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두 발로 이동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네 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자동차의 등장 때문이다.
대한민국 자동차 등록대수는 2,630만 대(2024년 기준)다. 이는 1.95명당 자동차 1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10년 전 2014년 2,012 만대보다 무려 600만 대 가량 늘어났다.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서울일지라도 자동차 등록대수는 318만 대고 통근/통학 시에 승용차를 이용하는 비율은 22.4%다.
어딜 가든 자동차가 보인다. 단순히 자동차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다. 서울시 여기저기를 걷다 보면 서울이 너무나도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필자의 석사 학위 지도교수였던 정석 교수는 책 <도시의 발견>에서 "도시는 정치"라고 말했다. 도시를 공부하고 관찰할수록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보행로는 좁고 차로는 넓은 대한민국
이 글은 '도시는 정치'라는 관점으로 차도와 보행로를 바라보고자 한다. 다만 현재 도로 체계나 통계 체계상 도시 내 도로와 보행로의 비율을 수치로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보행로는 좁은데 차로는 넓은 사례를 여럿 보게 된다. 현재 거주하는 아파트는 1990년대 후반에 건설된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아파트다. 단지 내부와 주변을 걷다 보면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된 단지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도시 설계인가?
도로 면적이 적다는 건 핑계다. 일방향으로 통행하는 방법도 있다. 효율이 떨어진다고? 보행자의 안전보다 운전자의 효율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까? 자동차는 편하게 쌩쌩 달리도록 면적을 확보해 주지만 인도는 두 사람이 겨우 어깨가 부딪힐까 조심하며 걸어야 한다. 이런 도시 설계는 보행자보다는 자동차를 우선하는 사회라는 걸 암묵적으로 말해준다.
겨울이 되면 열선이 어디에 깔렸는지 보면 도시설계의 우선순위가 어딘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집은 오르막길에 위치해 있다. 차량 안전을 위해 도로에 열선이 깔려 있다. 기술 발달로 인해 안전이 확보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행로에는 열선이 깔려있지 않다. 얼어버린 눈길에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긴장을 늦춰다가는 엉덩방아를 찧거나 간혹 피겨선수처럼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공중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아찔한 상황도 연출된다.
건강한 사람이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노약자나 몸이 약한 사람에게 벌어진다면 정말 아찔한 일이다.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얼마나 위험할지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이 눈 속에 묻히는 건 다반사다. 그럼에도 보행자를 위해 열선을 깔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성북구 정치인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보행자 안전을 위한 도시설계기법
매일 출퇴근길에서도 서울이 자동차 중심 도시라는 걸 느낀다. 필자가 출퇴근하는 길에는 보차혼용도로가 있다. 보차혼용도로는 자동차와 보행자가 함께 다니는 도로다.
보행자가 걷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쌩' 지나갈 때가 많다. 마치 운전 실력과 공간지각력을 뽐내듯이 말이다.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많다. 황당한 마음에 지나간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지만 보행자가 대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보차혼용도로는 보행자에게 지뢰밭과도 같은 존재다. 2022년 도로교통공단 통계에 따르면 전체 보행 사망자 10명 중 7명이 보차혼용도로에서 사고를 당한다.
신도시나 재개발지역 지구단위계획지침에서 보행로를 확보하는 도시계획 지침이 개선되고 있으나 기존 노후화된 도시에는 여전히 보차혼용도로가 많다. 실력을 뽐내는(?) 운전자를 누구도 제지하지 못하고 있다.
보차혼용도로에서 보행자 안전을 위한 도시설계 방법이 있다. 첫째, 작은 면적이나마 보행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안전펜스를 설치하여 확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둘째, S자 형태로 굴곡을 주어 설치하는 방법도 있다. 시케인이라고도 부르는 이 기법은 차량의 속도를 감속시킨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코블스톤으로 포장하여 주행에 불편감을 주어 속도를 낮추는 방법도 있다. 작은 과속 방지턱이 계속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보차혼용도로의 폭이 좁은 특성상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도로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좁은 도로에서는 최소한 연석이라도 설치하여 보행로 공간을 구분했으면 좋겠다.
우회전 보행자 교통사고를 막는 신호체계가 있다
보차혼용도로 외에도 보행자와 자동차가 함께 이용하는 도로가 있다. 바로 횡단보도다. 횡단보도 녹색불이 켜져 있다고 안심해도 되는 걸까? 한국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우회전 보행자 교통사고 건수는 매년 4,000건가량 발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매년 60명가량 사망자도 발생하고 있다.
