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출신이 소개하는 명소와 걷는 코스
전주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한 친구가 무주도 인터넷이 되냐고 물었다. 친해지려고 했던 건지, 정말 놀리려고 했던 건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상해서 화를 냈던 적이 있다. 타 지역 사람들이 무주를 오지 중 오지라고 인식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무주가 고향이라고 하면, 간혹 "토끼와 발맞춰 산다는 무주?"라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무주는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다.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이 있고 이를 배경으로 스키장이 있다. 한때는 남쪽 지역에서 유일한 스키장이어서 겨울 레포츠의 성지이기도 했다. 스키장 근처 구천동에는 한여름에도 찬 김이 올라올 정도로 시원한 계곡이 있다. 무주는 겨울에는 스키로, 여름에는 계곡으로 전국의 관광객과 휴양객을 끌어들였다. 무주가 먹고사는 비결이랄까.
소도시 무주도 다양한 변화를 겪고 있다. 안타깝게도 여름마다 문전성시였던 구천동 계곡을 향한 사람들의 발길은 점차 줄어들었고 겨울마다 겨울 레포츠를 즐겼던 이들도 다른 스키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2022년 26회를 맞았던 '반딧불축제'는 여전히 유명하고 특색 있는 축제지만, 이제는 지역 대표 축제가 바뀌어가고 있는 분위기다.
풀벌레 소리 들으며 보는 영화
2024년 올해로 산골영화제는 12회를 맞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입소문이 났고,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서울 친구를 우연히 영화제에서 만나기도 했었는데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무주는 토끼와 발맞춰 산다는 산골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것의 결과물이 바로 '무주 산골영화제'. 오지라는 이미지를 산골과 영화를 결합해서 낭만적인 분위기로 전환시켰다.
산골영화제가 사람들에게 '통하는' 기획이 될 수 있었던 건 무주가 지닌 천혜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주등나무운동장과 덕유산국립공원에서 해가 진 후에 영화가 상영된다. 야외에서 초여름 공기를 마시며 밤에 우는 벌레 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보는 게 산골영화제의 묘미다.
미국 도시계획가 케빈 린치(Kevin Lynch)는 도시 이미지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로 길, 결절점, 경계, 지구, 랜드마크를 꼽는다. 문화연구학자 강내희에 따르면 이때 도시 이미지는 물리적 대상인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도시에서 겪는 구체적인 경험의 결과물이다.
산골영화제 방문객은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영화제를 통해 겪은 경험과 감정을 통해 무주라는 지역을 긍정적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정기용 건축가가 만든 등나무운동장
영화는 등나무운동장과 덕유산국립공원뿐만 아니라 산골영화관, 예체문화관, 무주군민의집 등에서 상영된다. 야외 공간인 등나무운동장과 한풍루에서는 공연, 토크 등 다양한 문화 행사도 진행된다.
산골영화제가 열리는 등나무운동장은 무주의 지역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장소다. 故 정기용 건축가는 책 <감응의 건축>을 통해 일명 '무주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그는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만든 건축가로 유명하다. 무주 프로젝트의 주요 작품 중 하나가 등나무운동장이다. 등나무운동장은 관중석에 가벼운 원호 모양의 경량철골로 구조물을 만들고 울타리 주변에 등나무를 심었다. 시간이 흘러 등나무가 자라 자연 그늘을 만들었다.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시간을 다루는 일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게 한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 <감응의 건축>, 125쪽
등나무운동장은 운동시설이지만 공적인 집회 장소로 지어진 공설운동장이다. 초기 관중석에는 그늘이 없었고 VIP 자리에만 그늘이 있었다. 이에 초대받은 주민이 "햇볕과 피를 피할 수 있는 본부석에 너희들만 앉아있는데 우리가 미쳤다고 땡볕에 서 있겠느냐"라고 말했단다.
당시 군수는 그늘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정기용 건축가와의 인연으로 등나무운동장이 탄생했다. 자연과 건축이 감응하고, 주민과 건축가 그리고 군수가 감응한 상징적인 시설물이다.
영화제에 참석하는 이들은 자연과 인간이 감응하는 등나무운동장에서 영화를 보게 된다. 부디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무주에 방문하는 이들은 등나무운동장에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천혜의 환경
무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누리려면 직접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걷다 보면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시간과는 달리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주는 '걷기 좋은 도시'다. 보행 환경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풍경을 눈으로 보고 자연의 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걷기 좋은 도시다.
금강의 일부인 남대천을 따라 굽이진 아름다운 산능선을 바라보며 산책하는 코스가 좋다. 날이 좋다면 어디서든 푸른 하늘과 구름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 부동산 투자 가치가 적어서 덜 개발되었던 맥락 속에서 오히려 무주읍만의 매력이 생겼다. 주거지와 상업지의 건물은 자연환경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높이와 밀도를 지닌다.
반대로 도심지를 걸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건물의 풍경과 거리에 넘쳐나는 인파에 압도되어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없다. 무주 곳곳을 걸어본다면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산골영화제 때문에 터미널에 도착하는 이들이 있다면 무주에 도착하자마자 U대회기념교에 가보길 권한다. 앞뒤로 굽이진 산촌만의 풍경을 높은 위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무주와 어울리지 않는 높은 공동주택이 천변에 들어서는 바람에 경관이 약간 훼손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을 지니고 있다.
