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시간 - 남들은 그렇게 말하곤 하지
“전화했었네?”
“그게 며칠 전인데 이제 전화하냐!”
“미안 내가 정말 바빴어”
“명절 연휴에 바쁘긴 뭘 바빠. 연휴 전에 전화했는데 이제 콜백 하냐. 연휴 다 지나고. 전화기 한번 못 들여다볼 정도로 바쁘면 뭐 애인이라도 생긴 거냐”
처음에 거칠게 혼내던 해수의 목소리가 통화시간이 길어지며 정상 톤으로 돌아왔다.
“애인, 흐흐 비슷한 거지.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신촌에나 한 번 나오지”
“신촌에는 왜?”
“나 만나러 오라고. 내가 오늘만 시간 있으니까 빨리 출발해. 거기 그 카페로 와"
“누구 맘대로, 나도 바쁠 수 있단 생각은 안 하냐.”
“그럼 할 수 없지. 널 못 만나면 나 혼자 노는 거지”
해수의 대답이 없다.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그래야 해수지. 기특한 녀석. 잊을만하면 와서 놀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해수를 다시 존경했다. 해수는 모든 추억 속에 같이 했다.
“바쁘다더니 미리 나와 기다리는 거야”
“그래도 네가 필요하다는데 안 나올 수 있냐”
“흐응”
약간의 견제를 하며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오늘도 손님이 없다. 출입구가 잘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해수. 항상 그랬다. 적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고. 사장형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는 눈짓 한 번 하고 갔다.
“이번 겨울에 내가 비행기 탈 것 같은데...” 해수가 느닷없이 던졌다.
“무슨 비행기?”
“나 유럽에 가려고, 겨울 방학에 배낭여행 같은 거 가능할 것 같아. 그리고 다음 학기 교환학생 신청해서 눌러앉을 거야."
“학교는 정했어?”
“일단 몇 군데 신청했는데 돌아다니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일단 배낭여행에 대해 작전 수립 중이야”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해외여행과 연수에 다하여 여학생들이 훨씬 용감하다고. 남학생들이 여러 이유를 만들며 망설이는 사이 여학생들은 과감하게 우리나라를 떠나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시간이 해수에게 왔으려나.
“언제부터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한 거야?”
“딱히 모르겠는데 내 인생을 조금 바꿔봐야겠다 생각했어. 아빠가 나온 학교를 나와 아빠처럼 직장인으로 평생 사는 것도 그렇게. 언니처럼 결혼하고 아이 낳는 생활에 안주하는 것도 그렇고. 어떤 기회를 만들어야 할지 생각도 하고, 준비해야 할 서류. 예약할 교통편. 그런 것도 알아보고”
“허 참...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내가 먼저 가서 자리 잡으면 연락할게, 어차피 너는 지금 비행기표 살 돈도 없잖아. 돈이나 많이 벌어 둬."
“마치 안 돌아올 것처럼 말한다.”
“일단 배낭여행 후에 학교 정해지면 바로 들어갈 거야. 굳이 돌아올 필요 없도록. 그 이상은 잘 모르겠어. 그쪽 사정도 모르고 내 맘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고.”
언제나 한 발 먼저 앞서는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항상 어딘지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항상 어깨동무였던 꼬마들이었던 우리가 이제 천천히 자기만의 길로 들어서야 할 시간이 왔다.
“같이 가지 못하면 우리 결혼하면 어떨까?”
느닷없는 내 질문에 해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유럽 바람 좀 쐬겠다는데, 그걸 결혼으로 붙잡아 놓겠다는 것은 무슨 심보냐. 진심으로 생각해 보고 말해. 아무리 내가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도 그런 식으로 주저앉히는 건 아니지. 더구나 애인도 생겼다며”
“아니, 그런 이유는 아니고, 그냥 너와 함께 하면 영혼의 안식이 있을 것 같다고나 할까. 내가 직장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네가 미소로 맞이한다면 피로가 싹 풀리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어서"
해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는 소리 마라. 지금은 부담 없는 친구니까 편안한 거지. 같이 산다면 반대로 생각해야지. 나의 스트레스와 사회적 성취를 위해 너는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 건가. 그리고 때론 우리의 공동의 적을 향해 함께 돌진할 수도 있어야 하고.”
“공동의 적?”
