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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Jul 10. 2023

서울이라는 거대한 박물관에 걸맞은 가이드북

[서평] 서울의 명암, 빈곤층의 주거지와 도축장 <서울은 기억이다>

현재 서울의 면적은 605.25다. 1949년 268.35였던 서울은 점차 몸집을 불려 왔다. 1962년 596.5이 되었다. 이후로 서울시 면적은 조금씩 증가하고 감소했지만, 오늘날 서울시의 면적은 1962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시의 면적 변화 / 출처: 서울연구원


김포공항의 사례는 서울의 확장을 말해준다. 김포공항은 현재 서울특별시 내에 있다. 서울특별시에 있는 김포공항이라니. 김포공항은 1958년 국제공항으로 승격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김포공항은 김포시에 있었다. 1963년 김포공항을 포함한 부지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서울시에 김포공항이 있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가 서울이다. 서울은 몸집만 불린 게 아니다. 그 안에 인구는 몸집보다 더욱 빠르게 늘어났다. 1949년 143만 인구는 1966년 379만이 되었다. 15년 만에 2.6배가 되었다.


서울특별시 인구 변화 / 출처: 통계청


서울이 확장되면서 도심지와 함께 경계부도 급변했다. 책 <서울은 기억이다>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서울시의 변화의 발자취를 기록했다. 도시사학회 연구모임 '공간담화'의 신진연구자 12명이 썼다. 새롭게 얻게 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오늘날 도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떠한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지도 고민하게 해주는 책이다.


© 서해문집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사대문 안에 있는 서울 도심부의 변화 과정을 기록했고 2부에서 사대문 밖의 외곽부의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3부는 '공간의 명암'이라는 주제로 집, 지하공간, 하수도, 도축장 등 주요 도시 공간을 비춘다.


12명의 연구자가 쓴 글을 모은 만큼 여러 관점과 대상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목차를 살펴보고 흥미를 이끄는 지역이나 주제만 읽고 덮어도 된다. 필자는 완독을 했지만 여러 주제 가운데서도 도시 발전 과정 가운데 밀려난 도시 공간에 주목했다. 첫 번째는 빈곤층 주거지의 변화이며 두 번째는 비인간동물이 도살되는 도축장의 역사다.


도시 확장에 따른 주거지의 변화


도심지 공간의 변화는 집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일단 도시 활동이 시작되려면 사람이 거주할만한 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023년 현재도 여전히 주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끊임없이 갈등 중이다. 이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100년 전인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농민들은 농촌에서 생계를 잃고 도심지 서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집도, 일자리도 없는 상태로 말이다. 다행히도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도심지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쉬웠다. 이농민들은 도심 인근에 토막집을 짓고 생계를 이어 갔다. 이들을 '토막민'이라 부른다.


토막민 수는 꾸준히 늘어나 1928년 1143호 4803명이었던 것이 일제 말기인 1942년에는 7426호 3만 7026명까지 불어났다.
- p.290


당시 식민 당국은 급격히 늘어나는 토막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작 마련한 대책이라는 건, 경성부 바깥에 집단주거지를 설정하고 토막민을 그곳으로 내쫓은 것이 전부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은 도심 하천 변이나 구릉지 등에 자리 잡았다. 


무허가 판잣집 등 불량 주택의 수는 18만 7000채에 이르렀다.
- p.292
광복 후 청계천 변에는 무허가건축물이 급증했으며, 이는 식민지 시기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 - p.100


청계천변 판자집 철거당시 모습(1965년)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안타깝지만 해방 이후에도 빈곤층 주거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청계천 변에는 판자촌이 자리 잡게 되지만 김현옥 시장 시기에 청계천 판자촌은 철거되고, 철거민은 경기도 광주군에 마련한 대단지로 이주된다.


결국 해당 계획은 1971년 8월 10일 정부의 졸속행정에 반발해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 p.102


밀려난 도축장의 역사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도시 경계부의 변화다. 도시는 삶터다. 의식주를 비롯해 여가 생활이 펼쳐진다. 경제 관점에서 본다면 생산하고 소비하는 공간이다. 육식문화는 오래된 식문화다. 하지만 육식을 위해서는 기존의 농사와는 또 다른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곡물이나 과일을 농사지어 수확하는 것과는 달리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육축이라고 해서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키우고 잡는 것을 허용했다.
- p.363  


대한민국의 도축 역사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조선시대에는 닭과 개와 같은 가축은 개인이 알아서 잡았다. 반면 소와 말과 같은 큰 가축은 정해진 곳에서 '백정'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푸줏간이나 현방에서만 도살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1917년에 이르러서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경성부립도축장이 들어선다. 하지만 목구조였던 도축장 시설에서 나온 핏물과 오물이 여름마다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경성부립도축장은 1925년 종로구 숭인동 동묘 인근으로 이전하게 된다.


