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모든 것들의 집약본

‘장손’

by 곰자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모든 것들의 집약본, 장손.

그가 탄 택시 창문으로 비추는 햇살은 따스하다 못해 따갑다.


영화 장손은 말한다. 장손에게 덕지덕지 붙은 건 과연 한국사회의 욕망뿐일까.

잃은 것이 많았던 한국 사회에, 한 명의 존재에게 모든 것을 걸고 그에게 많은 염원들을 주렁주렁 달았다. 그가 이 세상에서 마침내 '생존'해 나가는 것을 보고야 마는, 기어코 그래야만 우리의 삶이 그다지 몹쓸 것들은 아니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장손에게는 많은 것들이 지저분하게 남았다.



영화 장손은 가족들이 시골집을 찾는 것이 배경이다. 제사를 위해서다. 죽어버린,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제사를 위해 삼대가 모였다. 그곳의 주인공은 죽어버린 조상도 아니고 그 집의 가장 큰 어른도 아니고 바로 '장손'이다. 나이가 가장 어리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빼어나지 못한 장손.

사내이며 '손'이라 그런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들'의 막내 '아들.'


며느리와 딸과 손녀는 제사를 지내기 한참 전에 와서 전을 부친다. 할머니는 그들이 만든 음식을 맛보고 아들은 가업으로 이어온 두부공장에서 노동을 한다. 장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내심 장손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시골집에 내려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지만 자신만을 기다리는 그곳으로 향한다.



할머니는 한여름에 전을 부치는 손녀를 향해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를 돌려준다. 툴툴대는 손녀를 뒤로하고 장손이 언제나 올지 기다린다. 기다리던 장손이 오니 부리나케 달려가 에어컨을 풀가동한다.

할아버지는 장손만 대동해 근처 묘지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그에게만 몰래 챙겨 온 간식을 준다.

이미 성인이 돼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그들에게 장손은 여전히 귀한 아기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삼대의 싸움이 시작된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두부공장을 이끄는 방식에 대해 꾸짖는다. 전통방식을 그대로 이어 공장을 운영하길 바라지만 아들은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으니 자신만의 방식대로 운영을 하겠다고 선포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이 집의 '장손'도 두부공장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끌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손은 두부공장을 이끌고 싶지 않다. 자신에겐 배우라는 꿈이 있으니 두부공장을 이어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공장을 운영하길 피력했던 아버지는 장손이 공장을 이어받지 않겠다는 말에 발끈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운영을 하는 것까지만 허용이 되는 것뿐, 여전히 두부공장을 이어받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 겨울, 할머니가 죽는다.

장례식을 치르는데 그곳에서 나는 곡소리마저 전형적인 규칙이 있다. 곡소리를 내야 할 땐 이렇게 내야 하는 거라고, 알려주는 어른이 있고 그 어른을 따라 똑같이 곡소리를 낸다. 우는 것조차 자유롭게 울 수 없다.

식사를 하는 공간에선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끼리 술을 마시고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한다. 더러 흉을 보거나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난 이 장례식 장면이 너무나 한국스러워서 내내 보기가 힘들었다. 우리 모두 한국의 불편한 전통과 문화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그 선을 바꿔보려 하거나 넘어보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한평생을 살아온 누군가가 우리 곁을 떠나 죽었어도, 그를 위로하는 방법도 그를 위해 우는 방법도 절차가 있고 체계가 있다.

죽은 사람 앞에서도 절은 두 번 해야 하는 것이며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때에 맞춰 들어와서 고인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며 너무 대중없이 울어서도 안 된다.


장례를 마칠 즈음엔 뒷방에 모여 가족들끼리 얼마큼의 조의금이 들어왔는지 계산한다. 누구의 앞으로 얼마 큼의 화폐가 전달됐는지 서로 가늠하며 자신의 인간관계를 되짚는다. 10만 원을 냈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 나는 괜찮은 친구인 것으로 등급을 매기며 5만 원을 낸 사람에겐 내가 아닌 그 사람의 값어치를 형편없는 것으로 저장한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액수를 두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못하는지를 통해 나와 타인의 인간성을 겨루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며 그 안에서 진짜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은 찰나다.

