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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Mar 08. 2022

결혼한 페미니스트는 있을 수 없다고요?

기혼자의 페미니즘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를 읽고

"결혼, 다시 한번 고민해봐"


결혼한 유부남이 미혼인 후배들에게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한 마디 건넨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간혹 접하게 되는 장면이다. 나름 유머라고 이 장면을 끼워 넣은 듯하다. 드라마나 영화뿐만이 아니다. 나는 결혼한 유부남들로부터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의 결혼 조언을 들어왔다. 표현에 서툰 유부남들의 행복한 불평인 건지, 정말 뼈저린 후회인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싫고 후회되면 이혼을 고민해보세요, 선배님! 행복을 위하여!'


그때마다 나도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후회하는 게 남성뿐이겠는가. 누워서 침 뱉기가 싫을 뿐이지. 여성들이 오히려 더 많은 후회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혼을 선언하는 페미니스트


결혼 후에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애초에 결혼 제도를 반대하며 비혼을 선언하는 이들이 있다. 비혼(非婚)은 미혼(未婚)과는 다르다. 미혼은 결혼 의사가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칭하는 반면, 비혼은 결혼을 거부하는 이들을 칭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비혼을 선언하고 결심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남성 중심 사회를 강화하며 여성 차별의 근간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애초에 결혼은 여성에 대한 소유를 사회적으로 승인하는 제도였다. 여성은 노동력이었고 재생산과 성욕 해소의 도구였으며 남성 사이의 동맹과 결속을 다지기 위해 교환되는 자원이자 그들 간 경쟁을 통해 배분되는 전리품이었다.
- p.26


이쯤 해서 질문이 떠오른다. 결혼과 페미니스트는 함께 갈 수 있는 것인가. 결혼한 페미니스트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의 질문이기도 했다. 페미니즘을 행위나 삶의 행태가 아니라 '지향 가치'로 정의한다면, 나는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페미니스트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나보다 훨씬 앞서 이 문제를 고민한 선배가 있었다. 정지민 작가는 <대학내일>, <주간경향>에 꾸준히 연애 칼럼을 써왔다. 그는 결혼을 결심한 즈음 운명적이게도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결혼한 페미니스트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는 그에게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절실한 질문이 되었다. 책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과 답을 적어 내려 간 일련의 과정을 책으로 엮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현상을 잘 버무린 책이다.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 낮은산


결혼 제도, 생물학적 성차, 출산과 육아, 비혼 등 결혼 관련 주제들을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맥으로 관통한다. 더 나아가 결혼 이외의 관계 형태를 지원하는 프랑스 팍스(PACS) 제도를 소개하며 상상력을 제공한다.


이 책을 알게된 건 약 2년 전이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로부터 책 선물을 받았는데 바로 이 책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였다. 우리 부부가 서로를 구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듬뿍 담은 책 선물이었다. 동시에 나의 '한남성'을 되돌아보라는 애정이 담긴 메시지 같은 선물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왜 결혼을 안 하려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결혼이라는 제도 차원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의 본질과 관련 있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나와는 다른 ‘차이’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정말 다양한 이유로 싸웠다.
- p.47


초반부에는 결혼이 지닌 남성 중심적, 여성 혐오적 제도 특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결혼이라는 것이 '함께 살기' 혹은 '관계 맺기'라는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부부의 결혼도 '함께 잘 살기'에 지금까지도 애를 먹고 있다. 스무 해 넘게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배어버린 습관을 재조정해야 한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는 관계라면 참 다행이지만 둘 중 하나가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되는 순간에는 서로의 요구를 협상하는 고난도 '외교 스킬'이 필요하다.


거실에서 양치하는 사람과 욕실에서만 양치하는 사람이 결혼하면 양칫물만 튀는 게 아니라 불꽃이 튄다. 소파 위에서 과자 먹는 게 낙인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씻지 않고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씻지 않고서는 침대에 엉덩이도 올려놓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설거지 후 젓가락 방향, 빨래 후 옷 개는 방법도 서로 재조정해야 한다. 이뿐일까. 함께 사는 이의 차이를 나열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다.