서울의 경계부를 따라 이동하는 도축장


도시계획 변화에 따라 도축장은 이동하게 된다. 경성부는 행정구역 경계를 확대하면서 1937년 <경성시가지계획>을 수립한다. 도축장은 숭인동에서 오늘날 왕십리 부근 마장동으로 1961년 이전한다. 행정구역이 확대된 만큼 밀려났다.


시립 제일도장 준공식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후 육류 수요를 대응하기 위해 추가로 도축장이 개장했다. 1974년 서울의 남서부인 금천구에서 독산동도축장이 개장했고 1986년에는 동남권역 경계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도축장이 개장했다. 이런 식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경계부에 도축장이 개장했다.


오늘날은 어떤가? 육류 소비는 더욱 증가했다. 서울시 내 도축장은 더욱 증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서울시 내에 도축장은 모두 사라졌다. 타 지역에서 도축된 동물이 가공되고 유통되어 서울에서 소비된다.


현저동, 숭인동, 마장동, 독산동, 가락동. 서울이 확장할 때마다 도축장은 경계에서 머물다 결국 사라졌다.
- p.381


도시민은 도시의 발전과 성장을 통해 어마어마한 이익을 누린다.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이렇게 급격히 발전한 국가와 도시가 있었는가. 많은 개발도상국이 한국과 서울을 주목하는 이유다. 하지만 책 <서울은 기억이다>는 도시 발전과 성장에 따른 명암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특히 그 명암은 보통 계층적으로 약한 존재들에게 드리워진다. 빈곤층 주거지와 도축장의 역사가 이를 보여준다.


오늘날 '여의도'와 '강남'을 만든 도시계획의 역사를 기록하다


앞서 도시 발전에 따라 밀려난 공간을 중심으로 기술했다. 책에는 더욱 많은 장소의 역사가 흥미롭게 기록됐다. 그중 흥미로웠던 도시계획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여의도와 강남이다. 


여의도의 넓고 기다란 광장은 비행장 활주로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놀랐고, 여의도는 서구의 도시계획 이론을 따라 용도별로 필지를 구획하고 바둑판 형식으로 건축부지와 교통로를 구분한 최초의 도시계획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강남지구 개발조감도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강남은 어떤가. 강남은 행정구역 상 서울시도 아니었다. 1963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던 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이후로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한남대교가 건설되고 강북에 있던 주요 학교들이 이전하게 되면서 강남은 금싸라기 땅이 되기 시작했다.


여의도와 강남을 비롯한 종로, 용산, 동대문, 청계천 등 서울 내 여러 지역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궁금하지 않은가. 어떻게 강남은 최고의 금싸라기땅이 되었는지. 용산에는 미군이 주둔하며 어떻게 변해갔는지. 지금은 산책로로 각광받는 청계천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서울의 역사를 흥미롭게 안내해주는 가이드북


도시를 공부한 이후로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책이나 논문을 보며 연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시를 걷다가 책이나 논문이 알려주지 않는 것을 배우기 위해 공간을 곱씹는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도시는 거대한 박물관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청계천의 모습 


도시를 박물관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서울은 유물과 기록이 넘치는 박물관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터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꾸준히 인구가 증가했다. 사대문 안에서는 한양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밖에서는 급격히 팽창한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둑판처럼 자동차를 위한 도시계획을 적용한 여의도,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되던 여의도 광장, 허허벌판이 금싸라기땅으로 순식간에 변해간 강남. 하지만 흔적이 사라져 역사를 들추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사실도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한 빈곤층의 주거지와 도축장의 흔적이 그러하다. 판잣집이 즐비했던 청계천은 깔끔한 산책로가 되었고 숭인동 경성부립도축장 위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아마도 책을 읽은 후에는 책에 소개된지역과 건물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과거를 상상하며 동시에 미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오마이뉴스 송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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