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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듯 익숙한, 사소하지 않은 일상

르완다이야기 5

by RUKUNDO

낯선 도시의 마트는, 나의 무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생필품을 사러 갔을 뿐인데, 생존법을 배우고 있었다. 익숙한 것들을 찾으며 낯선 세상과 친해지고 싶었다. 적응은 물건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사야 하는지조차 배워야 했다. 채울 것도 많고, 배울 것은 더 많아 슬픈 신입단원이었다.


선배단원에게 마트 세 군데를 소개받았다. 로컬 시장은 며칠 후에 가볼 예정이라고 했다. 지금은 엑스포 경험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일단은 한동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 집중하는 날이었다. 하루를 살아도 먹고 마시고 씻어야 하니까, 그런 기본적인 물품들을 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큰 마트 세 개를 소개받았다. 각각 분위기와 특징이 조금씩 달랐다.


T-2000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이었다. 한국 생필품과 비슷한 물건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인마트는 아니었다. ‘사나이’라고 한글이 적힌 조미료는 다시다를 연상시켰고, 가끔 소주가 한 병에 2만 원 정도에 팔린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다이소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있는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없는, 뭐든 조금씩 다 있는 가게였다.


사자마크가 인상 깊은 심바마트는 앞에 음식과 커피를 파는 식당이 있었다. 고기류를 팔진 않았다. 커피와 감자튀김이 맛있는 곳이라고 했다. 마트 중의 마트는 커다란 코끼리 상이 앞에 서있는 나쿠마트였다. 이곳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한국의 작은 이마트 같은 느낌이었다. 나쿠마트 옆에는 르완다 최고의 카페 버번커피도 있었다. 셋 중에서 나쿠마트만 같이 방문을 했다. 물과 우유, 주스, 빵, 그리고 쌀을 구매하는 법을 배웠다.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 재밌기도 막막하기도 했다.


심바마트는 사자 마크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심바’는 동아프리카어로 사자를 뜻한다고 한다. 마트 입구엔 식당이 함께 붙어 있었고, 이곳은 감자튀김 맛집이라고 했다. 마트에는 고기류는 팔지 않았지지만, 이전에 들렸던 T-2000보다는 물건이 더 다양해 보였다. 소박하고 정겹지만, 전문적인 느낌도 나는 곳이었다. 언젠가는 마트에 와서 장도보고, 여유롭게 커피도 한잔 하는 날이 오겠지?


마트 중의 마트는 단연, 나쿠마트였다. 커다란 코끼리 상이 입구에 서 있었고, ‘이 정도면 웬만한 건 다 있다’ 싶은 규모였다. 한국의 작은 이마트 느낌이랄까. 생필품부터 식재료, 문구류, 심지어 간이 가구까지. 없는 걸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선배단원도 이곳에서 장을 볼 것을 권했다. 이날 이곳에서 우리는 일주일 동안 먹을 물, 빵, 주스 그리고 쌀을 함께 골랐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상한 물건을 사게 되거나 불량품을 구매할 확률이 적은 곳이라고 했다. 물건의 품질이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마트에 산 물건이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이 르완다였다.


나쿠마트 옆에는 르완다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버번커피도 있었다. 세계 3대 커피 원산지라는 말이 실감 날 만큼 진한 향이 주변을 감쌌다. 커피맛도 모르고 즐길 줄도 몰랐지만,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조차 하나하나 새로 익혀야 했다. 물건을 고르는 데도, 가격을 확인하는 데도, 계산을 하는 일도 낯설고 서툴렀다. 처음이라 그런지, 모든 게 조금 무섭고 조금 재밌고, 또 아주 많이 막막했다.


꽤 많은 일정을 소화한 것 같은데, 아직도 해는 중천이었다. 한국의 패키지여행도 이렇게 빡빡하진 않을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충격을 받아야 오늘 하루가 끝나는 걸까. 막막한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다음 일정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 흐름에 그냥 실려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은 선배단원들과 함께하는 환영회 자리였다. 현지식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를 배려해 고급 중국식당에서 열렸다고 했다. 한식당이 없는 이곳에서, 중국식당은 그나마 쌀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식당 전체를 전세 낸 듯, 단원들이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 작은 도시 한복판에 한국인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들이 모두 KOICA 단원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이어졌고, 선배단원들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당시 르완다에는 대사관은커녕 영사관도 없었고, 거주하는 한인의 90퍼센트가 KOICA 단원이라고 했다. 그중엔 군 복무를 대신해 파견된 협력요원도 많았고, 또래들이 제법 있어 금세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인이라, 같은 소속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렸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향했다. 보기에는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익숙한 쌀밥도 있고, 탕수육처럼 생긴 요리도 있었다. 낯설지 않은 비주얼에 안심하고 한입 넣었는데 그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입 안 가득 알 수 없는 향이 퍼졌다. 그때의 나는 고수는커녕, 향이 강한 차조차 버거워하던 시절이었다. 식당에 들어설 때부터 은은히 느껴지던 낯선 냄새가 음식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이다.


밥을 씹었지만, 쌀보다 돌이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퍼석퍼석하게 흩어지는 식감에 놀라고,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생소한 향에 또 한 번 놀랐다. 입은 벌렸지만, 마음은 자꾸 다물고 싶어졌다.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고 했는데, 이곳의 탕수육과 두부튀김은, 신발보다 향이 더 강했다. 낯선 향과 맛이 뒤섞여 입안 가득 퍼졌고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선배단원이나 동기들 앞에서 적응을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몇 입을 더 먹어봤지만, 결국 속이 울렁거려 수저를 내려놓고 말았다. 옆에 놓인 콜라만 홀짝거리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한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단원들 주머니 사정으론 앞으로 이 음식, 먹고 싶어도 못 먹게 될 거예요.

아직 한국의 부유함에서 못 벗어난 거지. 나도 그랬어.

근데 곧 뭐든 잘 먹게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러면서 콜라를 따라주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조금 민망했지만, 그래도 콜라는 진심으로 맛있었다.

나도 참, 속 좋다.


정신없는 하루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낯설기만 했던 공간인데,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진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자, 걱정거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머지않아 마음이 철렁했다. 식재료를 고르는 것부터, 음식을 삼키는 일까지 무엇 하나 내가 아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기 어렵다는 현실을 절감했다.


내가 사는 숙소 이름은 ‘키미후루라 므이앰배’ 큰 망고나무가 있는 집이란다.

하지만 어딘지 안다고 해서, 갈 곳이 생기는 건 아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도우러 왔지만, 지금은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나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상하고 낯선 것들 속에서 더 이상 놀라지 않기로 했다.

그냥 하루하루, 내 앞에 놓인 것들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충실히 살아보기로 했다.


아직은 훈련 기간이다. 적응을 배우는 시간.
그래. 아직은 괜찮다. 그리고 딱히, 다른 선택지도 없다.

오늘의 교훈은 간단하다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건 생각보다 많다.


쌀, 우유, 비누, 그리고 아주 조금의 용기와 넉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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