남편과 몇 번의 갈등을 겪으며, 나는 한남과 페미니스트를 가르는 것은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체감했다. 의식적으로 경계하지 않는다면 강자의 위치에 선 누구나 한남이 될 수 있는 거였다. 거꾸로 말하면 날 때부터 페미니스트는 있을 수 없다. 페미니스트는 후천적이고 의식적인 지향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매일매일의 실천이다. ...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나의 위치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한다.
- p.13


결혼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한다. 덧붙여 결혼은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다. 그래서 피곤하다. 둘이 함께 살면서 발생하는 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집안과 집안이 얽히니 총체적 난국이다. 강도는 다르지만 권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처가와 시가, 처가와 부부, 시가와 부부간에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에는 더욱더 높은 수준의 '외교 스킬'이 필요하다. 투쟁이 필요한 사안이 있고 원만한 합의를 이뤄야 할 사안이 있다.


우리 부부를 예로 들면, 명절 선(先) 방문지를 결정하는 사안 때문에 엄마(시가)와 내가 크게 다퉜던 적이 있다. 복잡한 서사(https://brunch.co.kr/@rulerstic/177)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아내가 아니라 내가 투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가 우선'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는 페미니스트의 투쟁이었고, 착한 아들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한남'의 몸부림이었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날벼락에 아내는 많이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미안함은 평생 할부로 갚아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결혼? 다시 한번 고민해보세요"


"둘은 어떻게 결혼했어요?" 가끔 나의 혼인 여부를 알게 된 사람들이 묻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는 다양한 호기심이 내포되어 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상대방의 무엇에 반해서 결혼하게 되었냐'는 질문이다. 내 기억으로 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대부분 미혼자들이었다. 마치 성공한 스타트업 창업자를 만나 "창업 성공의 요인은 무엇입니까!?"라고 캐묻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때마다 정답을 제시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떠한 질문에도 "결혼은 여러 번 고민해도 나쁠 것 없다"라는 결론의 동문서답을 하기 일쑤였으니까.  물론 결은 다르지만 소름 끼치게도 그 많은 유부남들이 해왔던 말을 내 입으로 하고 있다.  


한남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날벼락같은 위험이 도사리는 '결혼'을 굳이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므로 나는 결혼을 앞둔 여성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우선 결혼할 상대를 보아도, 그의 가족을 보아도 영 답이 없는 것 같다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닐 것 같을 때는 감이 온다. 이 감을 믿어야 한다. 나의 직감을 부정하는 의지적인 생각(사랑으로 이길 수 있다거나, 살다 보면 나아질 거라거나)들을 밀어내야 한다. ... 다른 한편,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남자라면 바꾸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함께 살아가는 평등한 사회의 시민을 내가 한번 양성해 보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가능성을 아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여성들이 왜 이런 짐까지 져야 하는가. 물론 그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남자들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며 무작정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내가 바꾼 남자가 또 하나의 남자를 바꾸고, 그 남자가 또 다른 남자를 바꾸고...... 이런 선순환을 생각한다면 싹이 있는 남자를 바꾸어 보는 것도 페미니스트 삶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본다.
- 186-187p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선순환'을 생각한다면 결혼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결혼 전만 해도 페미니즘에 관한 여러 의문들이 있었다. 아마도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지도 모르겠다. 기득권을 지닌 한남은 여성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구조적 차별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아내와 친구 덕분에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이전보다는 적극적인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여전히 한남 DNA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앞서 말한 '시가 투쟁' 후 우리 가족도 1년 간의 단절 끝에 결국 원만한 합의를 이뤄냈고 우리 부부 사안의 결정권을 우리 부부에게로 가져오는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아내와 친구는 한남을 변화시켰고 나는 우리 가족을 일부 변화시켰다. 엄마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알진 못하지만 시가 투쟁을 계기로 조금은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름의 선순환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날벼락'을 감수하고 결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미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인 사람들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결혼한 페미니스트에게 절망만이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 책 서평을 빌어 메시지를 전해 본다. 저자 또한 페미니스트의 결혼 생활이 쉽지는 않지만 결코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았을까? 이 길이 좁고 울퉁불퉁한 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인생이 어찌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로만 다닐 수 있겠는가. 어쩌다 보면 딴 길로 새기도 한다. 목적지를 늘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오마이뉴스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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