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 대하여

by NIL

기다림에 대하여 - 일주일이 짧은 것은 아니다.


아침 8시 30분. 한 손에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들고 그녀의 아파트 입구에 서 있었다. 꽃집을 아침 일찍부터 두들겨 간신히 준비했다. 떠나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밤새 고민한 결과였다. 성원이 나오길 기다리며 나무 그늘 아래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무는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가방을 둘러메고 나왔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그녀의 얼굴 앞으로 꽃다발을 내밀자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약간 피곤해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웬일이야. 설마 나를 잡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 웬만하면 같이 가려 그러나”

“물론이야. 처음에는 같이 놀자고 잡으려 했는데 그게 안되면 같이 가려고 했지. 근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

명절에 집에 가는 것인데. 네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면 날 부르겠지.

이 꽃이나 받아, 너무 무겁다. 어머님께 갖다 드려. 다음엔 직접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네가 우리 엄마를 챙겨. 우리 엄마가 꽃 좋아하는 것은 어찌 알아가지고"


성원은 꽃을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한송이만 뽑았다.

“엄마에게 다 줄 수는 없고 이거 한송이는 내 거야. 나한테 한번도 꽃을 준 적은 없는 녀석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어요. 한송이는 기념으로 내가 간직할게. 나머지는 엄마에게 전하고”

“그래. 그럼 이 한송이가 시들기 전에 돌아오면 내가 큰 다발로 만들어 줄게. 근데 다른 짐은 없어?. 터미널까지 내가 들어줄게.”

“여기 메고 있는 게 다야. 그리고 터미널 안가. 저거 타고 갈 거야”

“어디로 갈 거야. 터미널로 가는 거라면 거기 까진 같이 가도 되지”

성원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작은 자동차 한 대가 있었다. 다시 불안했다. 그럼 역시 동행이 있는 건가. 어떤 녀석이 성원을 태우고 고향으로 향하는 건가. 그런데 자세히 살펴도 운전석에 아무도 없었다. 일단 안심은 했지만 다른 상상이 꼬리를 이었다. 운전할 녀석이 잠시 편의점에 갔다든가 아니면 뒤에 숨어서 담배피며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 가방도 작았고 꽃까지 들고 성원이 앞서 걸어 차 앞으로 향했다. 뒤 따라 걸으면서도 누구 차인지 묻지 못했다. 가방을 조수석에 던지고 운전석에 앉은 그녀가 차창을 내렸다.


“나 없는 동안 서울을 잘 지키고 있어"

"아 차는 어디서 난 거야?"

그녀의 말에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이 차는 내 차야. 학교 갈 땐 안 타고 집에 갈 때만 타고 다녀. 아빠가 주신 거라 잘 타고 있다고 증명해야 해.

나중에 너도 태워줄게. 하여간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차는 떠났다. 우측 깜빡이를 켜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다시 생각의 시간이 왔다. 일단 그녀가 사는 이 아파트는 누구 집일까. 그리고 저 차는...... 서울로 대학 간 딸을 위해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는 그 아버지는 지역 유지?. 어머어마한 집안의 딸. 명절이면 전국에서 수백 명의 친척들이 모여들어 가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를 벌이는 집안. 상상이 과했다. 그냥 평범한 국민주택형 아파트에 국산 소형자 하나 가지고 과장이 심했다. 특이한 점은 그 국산 소형차가 일반적인 흰색이 아니고 주홍색이라는 것 하나.


그렇게 성원을 보낸 다음 날, 집에서 뒹굴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학교에 갔다. 풍경은 변함없었지만 그녀가 없는 도서관은 너무 썰렁했다. 열람실에 앉아서도 긴 머리의 여학생을 보기만 하면 성원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패거리들을 찾아도 자기 생활 속으로 들어가 버린 아이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멀뚱멀뚱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오길 사흘을 반복했다.


혼자인 시간이 서러워 한잔 하려고 카페에 갔다. 언제나처럼 바에 웅크리고 앉아 맥주를 마셨다.

