었어. 그런데 그 비행기가 뉴욕에 내리기도 전에 난 그 애가 보고 싶어 졌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그리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사무치는 그리움. 전화나 이메일 따위론 해결될 수 없는 그리움, 그래서 영주는 비행기가 타고 싶었다.
“물론 다시 온다고 했지만,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더 내가 떠나고 싶은 것 일 거야. 내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 후에야 그가 다시 온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차라리 지금 내가 비행기를 타고 거기로 가고 싶어”
창백한 얼굴의 소년은 아주 나쁜 놈이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의 호흡을 빼앗아 가다니. 내가 이런 신파 감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카페 문이 열리고 새로 손님이 들어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잘 먹었어!"
분명히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새로 온 손님은 민성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