“그래, 너네 엄마, 술, 친구들. 그런 사람들.”
“그런가. 그들이 공동의 적이 되는 건가. 그건 안되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친구만 해야겠구나.”
“지금 네가 시작한 연애. 너의 애인이 된 그녀에게는 내가 공동의 적 중 한 명이야. 우린 친구도 될 수 없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언젠가도 해수는 이런 미래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은 함께 걷고 있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함께 걸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겠지. 꼭 결혼을 안 하더라도.”
해수에게 무엇이든 확인받고 싶었다. 어쩌면 만남 이후로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직까지 우린 아이이고, 계속 어른이 되어 갈 거야. 어른이 되면 어른스러운 만남을 하겠지. 어른스럽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만남의 목적이 좀 더 명확해지겠지. 우리 엄마 말에 따르면 그렇게 30년쯤 지나면 다시 아이가 된다고 해. 이번에 언니 결혼시키느라 엄마, 아빠 옛 친구들 다시 만나니 이젠 사회적 지위, 이해관계 그런 것 다 내려놓고 개구쟁이 소년 소녀로 돌아가 있더래."
“너무 많이 갔다. 일단 6개월 있으면 돌아온 다는 거잖아. 군대 3년 가는 것보다 훨씬 짧은데, 우리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올 때 신기한 물건이나 많이 사와라. 내가 좋아하는 망원경, 그런 것”
“떠나기 전에 다시 말할게. 오늘은 네 친구들도 모처럼 만났으니 명절 파티를 하자.”
일남과 영주가 카페에 들어섰다. 마치 약속을 했던 것처럼 즐겁게 지난 며칠의 이야기를 했다.
“볼 때마다 미모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 같네요.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나가고 있으니. ”
영주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웬일인지 일남은 잠자코 있었다.
“좀 아깝긴 하지. 그냥 어린 시절부터 너무 친해서 단 생각이 들지 않으니”
그렇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이유를 술을 마신다. 누구를 만나서 마시고, 누구는 그리워서 마시고, 누구는 그냥 외로워서 마시고,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다가 술을 먹는다는 것이 별로 의미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괜히 취하기만 하지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러고 그것이 항상 해수가 나에게 알려주던 진실이다. 이번에는 해수가 이번 겨울에 떠나겠다고 말했다.
“술을 먹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어. 취해서 세상을 본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야. 우리 시각이 굴절될 뿐이야. 우리 술은 그만 먹자. 우리는 결코 외롭지도 않고, 절망한 것도 아니여.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 우리가 술을 먹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어둠을 뚫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지”
일남의 횡설수설 때문에 술자리는 일찌감치 파장 분위기였다. 새삼스럽게 지나간 시간들을 회고했다.
예를 들면 일남이 민성원 앞에서 헛소리할 때 김소현이 도서관에 있었다는 것. 봄날 루스 채플 앞에서 영주를 보았다는 것. 창백한 소년이 다음 학기에 돌아온다는 것. 현준과 영식이 고시반에 입실하기로 했다는 것. 우리는 서로가 모르게 다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다음 학기 휴학하고 군대에 가겠다고 했다. 누나만 많은 3대 독자라서 단기 사병으로 가게 될 것이므로 일찌감치 다녀오겠다는 녀석의 결심에 약간 섭섭했다.
“군대 가면 어디서 근무하냐?”
“제주에서 하게 될 거야. 내년 여름에 놀러 와라. 김소현도 민성원도 모두 데리고 와라. 성실히 군 복무하며 너희들 올 날을 기다릴게.”
“김소현은 그렇다 치고, 민성원은 누구?”
대화의 맥락을 추적하던 해수가 질문했다.
“내 맘에 맺힌 한이 있었지. 그렇지만 포기했다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잘해봐라”
해수의 질문을 듣지 못한 일남이 말했다. 영주도 나를 바라봤다. 일남이 덕수궁이 좋았냐는 말을 하는 순간,
해수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좋은 화제가 아니란 생각에 내가 말을 삼켰다. 눈치 빠른 영주가 화제를 전환했다. 이번 겨울에 창백한 소년이 돌아오면 술은 그만 마시겠다고.
일남은 군대에 가고, 해수는 유럽으로 방랑의 길을 떠나고, 영주의 그 녀석은 다시 돌아오고 그럼 나는 이 겨울부터는 누구와 술을 마셔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