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인선수권복싱대회 후기]
지난 11월 1일과 2일에 열린 서울신인선수권복싱대회에 참가했다. 체육관에서 훈련한 지 3년이 좀 안 되는 때였다. 서울신인선수권대회는 선수 등록 후 입상 경력이 없는 선수들의 시합이다. 말 그대로 신인선수들의 시합이다. 생활체육의 졸업을 알리고 아마추어선수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다.
시합 장소인 한국체육대학교로 이동했다. 이른 아침인 7시에 계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65kg으로 통과했다. 채식 식단을 유지하면서 운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특별히 감량이 어려울 건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기름진 음식을 자제했고 2~3주간 주 2회 달리기 훈련을 추가로 수행했다. 무엇보다 이른 시간부터 계체를 시작하는 일정에 맞춰 한주 동안은 수면 패턴을 바꾸고 일찍 일어났다. 상대와의 싸움은 시합 당일 3분 3라운드로 끝나지만, 나와의 싸움은 오래전부터 시작된다.
어느덧 내 시합까지 두 경기가 남았다. 미리 대기석에 앉아 글러브를 착용한다. 누군지 알 수 없던 의문의 상대를 마주하는 첫 순간이다. 같은 체급이지만 서로의 신체 특징을 스캔한다. 팔 길이는 긴지, 상체가 발달했는지, 하체가 발달했는지, 턱은 맷집이 좋아 보이는지.
상대의 키는 비슷하지만 골격은 더 커 보였다. 체급을 맞추기 위해 평소 체중에서 감량한 느낌이랄까. 팔뚝과 하체는 쓸데없는 지방은 다 빠지고 근육이 탄탄한 몸매였고 얼굴은 골격이 훤히 드러나는 외모였다. 상대를 확인하자 스스로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두려움이 올라왔다.
두려움이 닥칠 때 꺼내는 비밀 루틴
헤드셋을 꺼내 음악 애플리케이션에서 '신인선수권대회 재생목록'을 켰다. 딥플로우의 <작두>를 들었다. 무당이 굿판에서 작두를 타듯 링에서 한바탕 놀아보자. 마음속 두려움이 옅어지고 자신감과 설렘이 피어올랐다.
'복신이여 들어오소서!'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추가한 훈련 루틴이 있다. 노래로 정신을 다잡는 루틴이다. 시합 등록 후 훈련하는 내내 신체 상태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는 빨간불과 파란불을 오갔다.
보양식으로 신체 컨디션을 올리듯, 전투력과 자신감 향상을 위해 특별한 음악을 선별해 필요할 때마다 들었다. 거짓말처럼 전투력이 상승했다. 예전에는 낯 뜨거운 노래라고 생각했던 하현우의 <돌덩이>, 평소 좋아했던 이센스의 <Next level>, 딥플로우 <작두> 등이 재생목록 중 하나다.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은 실전이다
드디어 링에 오를 시간이다. 이제는 링 위에 청코너 상대와 홍코너 나 그리고 심판뿐이다. 종이 울리고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몸이 정말 가벼웠다. 평소 연습했던 인 앤 아웃 스텝을 활용하여 가볍게 상대의 거리 안과 밖을 드나들었다. 속임수 잽도 던져주고 상대 공격도 이끌어내면서 빈틈을 찾았다. 매일 연습한 앞손 잽을 적중시키기도 했다.
격투기에서 ‘셋업’은 진짜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인데 쉽게 말해 상대를 속이는 동작이다. 예를 들면 원배(잽 후 바디를 공격하는 동작)를 셋업으로 깔아 두면 상대가 복부 쪽 방어에 신경을 쓴다. 그다음에는 원투로 상대 안면을 적중시키는 것이다. 그냥 원투만 던져서는 절대 상대 안면에 공격이 도달할 수 없다. 이 셋업을 활용해 몇 차례 공격을 적중시켰다.
하지만 나만 열심히 훈련한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상대의 속도는 나보다 빠르지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과 안정적인 중심에서 나오는 강한 펀치로 나의 중심을 흐트러뜨렸다. 그러던 중 상대의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측두부에 몇 차례 허용했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헤드기어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은 시합은 처음이라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이 들어가자 발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3분이 흘렀고 기다리던 종이 울렸다. 체육관에서 하던 스파링의 3분과는 밀도가 달랐다.
라운드 사이 1분 간 휴식을 취하며 세컨드(다른 스포츠의 코치와 비슷하지만 복싱에서는 가벼운 부상 치료도 함께 하는 보조인)와 응원을 와준 친구들의 지시와 조언도 듣는다.
