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대화

by NIL

계속 대화 - 슬픔을 이야기하는 방법


잠시 시간을 흘렸다.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를 초청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마주 보는 상황이 우스웠다. 그래도 함부로 보낼 수는 없어서 뭔가 말하고 싶었다. 입안을 맴도는 말과 가슴에 맺힌 생각들. 그렇게 다시 시간을 흘렸다.


"이제 그쪽의 이야기를 해봐요"

다시 눈을 크게 뜨며 그녀가 내게로 향했다. 카페의 음악은 세 번째 바뀌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망설였다. 어린 시절 아니면 덕수궁, 그것도 아니면 그녀를 처음 보던 날부터...


"그쪽도 산신령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나는 산신령을 모른다. 이 카페에 등산동아리 선배들이 많이 드나들었으니 그중에 산신령 하나쯤은 있었겠지. 동아리 선배들의 아지트인 이 카페가 한 사람을 위한 공간이란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장비도 정보도 부족했던 20세기에 히말라야 원정을 떠났던 슬픈 탐험대의 전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을 잊지 못해 여기 모여들어 술잔을 기울이며 추억을 나누는 사람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산에 가지 못하는 등산 동아리. 혼자 또 너무 많이 갔다.


"얘들은 몰라. 한 번도 말한 적 없으니까."

사장형이 말했다. 민성원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 똥그래진 눈으로 그을 바라봤다. 이런 식의 대화라면 계속 소외될 것 같은 불안이 휩쓸고 들어왔다. 대화의 주도권. 아니 적어도 그녀와 계속 인연을 이어갈 건더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렇게나 끼어들었다.


"그 산신령이라는 선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죽었지. 네 질문을 정확히 하면 어떻게 죽었냐는 거지."

"......"

다른 사람의 슬픈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나의 섣부른 질문이 사장형의 슬픔을 소환했다. 어두운 빛이 스쳐갔다. 쓸쓸함에 대한 최대한의 공감을 표현하는 눈빛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너희들 선배였어."

당연히 그렇겠지. 우리 학교 등산 동아리니까..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지."

역시. 희말리야 원정이었구나. 듣는 것보다 생각이 빠르게 이야기를 쌓았다.

"한밤 중에 전화가 오면 무섭지. 그날 처음 알았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연락이 늦게 왔구나. 불쌍한 선배들 얼마나 황망했을까. 몇 명이 가서 몇 명이 사고 난 것인지. 내가 생각하는 동안 민성원도 잠자코 들었다.


"병원으로 달려왔어. 소식을 들은 순서대로. 그렇지만 그 친구를 볼 수 없었지. 이미 현장에서 모든 것은 끝났던 거야. 우리는 그렇게 그 친구를 보냈어. 그날의 사고 이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여기에 가게를 내게 된 거야. 그 아이가 좋아하던 맥주와 음악과 사람들이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많이 사랑하셨군요. 많이 슬프셨고.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아가신 분도 여기 자주 오실 거예요"

민성원이 말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사장형을 바라봤다. 나도 따라 했다. 맥주를 마시고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보았다.


"너무 흔한 일일지도 몰라. 사회적으로 촉망받던 젊은이가 야근에 지친 몸으로 탄 택시. 역시 과로로 흔들리던 기사와 마주 오던 음주 운전 차량. 너무 뻔한 상황에서 너무 어이없게 모든 일이 끝났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스물다섯은 죽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어"


사장형의 말 끝이 흐려졌다.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카페 한쪽 편에 놓인 동아리 멤버들의 사진 중에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궁금했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던 존재. 여러 장의 사진 속에 항상 사장형의 왼쪽에 있던 긴 머리의 여학생. 스물다섯에 죽은 친구의 모습을 지우지 않고 있는 사장형.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녀서 산신령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별명이었다고 말하며 다시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너희들도 어쨌든 직장 잘 잡아. 야근 없고 집 가까운 곳으로. 학교와 직장은 걸어 다니면 최고야. 나처럼."

의미 없는 마무리에 마주 보고 웃었다. 민성원도 나를 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 미소였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너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지난봄의 어느 날. 일남에게 이끌려 가서 처음 본 그 밤부터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분명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막연한 연모였는지 무도한 스토킹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서로를 의식하며 지낸 6개월. 오늘 기회가 생겼을 때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막상 장이서니 살 물건이 없는 것처럼 막연했다.


"우리 오늘 아침 버스에서도 만났죠. 그 버스엔 우리 고등학교 애들 많이 타는데...."

정말 할 말이 없어 지역사회 족보부터 던졌다.

"이미 말했는데 저는 송안 출신입니다. 대학 들어오면서 그 동네에 살게 된 거고"

"아. 그랬구나.. 송안. 송안이라고 했지요. 나도 사실 서울 변두리 출신이라 시골이나 마찬가지예요"

"지금 송안이 시골이라 하시는 겁니까. 인구 백만이 넘는 도시를....."

"아 시골이라기보다는... 지방... 서울 아니고 지방..."


대화는 힘들다. 모든 대화는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나의 호감을 표현할 순간에 엉뚱한 말을 한다.

나에게 이 아이는 어떤 의미일까. 질문만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