장례를 다 치르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조차 아직은 고인을 마주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고인의 짐을 정리해야 하고 집안을 구석구석 뒤져 고인이 남긴 재산, '화폐'를 찾아야 한다.

살아생전 고인에게 종교가 있었다면 종교적 의식까지 치러야 한다.

우리를 떠난 사람의 지난 인생을 제대로 마주 할 시간은 우리가 부러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국은 그렇게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늘 헤매는 위치에 있다. 진짜 감정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관습이 귀신같이 다가와 가로막는다. 고인과 나눴던 담소를 회상하려는 순간을, 눈치가 쏜살같이 다가와 가로막는다.

이 모든 건 문화와 전통, 그리고 '사회성'이라는 틀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다.

할머니가 죽고 그녀가 남긴 재산과 몰래 숨겨두었던 돈이 누구의 것으로 돌아갈 것이냐가 진짜 문제였다.

사고로 남편이 불구가 된 고모는 자식이 없다. 남편의 병간호를 맡으며 평생 두부공장에서 일을 도왔다.

공장에서 일했던 돈의 매달 일정액을 할머니에게 맡겼었다. 고모의 말대로라면 할머니가 죽고 일정 액수의 돈은 다시 그녀에게로 전달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장손의 부모 즉, 고모의 오빠 부부는 그녀가 맡긴 돈 따윈 없으며 은행에 가서 아무리 조회를 해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고모는 오빠부부가 자신에게 돈을 주기 싫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형제간의 싸움이 크게 번지며 설상가상으로 고모 집에 불까지 난다. 고모 집은 할아버지집 바로 근처에 있는 곳으로 허름한 시골집이다.


누가 방화를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크게 불이 나 집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어차피 고모는 남편의 병간호를 하느라 병원에서 지내는 상태였고 그녀 집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장손'이 고모에게 전한다. 꽃이 심긴 화분 하나를 들고 고모부의 병문안을 가서 고모와 대화를 한다.

장손의 생각엔, 왠지 자신의 아버지가 고모 집에 불을 낸 것만 같았다. 그것이 미안해 아버지를 나름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고모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지만 고모집에 불을 지른 사람은 내심 고모 자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고모는 가족들 중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며 유일하게 '조상신'이 아닌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고 묘하게 가족들과는 다른 행보를 걸어가려는 사람이기도 했다. 두부공장에 묶여 일을 돕긴 했지만 자식 하나 낳지 못했고 남편 또한 사고로 병상에만 누워있는 처지다. 고모가 그간 일해서 모은 돈은 그녀에게 한 푼도 돌아가지 못했고 그녀는 이제 집마저 없다. 그녀가 자처해서 불을 지른 것인지 확신할 순 없으나 이제 할머니도 죽었으니, 고모가 그 집에 메여있을 이유는 한 가지도 없다.


장손은 할머니 죽음 이후 여러 일들을 처리한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 한다. 그리곤 할아버지에게 검은 봉지 하나를 받는다. 할아버지는 너희 고모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며,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장손이 탄 택시를 뒤로한다.


택시에 탄 장손은 봉지 속 물건을 꺼내본다. 장손의 이름이 박힌 통장이다. 통장 속 액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아마도 그 집에서 남은 돈의 전부가 들어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장손은 통장과 도장을 손에 쥔 채 묘한 표정을 짓는다. 기쁨도 해방감도 아닌 복합 미묘한 표정이다.

택시 창문을 통해 햇살이 비춘다.

한 겨울의 추위를 녹일 만큼 따뜻하다 못해 따가운 햇살이다.

맹렬히 타는 햇살에 눈이 부셔 장손은 한 손으로 본인의 눈을 가린다.