걷기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남대천을 따라 대차리까지 가보는 것도 좋다. 터미널에서 대차리까지는 도보로 1시간. 무주가 고향인 필자가 정말 강력하게 추천하는 코스다. 무주에 살면서 이 길을 따라 자전거를 정말 많이 탔다.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 중간에 남대천을 풍경으로 한 멋진 카페도 있으니 잠시 쉬어갈 것을 추천한다.
BTS RM 뮤직비디오에도 나온 '낙화놀이'
산골영화제와 함께 즐길만한 볼거리가 또 있다. BTS RM 솔로 앨범 뮤직비디오에 나온 낙화놀이다. 낙화놀이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됐고 지역로컬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낙화놀이에 관해서는 'BTS 뮤비에도 나온 이 놀이, 무주에 빠지다(https://omn.kr/26xv4)' 기사에 자세히 나온다.
산골영화제 일정이 있는 7, 8일 오후 8시 40분부터 10시까지 안성면 금평리 두문마을 일원에서 낙화놀이 시연이 펼쳐진다. 처음 보는 이라면 불꽃이 툭툭 떨어지는 장관에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이 외에도 무주에는 한국에서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바가 있는 국도 37번 드라이브 코스가 유명하다. 또한 반디랜드, 라제통문, 태권도원, 머루와인동굴, 적상산전망대, 덕유산 향로봉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러나 자가용이 없는 관광객에게는 짧은 일정에 쉽게 포함시키기 어려운 명소다. 산골영화제에 들르는 뚜벅이 관광객이 있다면 무주 향교를 들러볼 것도 추천한다. 터미널에서 걸어서 5-10분이면 닿는 거리에 있다. 활쏘기, 투호 던지기 등 전통놀이를 체험할 수 있으니 어린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들러서 향교에 관한 공부도 하고 각종 재밌는 놀이도 해보길 권한다.
사계절 궁금한 관광지가 되려면
도시를 공부하는 필자로서 고향 무주가 관광산업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자연환경을 과도하게 훼손하는 개발 방식은 지양하는 도시계획 방향이 필요하다. 도시에서 익숙한 영화라는 문화와 무주만이 지닌 자연환경이 더해져 산골영화제가 탄생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때 태권브이를 향로산 정상에 세운다는 기획 때문에 언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다행히 태권브이가 향로산 정상에 서는 기이한 발상은 현실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실로 위험한 발상이다. 한편 무주군은 무주읍 당산리 일대에 총 192억 원을 투입해 로봇체험공간 태권브이 테마파크를 2025년까지 조성하기로 했다.
둘째, 관광객을 위한 교통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산골영화제 때문에 왔다가 이동에 불편함을 겪는다면 다시 한번 방문하기가 꺼려질 것이다. 이번 산골영화제에서는 뚜벅이 여행객을 위해 서울-대전 ktx 티켓과 입장권 그리고 대전역-무주 셔틀버스 이용권을 묶어 판매했다. 물론 서울 방문객만을 위한 관광상품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관광지는 볼거리, 먹을거리, 머물 장소를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 셋을 연결 지을 이동 수단이 없다면 실패다. 무주에 도착해서 숙소, 그리고 주변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만 한다. 멀리 이동하게 되면 택시는 아무래도 경제적 부담이 크다. 시내버스는 배차간격과 운행 시간 면에서 편리하지 못하다.
관광형 DRT를 운영하는 게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DRT(Demand Responsive Transport)는 수요 응답형 교통 모델이다. 의미 그대로 이용자가 필요에 따라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 교통모델이다. 기존에 공급자 중심으로 형성된 대중교통이 운행시간과 배차간격이 정해져 있는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미 부산광역시는 부산형 DRT '타바라'를 기장군 관광지 일대에서 운영 중이며 경기도 용인시와 광주광역시도 준비 중이다. 관광형 DRT를 운영한다면 뚜벅이에게 매력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무주는 군민을 위해 '콜버스'라는 이름으로 DRT를 시행해 본 경험도 있고, 이를 통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적은 예산을 투입하여 관광형 DRT를 운영하는 것이 태권브이랜드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한번 왔다가 불편한 관광지로 기억에 남기보다, 사계절이 궁금한 관광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광형 DRT와 같은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도시들이 언젠가부터 비슷한 모양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말이다. 무색무취 도시가 우후죽순 생겼고 기존의 지역도 획일적인 개발 방식을 지향한다. 물론 삶에 필요한 필수 인프라는 갖춰야 하지만, 각 지역만의 개성이 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청정 자연은 무주의 자랑이다. 스위스를 함께 여행했던 아내도 무주에 방문해서 둘러볼 때마다 "알프스 같다"며 감탄한다. 한국의 알프스라는 표현이 과한 비유가 아니다.
산골영화제는 자의든, 타의든 산골이라는 환경을 보전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무주처럼 아름다운 지역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무주 산골영화제 사례가 낙후된 산촌, 어촌, 농촌의 귀감이 되는 사례가 되었으면 한다.
* 영화 <더 테이블>과 <최악의 하루>를 보고 김종관 감독의 영화 매력에 빠졌던 적이 있다. 때마침 2018년 산골영화제에서는 김종관 감독 토크와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는데, 사진전을 감상하고 토크도 참석하여 김 감독과 사진을 찍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