2라운드부터는 1라운드에서도 잘 통했던 잽을 살려줬다. 왼쪽으로 돌면서 상대의 거리 바깥에서 빠른 속도로 앞손을 맞춰나갔다. 그러면서도 근접전이 펼쳐지면 피하지 않았다. 자세를 낮춰 중심을 바닥을 깔고서 연타로 받아쳤다.
어느덧 마지막 라운드가 되었다. 마지막 라운드에는 도저히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 때문에 장기였던 속임수 동작조차 힘들었다. 상대는 공격적으로 전진했지만, 나는 백스텝으로 빠지지 못하고 위빙 동작으로 펀치를 피하려다가 엉키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위빙 순간에 몇 차례 고개가 숙여졌고 결국 1점 감점을 받았다. 라운드별 점수제에서 1점 감점은 치명적이다.
3분 3라운드는 정말 지옥 같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짰다. 누군가 다리를 툭 건드리면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만, 못질하듯 링바닥에 두 다리를 박아놓고 안간힘을 써서 주먹을 뻗었다. 머리를 맞대고 접근전을 펼치는 순간에는 체육관에서 관장님과 매일 훈련했던 연타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오기도 했다. 어퍼컷과 바디도 적중시키며 3라운드 후반부는 주도권을 가져온 채로 마무리했다.
3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상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본능적으로 서로를 안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일 듯 싸웠던 상대와 나는 이제는 서로가 필요했다. 진이 빠져버렸고 기댈 누군가가 필요한데 세컨드는 너무나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종소리가 우리 둘 모두를 살렸다. 적이었지만 종이 울린 후 복싱으로 하나가 되는 이 순간을 참 좋아한다. 흘린 땀과 피나는 노력은 서로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말 후련했다. 무심코 끝나자마자 관장님께 승패를 떠나 후회 없이 싸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동안 연습했던 화려한 기술을 맘껏 뽐내진 못했지만 9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알고 있는 복싱의 전부를 쏟아냈다.
그러나 링 위에 오른 이상 심판에게 붙잡힌 내 손이 들리길 바라는 건 모두 똑같은 마음이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판정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박빙이었다는 의미일 테다. 심판위원장님 주변으로 모든 심판 분들이 모였고 회의가 길어졌고 5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내 손이 들리지 않아도 박빙의 시합을 펼쳤다는 것과, 모든 힘을 쏟아냈다고 자부할 정도로 후회와 미련이 없다는 것에 더욱 만족했다. 이땐 정말 진심으로 져도 후회 없다고 생각했다.
링에 오르는 이들은 모두 두려움 이겨낸 무패 복서
아마추어선수로 등록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생활체육대회 출전은 어렵다. 생활체육‘대회’는 끝났지만 생활체육인으로서 복싱 생활은 지속할 것이다. 복싱의 최종 목표가 챔피언인 이들이 있겠지만, 취미인인 내게는 승리만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前 UFC(세계 최고 MMA단체) 김동현 선수는 시합 출전은 즐겁게 운동하는 과정 중 일부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 또한 그 생각에 동의한다. 앞으로도 복싱 자체를 즐기고 싶다. 소박한 목표가 있다면 늘 어제보다 강한 내가 되는 게 목표다.
최근 tvn스포츠 <아이엠복서>에 출연한 장혁 배우는 50세다.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인데 도전하는 이유를 묻자 "그냥 당겼나 보죠"라는 인터뷰를 했다. 복싱은 참 이상한 스포츠다. 끊임없이 도전심을 일으킨다. 시합을 준비하면서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보는 경험도 해보고 시합 도중에는 귀, 이마, 볼 곳곳에 상처도 생겼다. 이기니까 좀 덜 아픈 걸까? 아니면 아직 덜 맞은 걸까? 나도 모르게 내년에 어떤 대회에 도전해 볼지 찾아보고 있다.
복싱은 참 매혹적이지만 잔인한 스포츠다.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느 팀 스포츠와는 달리 개인 스포츠로서 선수가 짊어져야 할 승패의 부담감이 큰 게 사실이다.
어쨌건 두려움 자체를 이겨냈다는 점에서 링 위에 오른 이들은 모두가 승자 아닐까. 일단 두려움을 딛고 링 위에 오른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패배 자체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상대일 수도 있고, 맞는 것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세계 챔피언이 아닌 이상 나보다 강한 사람은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승패보다는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려 한다. 특히 도전의 여정 가운데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훈련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수들 모두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하다. 링 위에 오르는 모든 이들은 두려움을 이겨낸 무패 복서다.
