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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헤 Apr 23. 2024

모태신앙인의 템플스테이

DAY 1

한동안 템플스테이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마음속에 가고 싶다고 생각만 한 게 벌써 몇 년째.      


템플스테이를 눈 쌓인 한겨울에 눈이 소복이 덮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 하다 보니 늘 시기를 놓쳤고 이번에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봄이 훌쩍 다가온 3월.

그렇다고 올겨울까지 또 기다릴 수는 없는 법.      


사실 정말로 봄이 되었을 때는 꽃 피고 날도 적당하고 그래서 더 예쁠 걸 알았지만 그런 날 있잖아요, 지금 당장 어디라도 훌쩍 떠나야 할 것 같은 그런 날.     

 

물론 현생은 당장 떠나는 건 무리라서 최대한 빠르게 날을 잡은 것이 2주 뒤의 어느 평일. 나의 인내심은 2주 이상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      


본 투 비 보부상 스타일인 나.

혼자 떠나니 짐도 가볍게 챙기면 좋을 텐데, 가져갈 준비물들을 하나씩 챙기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왜인지 내 방에는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어차피 차를 가져갈 거니까 뭐-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짐을 싸다 보니 이미 짐이 한가득.     


- 수면유도제 두 알 (절이라 무서워서 잠이 안들수도 있으니까)

- 프로틴 음료 두 개랑 훈제란 몇 개(사찰음식만 먹다가 근손실 나면 안 되니까)

- 핫팩 몇 개와 수면양말(3월 중순의 산은 추우니까_두 가지다 최고의 선택이었다)

- 아이패드와 에어팟 맥스(9시에 묵언 및 소등이라니 나는 절대 바로 못 잘 테니 영화라도 한 편 봐야 하니까)

- 태양광으로 충전되는 무드등(소등 후 잠들기 전까지 든든한 빛이 되어주었다)

- 1L 생수 3통, 500ml 생수 2통(원래 물을 많이 마시는 편)     


*     


템플스테이 예약하려고 찾아보다가 후기가 많은 남양주의 봉선사로 택했다. 어차피 절의 유래나 역사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고, 후기가 많은 곳은 그만큼 관리가 잘 되고 있고 편리하다는 뜻일 테니까.     

 

몇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것은 <산사를 거닐다>라는 주제를 달고 있는 휴식형이었다. 108배와 108 염주 만들기, 비밀의 숲 산책 같은 것이 포함된 체험형은 어느 절이나 거의 주말에만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딜 가나 가능하면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걸로 선택하는 편인데 그거 하자고 제가 교회를 빠지고 절에 갔다가는 아주 크게 혼이 날 것 같아서 얌전히 주중의 휴식형을 선택.    

  

그리고 나는 주변 소리에 예민하니 모르는 사람과의 2-3인실 보다는 1인실로.     


*     


한 시간 정도 되는 여행길에 신나는 라틴 팝을 듣다가 도착하기 5분 전쯤에는 절에 들어가는 경건한 마음으로 노래를 껐다.     


그 순간부터 들려오는 내 차의 심상치 않은 소리. 처음에는 주변에 공사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난리는 제 차에서 나는 소리였고요.     


도착해서 시동을 끄기 전에 차에서 내려 소리를 듣고 기절 직전이었지만 서울 가서 바로 고치면 되지라고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묵직한 캐리어를 끌고 봉선사로 들어갔다.      


*     


방을 안내받고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들어가자 방에서 은은하게 나는 향냄새가 참 좋았다.      


생수만 도합 4리터를 넣어 가지고 온 캐리어를 풀고 방에서 밖을 바라보니 방 앞은 온통 산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늘이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간만의 파란 하늘에 중간중간 하얀 구름까지 끼어있어 더더욱 보기 예쁜 날.      


공기는 차갑고 신선했고 눈에 걸리는 모든 것들이 조화로워 보였다.     


*     


짐을 풀고 템플에서 준 옷으로 갈아입고(승복 바지 진짜 편해요 사고 싶어요 진짜) 한 곳으로 모였다. 스님께서 템플스테이를 할 때 지켜야 하는 청규(예절과 규칙 등)를 알려주셨다.     

 

휴식형은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 프로그램 없이 자유로워서 저녁을 먹기 전에 봉선사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곧 부처님 오시는 날이라 그런지 알록달록 색색의 연등과(늘 있는 건가..?) 파란 하늘 시원하게 코끝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일정하게 목탁을 두들기며 나지막하게 힘 있게 불경을 외는 소리.      


왜 저는 불경 외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요? 저는 본 투 비 기독교인데 말이죠.  

    

*         

 

보통 나의 여행은 삶이 행복으로 가득한 순간에 계획하기보다는 부정적인 힘듦에서 계획되어진다.

  

도망가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어디든지 떠나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혼자이고 싶어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무엇을 느끼고 싶지 않아      


마음의 평안을 찾고 싶었고, 마음에 붙은 찌꺼기들을 비워내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다.      


혼자 가는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시나 편리함 때문. 일상 속에서 신경 써야 하는 무수히 많은 일들과 많은 관계들을 벗어나서 오롯이 내 생각만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을 더 격하게 갖기 위한 나 혼자만의 여행.      


*     


5시에 이른 저녁을 먹고는 절에서 계속 걸었다.      


여행을 떠나올 때는 생각거리들을 가득 안고 잔뜩 생각만 해야지라고 떠나왔는데 막상 그곳에 있으니 나는 점점 비워져 갔다.      


명상에서 좋은 상태는 그저 그 자리에서 온전히 그 시간을 느끼는 것. 걷기 명상도 그런 일환인데 의도치 않게 걷기 명상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해가 질수록 낮달이 더 선명해져 갔다.      


이렇게 하루의 시간을 시시각각 느껴본 게 얼마만이더라.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괴로웠다. 어딜 가나 있는 소음을 묻으려 음악을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아무 음악도 듣지 않고 그냥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연못의 분수 소리, 바람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새소리, 시냇물 소리.      


희미하게 보이는 달

절 끝에 달려 울리는 풍경

부처님 뒤통수

그리고 산

따뜻한 햇빛

자박자박한 나의 발소리

차가운 바람의 촉감     


연못에 단 두 마리뿐인 오리.

아까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더니 이번에는 같은 방향의 궤적을 그린다.     


*     


천천히, 소란거림 없이 걸었다.     


이동하기 위해

운동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 걸음은 또 얼마만이더라    

  

목적 없는 걸음     


걷는 동안 맑았던 하늘은 붉은색을 지나 짙은 보랏빛을 한 스푼 얹은 회색빛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 빛을 내는 달.     


해가 빛을 다하고 끝내 산을 넘어갈 때까지 걸었다.     


*     


또 내가 이렇게 언제 템플스테이를 올까 싶어 저녁예불을 참관하고 싶었는데 나의 신앙심과 이들의 신앙심이 상충되기에 앞에서 도무지 들어가지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일곱 시.

소등 전까지 두 시간.     


이곳은 시간과 정신의 방인가 아-무겠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씻고 나와 조금 끄적거리고 영화를 잠깐 보다가 수면유도제의 기운을 빌어 10시 30분쯤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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