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탈피하고파
자기가 왜 혐오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알게되면 스스로의 행동을 바꾸거나 노력을 해야 되니까, 혹은 자신의 혐오스러운 부분을 인정해야되니까 그건 너무 힘드니 피하고 싶어 끝내 성장하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상태 자체로 머물며 ‘혐오 하지 마세요’ ‘존중해주세요’ 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더 나아가고 싶지도 않고 지금 잘못하는 상태를 ‘부족해도 괜찮아 나 자체로 괜찮아’, 같은 따위의 자위로 채우며 멈춰있고 싶은. 자신을 꽁꽁 감추고 지키기 위해 차라리 타인에게 알게모르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 그래서 더 잘못을 저지르고 그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다, 대놓고 나쁜 사람보단 낫지 않느냐 식으로 땜빵치고 싶어하는 수순.
자기를 제외한, 자신이 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노력도, 배려도 하지 않고 살아가거나 상처도 잘 입지 않고 살아갈 거라고 착각하고 싶은 욕망. 나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조금 더 어리석고 이기적일 거라고 생각하며 살고 싶은 바람. 그냥 여러 불특정 자극에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타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아 지킴이’ 정도밖엔 안 되는 생각같다.
혐오는 대부분 타인에 의해서 내려지는 판단이다. 애석하게도 자기가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 말고는 전부 타인에게서 오는 혐오뿐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자신을 혐오하는 것보다 이상하게 인간은 타인에게 혐오 받았을 때 더 고통스럽다. 수치와 모멸까지 느낀다. ‘그래서 어쩌라고?’ 로 나가는 건 수치와 모멸을 다 느낀 뒤 뻔뻔함을 하나의 방패쯤으로 찾은 ‘자기 위로’에 불과 할테다.
타고난 ‘정체성’이나 ‘외모나 피부색’ 또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부족함이나 가난’ 또는 ‘몸이나 마음의 상처’같은 걸 두고 받는 혐오라면 그건 혐오하는 자들의 오만한 가해가 맞다. 혐오받을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두고 혐오를 한다면 그때 그 가해자들은 ‘무식한 혐오자’가 될 거다.
하지만 자기가 벌이는 어떤 ‘행위’ 또는 누군가에게 주는 ‘상처’ 의 영역에서는 혐오받을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나 싶다. 어떤 가해를 저지른 사람이 혐오를 받았을 때 응당 자기의 행동과 처신, 선택에 대한 혐오를 받는 건데도 혐오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만큼 위선적인 게 있나?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자긴 잘 모르고 한 일이니, 그게 그정도로 무례할 거라고 생각 못하고 한 일이니 (즉,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혐오받지 않길 바라는 만용 같은 거랄까.
다른 곳에선 철저히 혐오받을 짓을 해놓고, 그게 혐오 받을 짓이란 것조차 인지도 안 하고, 또 다른 곳에선 봉사를 하고 약자를 위한 공부를 하는 우스운 꼴이라니. 사람 다면적이라지만 이정도는 다면적인 게 아니라 그냥 양면적인 거 아닌가 싶다.
그냥 난 어려운 위치에 처했으나, 이런 상황에서도 약자를 위한 공부를 하고 메이저 바닥에 있는 그 누구보다 더 똑똑하고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나 알게끔 세상에 ‘강조’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네들이 날 무시했지만 난 이런 것도 있어! 너넨 봉사나 운동에도 관심도 없고 책도 읽지 않는 돈밖에 모르는 무식이들이지?” 같은 느낌. ㅋㅋ(심지어 아무도 무시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에게 관심이 딱히 없었던 것임에도; 관심 받지 못해서 열받은 걸 혐오받아서 피해입었다고 수그러들며…;;) 또는 “사람들은 내가 약자임에도 자기들보다 똑똑한 것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걸 배아파 하며 짓누르고 싶어서 안달이라 날 혐오하지. 무지한 사람들 ㅉㅉ.” 같은 레파토리. 어떤 인생의 훈장처럼 가져가고 싶은 게 아닐까. 또 누군가는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겉으론 선망하는 것처럼 칭찬하고 부러워해도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선 그들과 다른 자신만의 유별난 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를 쓰고, 찾아낸 후엔 그 점을 올려치기 하려는 욕망도 품고 있을지 모른다.(그게 상대적으로 상대방을 내려치기 하고 있다는 건지도 모른 채…) 욕망 자체는 막을 수 없을 테지만 가면으로 그걸 잘 가리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아닌 척, 고상한 척, 배려하는 척, 많이 배운 척, 다른 곳에선 피해를 주고 또 다른 곳에선 열심히 선행을 하는 척. 척은 문제되지 않겠지만 이곳에서 다르고 저곳에서 다른 행동이 혐오받는 거겠지.
‘사교적인 영역에 끼지 못한 게 아니라, 아니 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론 나 스스로 박차고 나와 끼지 않은 것이며, 사교 행위에 남아있는 자들은 전부 우매하고 가해를 주고 받기 바쁜 사람들’ 이라고 매도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공고히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어딘가에서 혐오를 받으면 그게 자신의 행동때문이란 생각은 안 하려고 할 테다. 그저 자신이 타고 태어난 ‘외모’나 ‘성격’ ‘약함’때문에 피해와 상처를 받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겠지. 그 편이 멘탈엔 유리할 테니까.
더 나아가서 그 혐오스러운 ‘행위’마저, 가진게 몇 없이 태어난 약자한테는 생존 방식 중 하나로 어쩔 수 없이 무기처럼 쓰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주 부정할 순 없겠지만 타고 태어난 것에도 기준이랄 건 없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행위는 그 행위자가 어떤 걸 갖고 태어났든 그냥 상처를 준 가해가 맞다. 상처 입은 피해자가 이해해 줄 영역이냐 아니냐인 것이지. 용서 받는다면 다행인 것이고. “난 갖고 태어난 것도 없고 사회에서 말하는 그런 규율에서도 벗어난 사람이니 이런 정도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어.” 라고 스스로를 두둔하지 말기를. 그 생각은 오히려 본인이 성숙해지는 길을 더 방해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런 자신의 행동때문에 상처입고 피해입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다시 약자가 되는 것일 테니까.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네 가족이 가정부 부부를 결국 해하게 된 것 처럼 말이다. 기우네는 자신들이 살기위해 가해자가 됐을 뿐, 이해받을 수 있는 부분은 없을 거다.
어쩔 수 없는 약자란 없이 어쩔 수 없는 가해만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