“무슨 일이 있냐. 낯빛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프냐”

“아니어요. 그냥 한잔 하려고요.”

“근데 왜 혼자냐. 너희 패거리들 다 어디 갔냐. 그 여학생들도 안 보이고”

“몰라요. 다 어디 갔는지. 다른 술집 갔나. 사장님 장사 안돼서 어째요!”

대화가 끊어지고 술을 마셨다. 등산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온 이후 무턱대고 와서 마셔대고 외상을 했었다. 지독한 여름과 추운 겨울에도 화창한 봄에도 사장 형은 묵묵히 거기 서서 술을 따라주곤 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이었다. 청춘의 특권과 지식인의 운명 같은 감성적인 이야기를 해 줄 때도 있었다. 앞으로 살아야 할 오늘들의 삶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런데 따져보면 선배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냥 동아리 선후배들이 서로의 소식을 듣는 묻는 과정에서 사장 형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만 쌓였다. 고교생 퀴즈 왕중왕 출신이라거나 과수석을 놓친 적 없는 천재라거나 그런 이야기는 모두 들은 이야기였다. 히말라야도 다녀오고 남극도 갔었던 탐험왕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전설이었다. 지금은 그냥 부담 없이 들러서 마셔대고, 때론 우겨대며 논쟁하고 화해하고, 같이 슬퍼하는 공간, 그런 카페의 사장이었다.


"좀 불안해요. 아직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 아이가 안 보이면 불안해요!"

사장형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동아리 친구 중에 젊을 때 죽은 아이가 하나 있어. 그 녀석 때문에 여기서 카페를 차리게 되었지.

저기 칠판에 흔적으로 남기며 자신이 살 있음을 증명하라고."

“산신령 선배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은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굉장히 훌륭한 클라이머였나요. 흔히 말하는 날다람 쥐였다고들 하던데."

"그럼 모해. 술 먹은 차를 피하지 못할 만큼 둔한 녀석이었는데."


사장형의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힌 것처럼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머리를 치렁거리며 다녀서 산신령이기도 했지만, 어느 산에 가도 출몰해서 산신령이라 부르기도 했지. 산에 돌아다니느라 대학을 오래 다녔고, 술도 잘 먹었고, 그래서 여기다 술집을 차리기로 했지”

한 사람의 서사가 하나의 동아리의 서사가 되는 마법. 산이 좋아서 등산을 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지키려고 동아리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친구들을 위한 공간으로 이 카페를 준비하다가 교통사고라니. 운명은 그렇게 오는 것일까. 사장형은 대충 말하지만 산신령의 서사는 계속 이어졌다.

“그 겨울에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던 우리에게 시간은 멈춰버렸지. 겨울이 오는 것이 지긋지긋해."


그는 더 이상 산에 가지 않는다 했다. 동아리 친구들 중에는 혼자 몰래 가는 녀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동아리를 없애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누구는 그날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여기 머물고 누구는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려 산에 오른다.


“형도 이제 산에 가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살아있는 친구들을 위해.”

“나도 힘들어. 너희들 보기보단 내가 장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맨날 새벽까지 장사하고, 낮에는 장보고 장사 준비하고, 술 취한 놈들하고 싸우고. 산에 갈 틈이 없다.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사장형과 대화하면서도 출입하는 사람들을 계속 감시했다.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민성원이 들어올 것 같았다. 아무 때나 느닷없이 등장하는 것이 그녀의 주특기이자 매력 아닌가.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 사람을 간직한다는 것. 저는 벌써 두려운데요. 제 옆에 있는 사람이 단 사흘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이뻐서 더 그런가.”

“이쁘기는 누구 못지않았지. 그걸 숨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장형과 나는 마주 보고 앉아 서로 다른 여자 이야기를 했다. 나는 성원의 미소를 떠 올렸고, 그런 나를 보면서 사장형의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했다. 그녀는 오지 않았고 며칠을 더 저녁이면 그 카페에 가서 사장형과 와 대화하며 기다렸다. 명절에도 쉬지 않는 술집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