한 집안의 모든 것이 담긴 통장을 손에 쥔 채, 그는 서울로 상경한다.


이 영화 속에는 많은 이야기의 층위가 있다. 큰 줄기로 보면 한 가족이 장손 한 명을 잘 키워내기 위해 모두가 열을 올리는 서사이며,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남아선호사상의 폐해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여전히 존재하는 전통. 그 전통이라는 허울을 덮어쓴 채 차별을 묵인하고 부당함을 당연함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거북한 이야기. 세상이 많이 변했다 해도 사실 어느 집안의 '가장'을 향한 애정과 편애는 사라지기 힘들다. 이건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금 더 이야기를 파고들어 가면 그러한 '거북한'사회가 되는 것에 일조를 한 것들이 여러 갈래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부장사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가부장사회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다는 무력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장손에게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덕지덕지 붙여 애정과 편애라는 이름으로 둘러쌀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영화는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시절 빨갱이로 몰린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며 (보도연맹사건) 아버지는 젊었던 시절 시위를 하다가 다리 한쪽이 망가지기도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여전히 공산당, 빨갱이에 대해 두려움과 악의가 있고 그러한 나라에 대해 편견이 가득하다.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젊었을 시절 열정도 패기도 아닌, 할아버지가 강제한 두부공장뿐이다.


이들의 상흔과 욕망이 한국사회의 남아선호사상과 맞물렸다. 집안의 장손에게 모든 애정과 이득을 주고 모든 가족의 생명력마저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장손이 짊어진 것에는 본인에게 돌아온 이득도 있겠지만, 그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그림자마저 있다. 그는 분명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자라났으며 그 희생이 작지 않다. 작게는 그와 차별을 받고 자란 누나에서부터 그에게 모든 돈을 주기 위해 희생된 고모에 이르기까지. 남자와 여자를 대척점에 두는 것 같지만 사실 그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 중엔 그 자신이 있기도 하다.


이제 그에게는 집안의 모든 돈을 손에 쥐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숙제가 남았다.

모든 건 그의 마음에 달려있지만 그런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은 망가지기도 쉽다.



난 이 영화를 단지 남아선호 사상에 대해 꼬집고 있는 영화라고만 보진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장손 때문에 피해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난 여자로서 얼마나 많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살았는지에만 집중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체계와 전통과 분위기를 만든 사회적 관점에서 사람들을 조망해보고 싶다. 개인 한 명 한 명은 시대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인간은 제도를 만들 만큼 문명적이며 거대하지만 그 제도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릴 만큼 나약하고 처절한 존재이기도 하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제도인지 제대로 인식하며 살지 못하면 그냥 그대로 끌려다니게 된다. 늘 생각을 놓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든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받고 산다. 그러니 모두의 피해가 동등하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당한 피해와 저지른 가해를 무감하게 넘기고 또다시 반복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작게나마 있다. 그런 생각과 감정을 마주할 기회를 우리 사회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보내는 일에서 조차 체계와 관습이 진짜 감정을 방해한다면 우린 그 체계를 한 발자국 물러나 조명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난 너무 관성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내가 마주하기를 미루고 회피해 온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 회피가 누군가에게 상흔을 남기진 않았을까. 그 피해가 나에게도 온 적은 없던가.


모든 것을 시대 탓으로 돌리고 문화 탓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다. 결국 시대가 어땠든 그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건 우리들이며 한 명 한 명에게 남은 상흔은 명백하다.


내가 받은 상흔과 수혜, 내가 준 피해 내가 받은 가해를 대강 넘겨짚지 않고 명확히 마주했을 때, 두 번째 피해를 조금 더 막을 수 있는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감정과 인식도 연습의 영역에 있다고 본다. 우린 연습하지 않으면 무뎌진다.


우리의 욕망과 염원을 누구에게 매달 것인가.

잊고 있던 질문을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