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by NIL

삽화 - 우연이 만드는 그림


버스를 기다리며 우연한 만남을 기다렸다. 불규칙한 버스 배차 시간과 정류장 간의 간격을 고려하면 만남이 이루어질 확률은 반반이다. 이번 학기에는 그녀의 시간표가 바뀌었는지 아침 일찍 나오지 않았다. 역시 버스 안에 그녀는 없었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려서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혹시 다음 버스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대만 기다리기로 했다. 지나가던 영주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해, 수업 안 들어가”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영주의 출현 자체가 성가셨다.


"어젠 집에 잘 갔냐. 꽤 진지하게 대화하던데. 우리 가는 것도 모르고. 근데 여기 계속 서 있을 꺼냐"

혼자 말하고 뭔가 깨달은 듯 영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고 가 버렸다. 모퉁이로 자리를 옮겨 담배 하나를 빼 물었다. 뭔가 확실한 예감이 오는데 버스는 계속 허탕을 치며 지나갔다. 계속 기다리고 4번째 버스에서 학생들이 몇 명 내렸다. 그들을 살피다가 드디어 성원을 발견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그냥, 학교 가는 중인데요.”

“몇 번 타고 온 거야, 우리 같은 버스 타지 않나요. 차 안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어젯밤 대화 중에 버스 이야기한 것을 기억했다. 왠지 많이 친밀해진 느낌이었다. 오후에 덕수궁에 가자고 꼬셔보겠다는 의지를 다시 다졌다. 나란히 걸어가면서 그녀의 기분을 점검하고 틈새를 엿봤다.


“그럼 오늘 점심이나 같이 할래요. 난 오후에 스터디 모임이 있어서 1시쯤 점심 먹으려 하는데. 아니면 스터디 끝나고 같이 덕수궁 갈래요. 광화문에서 저녁 먹고”

스터디 모임은 2시부터 4시로 예정되어 있다. 그 앞뒤로 약속만 된다면 까짓 한번 제껴도 된다. 그놈들과 노느니 이아이와 함께 하는 게 훨씬 즐거울 일이다. 그녀와 점심이든 저녁이든 함께 밥을 먹는 게 중요하다. 모든 역사적 관계는 밥을 먹으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어제 술을 함께 먹었으니 밥 먹는 건 일도 아니다. 당연히 넘어오겠지. 일부러 두 가지 선택을 제안했다. 그녀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거절이라는 제3의 대안은 고려 않고.


“오늘 유난히 거리가 지저분하네요. 밤새 남긴 청춘의 흔적들이 요란하네요. 지성의 거리에”

우리가 걷는 길 주변으로 지난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쓰레기, 술병, 토사물 같은 것 들


“글쎄, 약한 위장과 과도한 즐거움의 산물이라고나 할까요.”
“텅 빈 젊음과 이성의 부재일 뿐이죠. 저것들이 바로 자극과 흥분의 실체인 거야”

“하지만, 저 뒤에 치열한 대화와 고민이 숨었을 수도 있지요. 시행착오 끝에 인류가 발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어색한 문어체 쓸 거죠. 확실하게 편하게 말하던가. 정확하게 존댓말을 하던가 하나로 결정합시다. 말끝에 요자만 붙이지 마시고”

“모 자연스럽게... 되겠지.. 요”

그녀의 착한 제안에 애매하게 대답했다.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는 중인가. 아니면 어젯밤 대화로 이미 친구가 되었나. 함께 도서관으로 들어온 우리 모습을 영주를 비롯한 친구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바라보았다. 아직 점심인지 저녁인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마음은 급한데 일남이 다가왔다.


“어제 잘 들어갔냐. 꽤 마시는 같던데.”

“나보다 너희들은. 영주를 충분히 위로했나.”

“영주에게 좋은 소식이 올 거야. 우리 모두 기운을 느껴.”

