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순간

by NIL

기막힌 순간 - 분명히 올 줄 알았다.


“거기에 메모가 있었어요. 여기서 만나자는."

"......"

할 말을 잃었다. 영식을 쳐다봤다. 녀석이 한 짓이 분명했다. 눈짓을 해도 녀석은 나서지 않았다. 누가 일을 저지르든 항상 마무리는 내 몫인가.

"아. 저도 깜빡하고 친구들을 불렀네요."

"제가 늦은 모양이군요. 전화번호란도 남겼으면 문자를 했을 텐데... 그럼 재밌게 노세요. 전 그럼.."

그녀가 돌아서 나가려 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리가 하얘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구나. 저렇게 가게 둘 수는 없다는 생각과 그렇다고 내가 부른 것도 아니지 않냐는 회피. 나에게 저 아이는 어떤 의미일까 하는 성찰까지. 누군가의 시계에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날도 더운데 힘들게 왔으니 맥주나 한 잔 마시고 가요"

영주가 일어서며 그녀를 만류했다. 그리고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민성원과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영주였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공기의 흐름을 살피던 카페 사장형이 다가왔다.

"오늘 처음 온 친구인가. 그럼 내가 서비스로 특별히 맛있는 맥주를 제공해야겠네."

"아! 사장님이세요!. 사장님 인상이 좋아서 한 병만 마시고 갈게요."

선배의 말에 순순히 답한 그녀가 선택한 자리는 우리 테이블이 아니고 바였다. 1시간 전에 영주가 앉아있던 그 자리에 그녀가 앉았다. 선배가 그 앞에 코로나 맥주 한 병을 내놓았다. 비싸서 우리는 잘 먹지 못하는 백주를 서비스로 내놓다니. 저 선배가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면 따른 생각. 민 성원이라는 여성은 모든 남자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머금게 하는 마녀인가.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네가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어쨌든 너를 보러 온 건데."

영주가 걱정스레 말했고. 일남이 내 뒤통수를 쳤다. 역시 독촉의 의미였다. 정작 사건의 주범인 영식은 딴청만 피웠다. 어지러운 시선이 오가는 순간, 카페 문이 열리고 일단의 학생들이 떠들썩하게 들이닥쳤다. 홀을 한 바퀴 돌며 시끄럽게 자리를 고르더니 센터 테이블을 차지했다.


“자 맥주를 더 먹으려면 너도 이리 와라. 거기서 생산성 없는 대화하지 말고.”

선배가 정확히 나를 지목해 말했다. 목소리가 센터 테이블의 소란을 건너 내게 다가왔지만 못 들은 척했다.


"근데 저 형은 언제부터 여기서 카페를 하는 거야. 우리 과 나왔다면서."

물색없는 영식이 다시 철 지난 화제를 끌어냈다.

"우리 등산 동아리에 얽힌 슬픈 전설이 있어."

"등산 동아리니까. 뭐 누가 히말라야 가서 죽기라도 한 거야."

"됐어. 그만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냥 맘 좋은 카페 사장님이 있어서 편하게 술 먹으면 된 거지"

오히려 영주가 만류하고 나섰다. 그 형의 사연을 선배들로부터 띄엄띄엄 들었지만 직접 들은 적은 없었다. 디센터 테이블의 사람들 사이로 가려진 선배의 모습을 보려 살짝 일어섰다. 선배는 앞에 앉은 민 성원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말하는 중. 도대체 저 과묵한 사람이 낯선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계속 궁금했지만 다기가지 못했다. 선배가 돌아서서 다시 음악을 틀었다. 역시 20세기 음악이었다.


Unchain my heart!

baby let me be.

cause you don't care,

help me,

set me free.

-Unchain my heart, Joe Cocker-


선배의 생뚱맞은 선곡 능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 그의 거친 목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타고 홀 안을 울리는 동안 계속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게 만들었다.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는 두상이었다. 약간 길지만 너무 길지 않은 단발머리도 아니고 뭐라 부르는지 모를 머리는 살짝 염색한 것인지 타고난 것인지 옅은 갈색으로 빛났다. 어쩌면 그 바를 비추고 있는 조명의 영향일 수도 있으리라. 선배가 뭐라 마말하고 그녀가 웃는지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못마땅한 순간. 저 아이가 여기 온 이유는 나 때문인데..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고 오늘은 어떻게든 말을 해봐야겠다 결심했다. 음악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