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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명의 미키 'Human Being'을 묻다

'나'는 무엇으로 '내'가 되는가

by 사피엔스적

**** 주의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17명의 미키가 아니다. '1'명의 미키다.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으로서 존재(being)하게 되고, 인식되며,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는 순간 선생님으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특별’하고 소중한 ‘개별적’ 존재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입(?) 받는다.


18명의 미키의 존재는 그 주입된 사실에 대해 과감한 물음을 던진다. ‘완전하게’ 나와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면, 정말 머리끝부터 발 끝이 아닌, 머릿속마저도 같다면, 그 존재도 ‘나’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냐는 물음이다.


그동안 인간의 복제를 다룬 많은 콘텐츠가 넘지 않았던 불편한 골짜기를 미키 17은 넘어 버렸다. 그 불편한 골짜기는 ‘아무리 복제해도 그것은 복제물일 뿐, 내가 될 수 없다’라는 장벽이었다. 그리고 ‘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복제된 인간은 나의 기억도, 성격도 가지지 않은 채,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그저 주어진 형체만 있었을 뿐이다.


미키 17은 그렇기에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우면서도, 인류가 시도하는 노력에 대해 당연히 동반돼야 하며, 인간성의 상실이 불거지는 지금 던져야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인간은 특별하며 개별적인 존재라는 근거로 우린 흔히 쌍둥이를 든다. 같은 유전적 조건을 타고났음에도 능력과 성격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진다. 하지만 이 또한 미키 17과는 다르다. 쌍둥이는 다른 인간들과 비교해 더 닮았을 뿐, 절대 ‘내’가 될 수 없는 존재다.


18명의 미키는 모두 미키라 불릴 수 있는 존재다. 18번의 죽음에도 기억의 ‘영속성’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어떻게 태어났느냐와 함께 경험과 기억을 통해 나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핵심 개념은 복제가 아닌 멀티플.

기억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전제는, 멀티플이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존재에 대한 혼란을 부추긴다. 100% 나와 기억과 경험이 일치한다면 그 또한 내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여기서부터는 이제 과학의 영역이 될 수 없다. 어쩌면 신학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종교를 끌어들인다면 쉬운 문제가 될 수 있다. 몸이 두 개면 영혼도 두 개가 아니겠는가. 영혼이 다르다면 다른 존재이고, 인간 복제는 신에 대한 도전일 될지언정, 태초의 빛처럼 어디선가 영혼이 만들어지는 ‘공장’이 존재하고, 신과 같은 존재는 복제된 인간에도 영혼을 배당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나는(존재론적 의미가 아닌 필자는) 신을 끌어들이는 건 모든 가능성을 기적으로 치부하는 것과 같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혼의 존재보다는 삶과 죽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선택’를 끌어들여야 할 것 같다.


철학에 있어 선택은 무수한 갈림길이다. 슬라이딩 도어즈와 같은 평행세계적 의미보다 더 적극적이며 주관적이고, ‘주도적’이다. 미키는 자동차를 타다 호기심에 빨간 버튼을 눌러버리는 선택을 한다. 친구의 꾐에 마카롱 가게를 열기로 한 선택을 한다. 익스펜더블에 지원하는 선택을 한다. 그 과정에서 안내문은 읽지 않는 선택을 한다. 나샤에게 말을 걸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18번째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죽지 않고 살아 보기로 결정한다.


멀티플로 인해 생긴 불편한 골짜기는 선택의 개념이 주어지면서 옅어진다. 17번과 18번의 다른 성격은 다른 선택을 주장하고, 선택의 갈림길이 많아질수록 둘은 다른 존재가 된다.


칸트적 개념을 끌고 온다면, 선택은 내 ‘의지’와 연결되며, 내 의지에 따른 선택은 ‘자유’로움과 연결된다. 그 자유는 내가 세운 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며, 법칙은 ‘이성’을 따르고 이는 결국 인간이 왜 고귀한 존재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의지와 자유, 이성 모두 인간을 인간답게, 나를 나답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게 만드는 요소다.

미키 17의 인간 복제는 그동안 영화에서 다뤄왔던 복제와는 존재론적 의미가 다르다.

‘아일랜드’의 복제된 인간이 미키 17처럼 불편하지 않은 건, 그 복제된 인간은 나와 같은 갈림길을 걸어온 존재가 아니며, 지금껏 어떠한 선택도 해본 적이 없는 그저 ‘존재하고만 있는 존재’이며 나와 같은 기억과 경험이 없기에 나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귀함은 없다. 그렇다면 그 복제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는 건 왜 불편할까? 그 복제된 인간은 앞으로는 무수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고, 기억을 쌓고, 경험을 누적함으로써, 마치 아기와 같이 수많은 가능성을 타고난 존재이다. 아기로 태어나지 않았을 뿐, 태어난 인간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냐는 중요하지 않다. 시스템상 하나의 선택권밖에 주어지지 않았을 뿐. 멀티플에서는 같은 삶을 겪어온 존재임에도 적어도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고, 갈림길이 갈라지는 순간, 너와 나는 다른 존재가 된다.


버튼을 눌러버린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미키 17에서 “그런 거 아니라니까”라 말을 던지는 18의 말은 꽤나 무게감이 있다. 17번의 재탄생 속에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지만, 내 안에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존재가 있었고, 난 지금과 ‘다른’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갈림길 속에서 선택을 거듭하며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다.


무엇이 당신을 당신으로 존재하게 하는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와 자유와 이성 그리고 선택이다.


봉준호의 색깔을 지워버린 영화가 기대감을 채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봉준호이기에 누구보다 흥미를 느낄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나에겐 매트릭스 이후 인류에게 가장 큰 철학적 화두를 던져준 최고의 할리우드 오락 영화다.


평점 : ★★★★, 두 명의 미키가 존재하는 후속을 기대케 한다면 재밌었겠지만, 그건 지금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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