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좋아."
"그게 무슨 뜻이야?"
"노는 시간에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거든.
그러다 태양이 보이면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같은 하늘 아래 아빠랑 내가 있는 거니까... 그럼 같이 있는 거지."
31살 소피. 그녀는 생일을 앞두고 20년 전 아빠와 함께 한 튀르키예여행을 담은 캠코더 영상을 본다. 아빠를 추억하기 위해서 캠코더를 켠 것이지만 아빠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일 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그때 여행을 되짚어보기도 한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은 파편화되어있고 흩어진 조각들을 제대로 이어 붙이는 건 쉽지 않다.
기억나는 거라곤 아빠가 형편없는 숙소를 잡고 그것에 미안해하던 모습과 풀장에 들어가기 전 아빠가 크림을 등에 정성스레 발라주던 모습정도다.
소피는 11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다. 수영장에서 노는 언니 오빠들의 모습을 보니 자신도 빨리 나이를 먹어 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어른이 되고 싶다. 쿨하고 멋지게 키스도 하고 술도 먹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소피가 누릴 수 있는 유희는 기껏해야 오락실에 비치된 오토바이를 타며 또래 남자아이와 대결을 하는 것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다. 시시하고 유치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시시해하고 성인의 모습 중 스킨십과 술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동경하는 것만으로도 소피는 딱 11살 소녀 나이답게 시시할 뿐이다.
소피 옆에는 엄마와 이혼한 아빠가 있다. 이혼해서 따로 사는 아빠와 오랜만에 둘만의 여행을 가려고 튀르키예에 온 것이다. 아빠와의 여행은 오락실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것만큼이나 안전하고 시시했다.
아빠보다는 자신의 나이에서 몇 살만 더 많은 오빠들이나 예쁜 언니들과 놀고 싶다.
수영은 자신 있었지만 막상 수영장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자신을 보며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아빠는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화장실에서 가위로 깁스를 풀다가 실수로 팔에 상처를 낸다. 아빠의 팔에 피가 살짝 흐르는 모습을 비춰주며 벽을 사이로 두고 방 안에 앉아있는 소피를 비춰준다. 벽으로 가로막힌 둘은 서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소피는 성인잡지를 몰래 읽으며 벽을 사이에 두고 아빠와 시시껄렁한 대화를 한다.
그리곤 묻는다.
"이혼했는데 왜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해?"
아빠는 소피 또한 할머니나 고모에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느냐 물었고, 엄마도 가족이기에 사랑하는 것이라 답한다.
소피는 아빠의 답변이 맘에 들지 않는다. 어른들의 관계란, 사랑이란, 다소 모호하고 어렵고 짜증 나는 부분이 있다. 명쾌하지 않아서, 논리적이지 않아서, 아직 소피는 그런 것을 이해하기엔 경험이 많지 않아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어느 날 저녁 아빠와 작은 무대가 있는 공연을 보는데 소피는 아빠와 무대 위에 서고 싶어 노래를 신청한다. 여행 와 들뜬 마음에,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소피와 달리 아빠는 그런 것을 부끄러워한다. 결국 소피 혼자 무대 위로 올라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가사의 노래를 음정도 맞지 않게 부른다. 아빠는 머쓱해만 할 뿐 끝까지 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머쓱해진 아빠는 아무 말이나 한다. "넌 노래학원이라도 다녀야겠다."라고.
마음이 상한 소피는 학원 보내줄 돈도 없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반문한다.
냉랭한 기운이 돌며 아빠 혼자 숙소로 돌아갔고 소피는 언니 오빠들이 있는 곳에 함께 머물며 시간을 보낸다. 밤늦은 시간,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소피에게 오락실에서 오토바이를 함께 탔던 소년이 다가오고, 둘은 얼떨결에 키스를 하게 된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아빠는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다. 소피는 아빠에게 대강 이불을 덮어주고 잠을 청한다.
이건 소피의 기억이다.
소피는 파편화된 기억의 고리를 만들려고 애쓴다. 아마도 아빠는 튀르키예 여행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건지도 모른다. 세상을 떠나기 전 아빠가 마지막으로 소피에게 남긴 엽서엔, "소피, 정말 사랑해. 그건 절대 잊지 마."라고 쓰여있었고, 해묵어 오래된 엽서가 누렇게 변해있다.
소피는 보지 못한 기억을 이어 붙인다. 아빠의 하루를, 아빠의 여행을, 아빠의 마음을.
아마도 아빠는 소피와 여행을 한 날, 죽음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삼켜버릴지도 모르는 검은 바닷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소피와의 마지막 여행을 잘 마무리 짓기 위해 실행에 옮기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곤 숙소로 돌아와 알몸으로 엉엉,
엉엉, 울었을 것이다.