횡단보도 녹색불 신호임에도 우회전하는 차량에 부딪혀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건너는 사람이 없다고 우회전하는 차량이나 오토바이를 자주 보게 된다. 지난 20일부터 자동차의 우회전 일시정지 의무 위반에 대해 경찰이 '2개월 집중 단속'을 시작했다.
물론 운전자의 법규 의식도 중요하지만 교통체계를 바꾸는 게 훨씬 안전한 방법이다. 대표적인 방법이 대각선횡단보도와 동시보행신호 체계다. 대각선횡단보도를 설치한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된 바 있다. 모든 방향에 보행자 녹색신호를 작동함으로써 보행자 횡단 시 차량의 진입을 원천 차단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왕국엔 맞선 보행환경 만들기
도시설계기법과 교통체계 변화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시민이 직접 보행자 안전을 위해 활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언젠가부터 좁은 보행로에 당당히 자리 잡은 자동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반 자동차의 폭은 최소 1.5m는 된다.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폭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을 때가 많다. 차량 통행은 방해하면 안 되니 보행로에 대겠다는 심산인가? 유아차나 휠체어가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폭도 남겨두지 않고 보행로를 차지한 차량도 있다.
정부는 안전신문고라는 앱을 통해 불법 주정차 시민 신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소화전, 교차로 모퉁이, 버스 정류장, 횡단보도, 어린이 보호구역, 인도 등 6대 구역에 불법 주정차 차량일 경우 1분 간격으로 촬영한 사진 2장을 업로드하면 신고할 수 있다. 신고 요건이 충족되면 현장 단속 없이 사진 신고만으로도 차주에게 과태료가 부과된다.
올해 초부터 길을 걸으며 인도에 불법주정차 차량을 신고하기 시작했다. 보행자로서 자동차 왕국에 맞서 안전한 보행환경 만들기에 직접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아내는 불법주정차 차량을 신고하는 필자를 '보행로 보안관'이라고 부른다.
어느덧 16건을 신고했다. 몇 차례 신고가 수용되지 않으면서 수용되지 않는 몇 가지 이유도 알게 됐다. 반드시 충족해야 할 신고 요건은 불법주정차 사실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사진 두 장이 있어야 한다. 두 장의 사진은 같은 자리에서 1분 간격으로 촬영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한 장만 올리면 신고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한겨울에는 추위에 떨며 제자리에서 1분을 기다려 불법주정차 차량을 촬영한 적도 있다. 1분 간격으로 두장을 제출했어도 사진촬영자의 위치가 달라지면 해당되지 않는다. 사진 촬영자의 위치가 달라진다고 요건에 충족되지 않는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운 요건이긴 하지만 지침이 그렇기에 어쩔 수 없다.
또한 사진에 자동차 번호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은 저녁에 촬영한 사진인데 차량 조명에 의해 빛이 반사되어 번호판에 약간의 빛 번짐이 있었다. 필자가 보기엔 충분히 식별이 가능한 정도의 번짐인데 수용되지 않았다.
이렇게 부과된 과태료는 어디에 쓰일까? 대전일보에 따르면 일반 회계로 편입되어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교통안전시설 특별회계'는 유럽, 미국 등 일부 선진국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도입한 제도다. 이 제도는 교통법규 위반으로 거둬들인 수입을 교통체계를 바꾸고 교통안전을 도모하는 곳에 쓰자는 취지로 생겨났다. 대한민국에도 이 제도가 안착되어 교통안전을 도모하는 목적으로서 재원이 속히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보행자는 안전하게 걷고 싶을 뿐이다
안전한 보행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선진 사례를 적용하여 굴곡 도로(시케인)를 조성하거나 연석을 설치하는 방법이 있다. 둘째, 교통체계와 제도도 변화해야 한다. 처벌 규정과 같은 처벌적 제도도 마련되어야겠지만, 대각선횡단보도와 동시보행신호 체계와 같은 보행자 중심의 교통 환경이 조성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운전자의 의식도 변화해야 하지만 보행자가 직접 '불법주정차 신고하기'에 참여하여 우리 스스로 안전한 보행환경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길거리를 안전하게 걷고 싶을 뿐이다. 보행자가 안전하게 걷는 그날까지, 필자의 불법주정차 신고는 계속될 것이다. 각 지역마다 이 파도의 물결에 오르는 보행로 보안관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서울시 생활도로 보행공간 확보 위한 자치구 역할 강화방안, 2017, 서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