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대화

by NIL

첫 대화 -폼 잡고 시작했는데..


“맛있게 드세요”

거듭되는 사장형의 손짓에 다가가서 바보같이 말했다. 절대 맥주 마시고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급식을 먹을 때나 의례적으로 할 말인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나와 민성원 사이에 흐르는 경계와 친밀감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치 확실한 약속이 있었던 것처럼 여기에 나타난 그녀와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뒤에서 관찰만 하던 나. 드디어 아주 가깝게 마주 보고 앉았다.


"내가 몸을 조금 돌려야곘죠!"

기다란 바에 사장형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은 나를 위해 그녀가 몸을 틀었다. 역대 가장 가깝게 얼굴을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그녀의 눈동자는 순수한 검은색은 아니었다. 쌍꺼풀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변했다. 가장 시원스러운 것은 옆으로 길게 자리한 입. 정확히 말하면 윗니 8개와 아랫니 4개가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밝은 얼굴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다니. 기네스 맥주가 먹고 싶었다.


“댁의 친구들은 비둘기 같아요!"

통성명도 하기 전에 도발적으로 말했다. 말은 그래도 얼굴에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그런 면에서는 나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게 무슨 말?"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존댓말을 야하나 반말로 해야 하나? 대충 얼버무렸다.


"째려보고 위협해도 달아나지도 않지. 혼자 있는지 알았는데 어느새 네댓이 모여있고 수시로 모여서 중얼거리고 있으니까요. 잘 모르지만 누가 흘리면 잘 주워 먹고 다닐 지도. 딱 비둘기들의 모습이어요. 물론 평화상징이니까 싸움은 안 하겠지요."

웃음기를 함박 머금은 채 혼자 말하고 두 눈을 시옷자로 내리며 나를 바라봤다. 뭔가 반박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가슴을 내밀었다. 대항하는 말을 해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순발력 없는 사람은 아닌데..


"덕수궁에 가보고 싶어요"

내가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다시 몸을 바로 하고 사장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그쪽을 바라보며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내가 이쪽으로 오기 전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의 연속이었다.

"이 학생은 고향이 송안이래. 지금 2학년이니까. 서울 온 지 2년이 다돼 가는데 아직 못 가본 곳이 많다며...

근데 왜 하필 덕수궁인가...."

사장형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함께 말했다. 덕수궁. 대학에 온 이후 한 번도 안 갔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덕수궁, 정동교회에 이르는 거리는 고등학교 시절의 놀이터였다. 학교 가기 싫은 날, 조퇴하고 싶은 날, 야간의 일탈이 필요한 날. 그 거리를 쏘다니며 놀았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대학생이 되고도 한 번도 안 갔다고!


"송안. 거기는 멀지도 않은데. 서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근데도 덕수궁에 안 왔다고. 미술관 전시도 있고 학생 대상 백일장 같은 행사도 많이 하는데 한 번쯤은 왔겠죠."

두 사랍 중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말했다. 그녀가 몸은 그냥 둔 채 머리만 내쪽으로 돌리며 흘겼다. 그 눈빛에 놀라서 바닥을 쳐다봤다. 어느새 내 앞에 놓인 기네스 잔을 들고 천장을 쳐다보며 들이켰다.


“비둘기들이 예전에는 사람이 오면 피했는데, 요즘은 사람을 보면 다가와 먹을 것을 구걸해요. 누가 총 들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닭이 되고 싶은 건지. 그렇지만 닭처럼 잡아먹을 수는 없으니 점점 쓸모는 없어지고 개체수는 많아지면 시람보다 비둘기가 많은 세상이 올까 봐 무서워요.”

“설마 그럴까.! 그래도 야생동물인데 자기들이 알아서 적절하게 자연의 섭리대로 살겠지”

이게 무슨 분위기인지. 나의 말은 씹혔고 두 사람은 정말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이놈들은 천적이 없잖아요. 사람의 음식을 먹고, 등치가 커지면 도시의 지배자인척 할 거예요.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둘기 이야기를 하는 중이어서 우리 친구들을 비둘기에 비유했던 걸까. 시골 아이라서 야생동물에 관심이 많은 걸까. 비둘기를 야생이라 하긴 좀 그렇다.


“비둘기들이 어울려 다니며 학교와 도서관이란 체제를 구성하고 그 보호아래서 매일 즐겁게 지내는 방법을 알아내는 거죠. 여자 친구 만들고, 어울려 다니며, 술 마시고 영화 보고 또 수업도 같이 듣고, 밤에는 게임하고 아침이면 초점 잃은 눈으로 버스 타고 왔다가 친구 만나면 다시 초롱초롱해지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요즘 대학샏생들은 유쾌하기만 한 비둘기들 같아요”

분명 이것은 디스였다. 우리 패거리를 향한 조롱이었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그녀의 말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저 아이들이 다수가 되어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가겠죠. 유복한 환경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비둘기들이

강력한 생존 본능으로 도시에 철저하게 적응한 개체로 진화해서 모든 음식을 쪼아 먹으면 우리 같은 시골

비둘기들은 시골을 돌아가야 하나요? ”

“그렇지 않지. 학생은 이미 시골을 벗어났잖아. 말 안 해도 송안에서 전교 일등이었을걸. 누구보다 공부도 잘하고 이쁘고, 상냥하고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상위권으로 평가받는 재원인데.”

선배 형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우리는 왜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거지.


“이쁘고 상냥하니까 상위권이라고 누가 정했대요. 지들끼리 키득거리며 정한 건가요. 이쁘다는 기준이 뭔지.”

이번에는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대답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내가 입술을 달싹거리자 사장형도 대화를 멈추고 발언권을 나에게 토스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우리는 훌륭한 한쌍의 커플이 될 거예요. 그게 나의 목표입니다. 우리 함께 해요”

바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뭐야요. 이 두루미 같은 경우는....”

비둘기와 차별화하려면 그런 경우 대부분은 백로를 말하거나, 간혹 강한 이미지의 매나 독수리가 등장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두루미가 등장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명랑해서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내 손에 잡힌 그대로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사장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잔 더 주세요. 두루미 목마르데요.”

나를 보고 웃었다. 언젠가처럼. 다부지게 입을 꾹 다문체 왼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눈이 커지는 특별한 웃음이었다. 내 앞에 앉은 아이가 민성원인 것은 확실했다.




"이 카페 이름의 유래를 알려주세요?”

테이블에서 아이들과 하던 이야기가 생각나 화제를 돌렸다.

"디어 마이 프렌드, 산신령에게 바침. 이게 이 카페의 콘셉트이야."

콘셉트이라니. 무슨 제3의 공간도 아니고. 공부 좀 한 사람들은 이게 문제였다. 저 잘난 맛에 떠드는 거.


“이 공간은 내 친구 산신령에게 바치는 공간이야. 그래서 올 때마다 각자 이름을 적는 거야. 산신령에게 기억해 달라고. 그 맨 앞에 항상 내 이름을 쓰지.”

선배의 시선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 본 표정 중에 가장 쓸쓸해 보였다. 민성원은 어느새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장형은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민성원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산신령에 대한 이야기를 독촉했다. 큰 눈과 큰 입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라니. 그동안 내 시야에 놓인 하나의 정물이었던 아이가 촉망받는 생명체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