* 에필로그
이제 '생활체육'대회는 끝났다. 4승 1무 2패. 타고난 복싱 DNA가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더 큰 도전으로 향하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프로선수 혹은 아마추어 선수가 되는 것이다. 생활체육과 가장 큰 차이는 헤드기어라는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글러브 무게도 가벼워진다. 그만큼 타격의 강도는 증가하고 부상의 위험도도 높아진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도 있다. 프로 경기는 라운드당 3분, 최소 4라운드로 진행된다. 세계챔피언전은 12라운드다. 아마추어 경기는 라운드당 3분, 3라운드로 진행된다. 아마추어는 라운드가 짧기 때문에 밀도 높은 승부가 펼쳐진다. 프로 경기에 비해 주먹 숫자와 움직임이 많고 속도가 빠르다. 반면 프로 시합은 라운드가 길기 때문에 체력 관리와 효율적인 움직임이 중요하다. 프로는 누가 강한지를 겨룬다면, 아마추어는 누가 기술이 좋은지를 겨룬다고 보면 된다.
본업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금 더 안전해 보이는 아마추어 선수에 도전하기로 했다. 프로는 흥행을 위해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심판이 시합에 개입을 덜 하는 편이지만, 아마추어는 기술적 완성도를 평가하기 때문에 경기 규칙이 엄격한 편이고 심판 개입이 잦은 편이다. 예를 들면 프로는 그로기(타격 혹은 체력 저하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유효타가 나오더라도 경기를 지속시키지만 아마추어는 스탠딩 다운을 선언한다.
복싱선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훈련한다. 하지만 혼자서만 훈련할 수 없는 것이 복싱이다. 첫날 계체 후 대진표를 추첨했는데 당일 경기가 없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이틀 동안 새벽부터 주말을 통째로 반납하고 함께 해주셨다.
또한 디테일한 코칭도 해주셨다. 이번 시합 때는 잽 내면서 도는 것과 링 중앙을 먹으라는 것, 인파이팅 시에는 받아치라는 지시까지. 정말 감사했다. 무엇보다 덕분에 복싱을 즐기는 법을 배웠고 인생 최고 취미를 선물해 주셨다.
관장님뿐만이 아니다. 시합 전 훈련 기간에는 수많은 프로선수들과 체육관 형동생들이 연습 상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아마추어대회임에도 응원 와준 우리 체육관 양세열 챔프. 든든했다. 그런데 도대체 10라운드는 어떻게 하는 거니…? 전국체전 서울시 대표 하민이, 윤우의 열렬하고 기세 좋은 응원과 디테일한 지시(내가 다 듣고 이행하려고 했다)도 고마웠다.
매 시합 한 번도 빠짐없이 함께 해주면서 응원해 주는 아내. 남편의 상처와 멍을 보고도 크게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승리처럼 기뻐해주고 경기 때는 같이 아파하기보다 “가드 챙겨!”라고 외치면서 함께 싸워준다. 동시에 영상까지... 선수만큼 바쁜 매니저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서울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날아온 명훈이 형(생각해 보니 나 타투할 때도 함께 있었네)까지. 영상 다시 보면서 마치 자신들의 경기인 것처럼 공격 성공할 때는 기뻐하고, 불안한 자세가 나오면 지적해 주고, 소리 지르고. 웃음벨이다.
모두 고맙다.
스파링 하면서 복싱인생 처음으로 눈에 멍이 들었고, 시합하면서 귀, 이마, 볼 곳곳에 영광의 상처가 남기도 했다.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복싱 추억만큼은 가슴 깊은 곳에 새겨졌다. 이날의 공기와 열기 그리고 함께 했던 친구들 모두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번 시합을 이겨서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복서는 늘 완벽한 복싱을 구사하기 위해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고 고쳐야 한다. 승리의 맛은 가끔 즐기고, 이번 시합도 복싱 여정의 일부로 여기자. 단점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으련다.
영상을 다시 보니 상대 주먹이 나올 때 허리를 숙이는 버릇이 있고 가끔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도 보인다. 복싱선수에게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턱 숙이기가 잘 되지 않아 턱이 공중에 노출되는 위험한 순간도 보인다. 작년 생활복싱대회 때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는데 1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부지런하게 훈련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안일하게 훈련했다는 증거다. 턱에 공을 끼고라도 턱숙이기는 반드시 고치련다.
이 글을 쓰는 2025년 12월 현재, 몇 번의 스파링을 통해 턱 숙이기는 기본자세가 개선되고 있다. 역시 섀도보다는 스파링이 실전에 가깝고, 여러 번의 스파링보다 한 번의 대회가 실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