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생각 - 가을엔 추석이 있지
가을이 산뜻하게 다가왔다. 긴팔 셔츠로 갈아입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학업에 정진하리라 마음먹지만 내 앞에 앉아 공부하는 민성원을 보는 것이 예전보다 힘들었다. 자꾸 말하고 싶었다. 바라만 보던 정물이 어느새 반응하는 생물이 되어있으니 나의 호기심이 가만있지 못했다.
덕수궁 데이트 이후 대화가 많아졌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겉모습도 그렇고 공부하는 자세, 행동 하나하나가 아무리 뜯어보아도 달라진 건 없었다. 나를 보아도 데먼데먼, 가끔 무심하게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잠시 눈이 마주쳐 윙크를 하면 피식 웃었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도 별다른 말없이 내릴 때 잘 가라는 인사만 했다. 그럼에도 꼭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그녀의 뜻이 아니고 나의 의지였다.
성원의 큰 눈에 잠길 때마다 가라앉은 나 자신을 느끼곤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그녀의 존재는 어느새 나를 둘러싼 변하지 않는 풍경이 되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자리에 없음을 깨닫게 되면 나는 혼란을 일으키곤 했다. 분리불안증 같은 것일까.
하루는 일남이 진지하게 물어왔다.
“너!, 언제까지 바라만 보고 있을 거니?. 진도는 나가고 있는 거냐? 어디까지 했냐?”
“뭘. 그런 속된 표현을.”
“인마, 용기를 내서 돌진해야지. 다른 핑계 대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 너도 저 애가 좋으니까 거기 머무는 것이고 저 애도 네가 좋으니까 함께 다는 거 아니냐!”
“그런가, 요즘은 그냥 풍경 같아, 내 근처에 없으면 허전한. 모 그런 거 있잖아.”
“아주 소중하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는 거, 없어진 다음에 그게 소중했음을 아는 거. 그런데 또 없어도 그냥 살아질 거라는 거”
어느새 영주가 다가오며 자기 얘기하듯 말했다.
“딱 맞는 말인 거 같은데. 어딘지 모 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이 세상에 젤 나쁜 놈이 말없이 사라지는 놈이다. 좋으면 좋다고, 헤어질 땐 헤어지자고 말하고 가는 놈이 더 나은 놈이야. 내가 말 안 해도 내 마음 알겠지 하는 놈은 천하의 바보이고, 비겁한 놈이야, 자. 그러니까 확인 들어가자고. 네가 민성원을 향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영주가 덧 붙이는 말은 떠나버린 녀석에 대한 원망이기도 했다. 덕분에 신난 것은 일남이었다.
“좋아, 네가 못하면 우리가 도와주지. 관계를 확인할 사건을 만들지.”
성원이 멀리 모습을 보이자 녀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주변을 맴돌며 틈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어딘가로 가야겠다 생각했다. 물론 그녀에게 무엇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짧은 시간의 만남에서 그녀를 더 신뢰하게 됐다. 끝까지 남아 있어 줄 것 같은 느낌으로.
“이번 연휴에 모해?”
다음 주는 추석이다. 연휴가 지나면 중간시험 기간이니 특별한 계획은 없겠지.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제안해 볼까. 아니면 뮤지컬이나 공연. 짧은 여행은 어떨까. 혼자 상상하는데 그녀의 대답은 너무 단순했다.
"집에 갈 거야. 한 일주일 동안 송안에 있으려고."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오래 있는 것이지. 송안이 시골이라는 생각은 안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서울에 약속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기도 하고. 부모님과 쉬면서 시험공부도 하고”
이건 무슨 말인지. 기습 공격에 당황하며 약속을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추가 일격이 가해졌다.
“그래서 낼모레 토요일에 바로 내려가려고. 차 막히기 전에 일찌감치."
"그럼 언제 오는데."
그녀의 페이스에 넘어갔다. 가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언제 돌아오냐 물어보다니. 한심한...
이번에는 앙다문 미소를 흘리며 나를 본다. 이럴 때 같이 가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멀리 가는 건가.
일남이나 영주가 옆에 있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거냐고. 나는 같이 있고 싶은데 저 아이는 떠나야 한다는데. 물론 감정적인 것은 아니고 미풍양속이니까.
"나는 서울 사람이라 추석이 되어도 갈 곳도 없고. 친구들은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서울 사람이래도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만나야지. 친척들 인사드리고 성묘도 하고. 바쁘게 지내도록 해봐. 혹시 어릴 때부터 모난 성격에 외톨이거나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직은 서로 모르는 게 많다. 송안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 부모님 외에 형제 자매가 있는지 가까운 친척들이 사는지.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명절에 성묘는 가는지. 얼마나 멀리 가는지. 외가는 어디인지. 가까운 친구들은 아직도 송안에 사는지. 혹시 서울에서 함께 내려가는 친구가 있는지. 질문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동반자에서 멈췄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옛날 남자 친구 같은 거. 입장 바꿔 문득 해수가 생각났다. 별일 없다면 이번 명절에도 해수를 만날 텐데. 입장 바꿔 생각하면 민성원도 고향에 간다는 핑계로 그런 친구를 만날 텐데. 뭐냐 이 기분은. 내가 해수를 만나는 것은 일상인데 성원이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신경 쓰인다.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대화가 끊겼다. 생각만 이어졌다. 진짜 못난 생각. 고향에 누군가 그녀를 즐겁게 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그러니까 일주일 이상 간다는 것이겠지. 일남이만 해도 시험 핑계 대고 제주도에 안 가는데. 생각이 상상이 되고 그것이 그림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나의 상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내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상상의 끝은 어디인가. 그냥 호기심인가 질투인가. 근데 질투의 대상은 없다. 그냥 그녀에 대해 무지한 내가 답답했다. 떠나기 전에 알아낼 것이 많았다.
한 해 두 해가 지난 뒤 어린 왕자 돌아왔다네
하지만 그 꽃은 이미 늙어버렸다네
왕자여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꽃은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만 시들어 버렸다네
- 꽃과 어린 왕자. 자전거 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