이건 소피의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소피는 아빠와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소피를 마지막으로 배웅해 주며 아빠는 캠코더를 들었다. 아빠는 우스꽝스러운 장난과 표정을 지으며 떠나가는 소피를 즐겁게 배웅해 준다. 마지막으로 힘껏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소피를 영상에 담는다.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던 소피의 모습에서 영상은 멈추고, 카메라는 다시 아빠의 모습을 담는다. 소피가 떠나간 자리를 한참 지켜보던 아빠는, 뒤로 돌아 멀리 있는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간다.
아빠가 나간 뒤 흔들거리던 문은 다시 굳게 닫히고 답답하게 갇힌 네모난 화면 속, 관객의 시선은 멈춘다.
아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는 그를 집어삼킬듯한 바다에게 먹혀버렸을 지도,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 멀리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던 푸른 하늘 위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소피는 31살이 되었고, 그녀 옆에는 함께 사는 애인이 있다. 31살이었던 젊은 아빠는 캠코더 속 모습으로 남아있고, 소피는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됐다.
내가 한창 성장을 해 가던 20년 전 그날 여름, 아빠에겐 어떤 하루가 펼쳐졌던 걸까.
내가 성에 눈을 뜨고 청춘의 푸르름을 부러워하던 그날, 아빠의 마음은 어떤 상태였을까.
커서도 자신에겐 비밀로 하는 것 없이 무엇이든 다 말하라던 아빠는 왜 내 곁을 떠난 것일까.
이상하리만치 호신술을 가르쳐주고 어기면 안 되는 규율을 지나치게 언급하던 내 아빠는, 왜 내게 튀르키예 여행을 마지막으로 선물한 것일까.
돈이 부족해 어려웠겠지만 여행에서 봤던 비싼 카펫을 사서 왜 내게 남겨두고 떠난 것일까. 31살이 된 난 그 카펫 위에서 눈을 뜨고 그 카펫을 밟고 내 곁을 일찍이 떠난 아빠를 상상한다.
내가 어려서, 내가 보지 못했던 아빠의 슬픔을 이제는 제대로 알아봐 줄 수 있을까. 울지 않고도 그의 하루를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을까.
11살이었던 그때, 아빠에게 안겼던 건 나였고 아빠를 안아준 사람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그래도 내가 그를 진심으로 정말 많이 사랑했다는 건 알았을까. 사랑의 방식이 서툴렀던 것뿐, 아이도 부모 못지않게 그들을 사랑한다는 걸 그가 알았을까.
그걸 알고 나를 떠났을까.
그걸 알고도 나를 떠난 걸까.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제대로 소통할 수 없어도, 같은 하늘 아래에 있으면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태양을 보는 것일 테니 그것으로 아빠는 만족할 수 없던 걸까.
그에게 우울증이라는 명칭만 붙이고 끝내버린다면 난 다시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에 실패하겠지.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난 끝내 그를 이해하기보단 내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더 골몰하겠지.
그럼에도 난 사랑이 부족한 딸은 아니었는데, 그가 너무 자신의 슬픔에 몰두해 내 마음을 보지 못한 거라고 부러 생각하고 싶어진다.
아빠 미안해. 내가 어려서 아빠의 슬픔을 보지 못했어. 지금도 아빠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해. 아빠의 하루를 아무리 더듬어봐도 생각나지 않아. 그저 아빠의 뒷모습이 말도 안 되게 쓸쓸해 보였다는 것 정도만 떠올릴 수 있을 뿐이야. 기억이란 게 그래. 아빠를 제대로 기억하고 싶어도, 그때 난 내 마음에 너무 빠져있어서 아빠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워하는지 몰랐어. 그래서 내가 던진 말 하나에도 마음이 많이 흔들릴 만큼 괴로웠는지 그땐 정말 몰랐어.
그래도 난 아빠와 함께해서 좋았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같은 하늘 아래 있다 보면 이렇게 다시 만나서 여행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거든. 난 그 믿음으로 아빠를 사랑해 온 것이었는데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던 걸까.
아니, 미안해. 어쩌면 난 적당히 외면하고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아온 것일지도 몰라. 아이였을 땐 보이는 게 많지 않아서 외면도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그냥저냥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거겠지.
아빠의 뒷모습을 기억해. 푸르른 하늘을 담고 내게 보여주던 등은 언제나 따뜻했어.
크고 강하지 않아도 좋아. 슬프고 지쳐 보여도 이젠 상관없어.
아빠가 내게 보여줬던 사랑으로 난 또 앞으로를 살아갈 거야.
적당히 외면하면서, 소소한 것에 행복해하면서 말이야.
가끔 눈을 감고 아빠의 하루를 상상해. 내가 아빠를 잊지 않아.
그러니 아빠도 이건 절대 잊지 마. 나도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걸.
그때도, 지금도.
이건 아마도 소피의 마음 일지도 모른다.
"아빠, 그런 기분 있잖아...
아주 근사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지치고 멍한데
뼈들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
몸에 힘이 없고
가라앉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