내 어깨를 툭 치고 함께 일어나 흡연 공간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영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불을 붙이자 핑하고 지구가 도는 느낌이 왔다. 어제 너무 무리한 것인지 오늘 아침 성원과의 우연한 만남을 위해 너무 긴장한 것인지 담배 연기와 함께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영식이 가장 신났다. 어제 자신의 행동이 나와 민성원을 잇는 가교 역할이 되었다는 것. 한 학기 내내 풀지 못한 숙제를 풀게 했다는 것. 녀석의 자화자찬이 담배 두 개피로 끝나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 안 맞아서 점심은 어렵고, 일단 먹고 싶은 건 없지만 네시까지 올게요.”

성원이 흡연 구역 앞으로 지나가며 툭 던졌다. 나의 제안에 대한 답이었다. 그때부터 고민했다. 뭘 먹어야 하지. 내가 사야 하는데 돈이 있나. 학교 앞에서 먹나, 진짜 덕수궁 하고 광화문 가야 하나. 나의 고민과 달리 두 녀석은 신났다. 배는 고프지 않고 시간은 너무 천천히 흘렀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 걱정만 했다.


“우리가 이렇게 쉽게 친해지다니 대단해요. 어제 카페에 댁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배경이 멈춘 것 같았어요. 아이들이 말하는 것도 들리지 않고. 이렇게 쉽게 대화할 수 있었는데."


덕수궁으로 향하는 버스의 흔들림에 리듬을 맞추며 혼자 떠들었다. 그녀는 창밖만 내다봤다.


"첨에 밤에 도서관에 너희들 나타났을 때 나 무서웠거든. 근데 자주 보니까 귀엽더라. 패거리 친구들 대부분 웃기더라. 마주 보고 앉아 공부하면서 한마디도 못하고 신경전만 하는 것도 웃기고. 내 노트에 아직도 댁의 침자국 있어. 계속 보면서 댁의 친구, 말투, 습관을 자연스럽게 알게 돼서, 더 금방 익숙해진 듯해”


이젠 확실히 '요'를 빼고 말하는 성원을 바라보며 이렇게 길게도 말할 수 있는 성격이었음을 다시 알았다.


“그래도 조심해야지요. 아직 본격적인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내가 약간 삐끗하기만 하면 화를 내고 가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항상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장악되곤 한다. 내가 노트에 침 흘린 날도,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날도, 영식의 음료수를 가져다 놓을 때에도 그녀의 눈빛에 졌었다.


“네가 말하는 본격적인 단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친구가 된 것은 확실해. 관계를 어떻게든 발전시키려 노력하지 마. 자연스럽게 해 보자고”

그녀의 말에 대해 한참 생각했다. 분명 내가 대답해야 하는데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정말 이런 여자들만 만나는 것이 내 운명인가. 아니면 요즘 여학생들의 사고방식인가.


“관계를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잖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할 얘기도 아니고, 하여간 우리의 관계는 얼마든지 어떤 방향이든 굉장히 오래 지속되길 바래. 그것에 미리 어떤 틀을 만들어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속이려 히지 마. 이제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서로 지켜본 시간만큼 친밀감을 가지고 있어! 그럼 된거지.”


그녀의 미소가 밝았다. 참으로 다양한 웃음을 가졌다.볼 때마다 다른 더 밝은 민성원을 보았다. 9월의 덕수궁은 푸르렀다. 아직도 반팔차림의 관람객이 많았다. 곱게 칠한 단청이 유난히 또렸했다. 처음 오는데 굉장히 익숙하다고 전생에 여기 살았던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 그녀가 또 웃었다. 석조전을 지나 후원에 다다르니 한적했다. 햇살이 좋았다. 벤치에 잠깐 앉았는데 비둘기들이 다가왔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비둘기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하나의 그림이었다. 거기에 그 음악이 들려왔다.

https://youtu.be/nc_5XL6ae4I?si=kzULmk4asrhcqsuC


가을의 덕수궁을 둘러보고 카페에 들러 음료수를 한잔 더 마시고 시간이 갈수록 할 말은 더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