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했고 이후로 꾸준히 여러 운동을 해왔다. 태권도, 유도, 택견, 축구, 농구, 배드민턴 등 종목은 달라도 이 모든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기술 한 가지를 이야기하라면 바로 '힘 빼기의 기술'이다. 어떤 종목이든 힘을 빼야만 운동 수행력이 향상된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으로는 익히기 어려운 기술이 힘 빼기다.
유도를 하면서 힘 빼는 게 기술을 사용할 때 정말 중요하단 걸 몸소 깨우쳤다. 유도의 대표적인 기술인 업어치기를 하려면, 상대를 맞잡은 상태에서 팔을 꺾으면서 상대 몸 쪽으로 내 몸을 말아야 한다. 이때 상대를 넘길 욕심 때문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 유연성이 떨어진다. 내 몸이 내 동작을 막아버리는 신비한 현상을 겪게 된다. 쉽게 말해 각목처럼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상태로는 상대를 넘길 수 있는 자세로 전환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에 업어치기를 익혔다. 손목과 팔목 그리고 어깨까지 힘을 뺀 상태여야만 한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동작을 전환하여 기술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 하나의 동작을 몇 날 며칠을 연습한다. 매일 상대는 달라지지만 사용하는 기술은 똑같다. 반복이다. 하루에 상대를 30번 업는다 쳐도 400일이면 만 번을 넘어선다. 결국 업어치기 기술을 사용할 타이밍과 자세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상대의 체급과 힘에 따라 달랐지만 비슷한 체급의 입시준비생, 체급이 높지만 경력이 안 된 일반인 정도에게는 기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힘이 빠지질 않네.'
이것은 혈기왕성한 청춘의 고백이 아니다. 복싱을 잘하고 싶은 자의 한탄이다. 복싱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 정도 됐다. 나의 힘 빼기 기술에 점수를 매기자면 50점 정도 줄 수 있겠다. 운동할 때 힘 빼기는 댄스에서 웨이브를 출 때처럼 항시 힘을 빼라는 의미가 아니다. 팝핀처럼 힘을 빼고 있다가 적절한 타이밍에만 힘을 주는 것이다. 원리나 동작의 메커니즘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는데 기술이 몸에 숙달되지 않았다.
복싱에서 힘 빼기 기술을 익혀야 하는 이유는 펀치 속도를 향상하기 위함이다. 펀치 속도를 향상해야 상대에게 강한 펀치를 적중시키고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 고등학생 때 물리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자.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이다. 한 물체의 운동량이 다른 물체에 부딪히면 충격량이 발생한다. 질량이 크거나 속도가 빠르면 충격량이 커질 수 있다. 물론 몸의 협응력이나 근질 등과 같은 요인이 영향을 주지만 이론적으로는 질량과 속도에 따라 파워가 결정된다.
체급은 과학이다. 복싱이나 격투기를 하다 보면 '체급이 깡패'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격투기 시합은 체급이 존재한다. 따라서 동일 체급에서 펀치 파워에 차이를 두는 방법은 결국 속도를 향상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복싱 선수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펀치 속도를 향상하고 펀치로 체중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펀치 속도를 향상하기 위해서는 힘을 빼야만 한다. 또한 힘이 들어가면 타격 예비동작이 보여서 상대에게 쉽게 읽히기도 하기에 힘을 빼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힘 빼기가 좀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특히 스파링을 하거나 생활체육대회와 같은 시합에 참가하게 되면 힘이 잔뜩 들어간다. 힘을 빼야 하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만, 힘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심리적으로 설명된다.
첫 번째는 긴장감 때문이다. 스파링이나 생활복싱대회는 실전이다. 실전은 긴장감을 준다. 평소 안면이 있는 관원이나 관장님과 할 때보다 처음 상대하는 이들과 겨룰 때 더욱 긴장된다.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 예측되지 않는 상대의 움직임과 같은 것들이 긴장감을 향상한다. 때로는 시각적인 면이 긴장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몸을 뒤덮은 문신이나 쩍쩍 갈라진 근육과 같은 외적인 모습이 대표적인 예다.
기세도 중요하다. 스포츠에서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경기 초반에 상대의 강하거나 정확한 펀치가 내 몸에 닿으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일반적으로 생활복싱대회에서 사용하는 글러브는 체육관에서 사용하는 글러브보다 얇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탓에 아프다고 느낄 새가 없다. 하지만 평소 맞아보지 않은 얇은 두께의 글러브로 맞게 되면 당황스럽다. 무엇보다 평소 스파링에서 느껴보지 못한 힘과 속도를 경험한다. 상대는 죽자고, 아니 생존하고자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활복싱대회를 나가기 전에는 실전과 유사한 형태의 '풀스파링'을 치른다. 강도가 달라지면 이에 따라 긴장감도 증가하고, 긴장하면 체력이 급격히 소진되기 때문이다. 몸은 뻣뻣해지고 이에 따라 협응력과 기술의 수준도 떨어지게 된다. 평소 기량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 프로선수도 시합을 앞두고 기술 훈련과 체력 훈련과 더불어 실전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풀스파링을 치른다. 이러한 연습은 높은 강도의 최대한 적응하여 긴장감을 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긴장감은 경기 내용과 결과에 영향을 끼친다.
두 번째는 욕심 때문이다. 상대를 타격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면 펀치 속도도 떨어진다. 게다가 힘이 들어간 상태로 복싱을 하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체력이 다 빠져버린다. 힘이 필요할 때 힘이 나지 않는다.
복싱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참가한 첫 번째 대회에서는 잔뜩 들어간 힘 때문에 동작도 커지고 거리도 잘 잡히지 않았다. 참가에만 의의를 둔다고 했지만 패배의 맛은 썼다. 첫 패배 후 복싱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첫 패배는 나침반이 되어 훈련 방향을 결정해 줬다.
지금까지 생활복싱대회를 나가 다섯 명의 상대와 겨뤘다. 전적은 3승 1무 1패. 세 번을 이겼지만 힘 빼기 기술을 잘 활용하면서 시합을 했던 적은 없다. 자유자재로 힘을 빼고 주면서 평소 복싱 실력을 펼칠 수 있는 날이 오긴 하는 걸까. 이러한 욕심마저 내려놓아야 힘 빼기 기술은 완성되는 것인가.
힘 빼기는 복싱을 비롯한 격투기나 운동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힘 빼기는 일상에서도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 과도하게 힘을 주면 자연스럽지도 않고 어색하다.
그럼에도 필자가 힘 빼기에 성공한 분야가 있다. 바로 채식이다. 6년 차가 되면서 식탁 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상황을 마주했다. 이전 글(https://brunch.co.kr/@rulerstic/478)에서 썼던 것처럼 비건을 지향하던 초기와는 달리 지금은 식단이 유연해졌다. 힘을 빼니 유연해질 수 있었고 나름 나만의 채식 기준이 생겼다. 여러 옷을 입어보며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은 것과 같달까.
채식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다양한 상황과 사람을 경험할 시간이 필요하다. 복싱에서도 다양한 상대를 만나고 링 위에서 수많은 상황을 겪으며 조금씩 유연해질 것이다. 여전히 힘 빼기에 실패하지만 복싱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스파링 영상을 보면 다행히도 나아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년 전 영상 속 나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삐걱거린다. 마치 강철 로봇을 몸 안에 넣은 것처럼 말이다. 훗날, 현재 영상을 본다면 아마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1년 전과 오늘이 다르듯 오늘과 1년 후 내 모습은 다를 것이다. 다만 이런 긍정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그나저나 복싱을 향한 욕심은 힘이 빠지질 않으니 이건 어째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