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당번은 매일 초록색 플라스틱 박스에 우유를 담아왔다. 학교에서는 한 달에 5~6천 원 정도를 지불하면 우유를 매일 마실 수 있었다. 슈퍼보다 가격이 싸서 많은 친구들이 우유급식을 신청했다. 그렇게 우리는 깡촌에서 '서울' 우유를 싼 값에 먹을 수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마시는 우유를 따로 신청하지 않았다.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울에서 생산된 우유라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우유를 마셔도 우유 특유의 비릿함이 느껴졌는데 그 맛이 엄청 불쾌했다. 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집에서는 고급 우유 '아인슈타인'을 마시긴 했지만 마시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마시지 않았다.
나는 몸집도 작고 키도 작았다. 반에서 키로 줄을 세우면 항상 한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운동도 꽤 잘했고 공부도 곧잘 해서인지,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자 주변 친구들이 키가 쑥쑥 크면서 머리 하나 정도의 키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나. 결국 나는 위기감을 느껴 우유를 마셔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일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고 간혹 유통기한이 막바지에 다다른 우유가 추가로 배달되었는데 나는 그것도 마셔 하루에 2팩씩 먹은 적도 많았다. 그야말로 보약 먹듯 마셨다. 여전히 우유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싫었다.
그러다 냄새를 잠재울 수 있는 비법을 찾게 되었다. 우유를 마셔본 이들은 다 아는 비법이다. 마법의 갈색 가루, 네스퀵이나 제티를 섞어 마셨다. 종이팩 우유 한쪽을 열고 가루를 털어 넣는다. 종이팩을 닫고서 입구를 손가락 꽉 쥔 채로 우유를 뒤집어 마구 흔든다. 마법처럼 우유팩 안 거품들이 톡톡 터지면서 비릿한 향은 사라지고 달콤한 초코우유가 된다. 간혹 딸기맛 제티를 넣어 마시기도 했는데 뭐니 뭐니 해도 '원조'가 제일이다.
우유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나자 키가 10cm 정도 컸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땐 밥도 두 공기씩 먹고, 아무튼 뭐든 잘 먹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우유. 발음부터가 귀엽지 않은가.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유를 떠올리면 나는 우유 광고가 떠오른다. 푸른 초원 위 점박이 젖소와 아기 송아지를 떠올린다. 참 평화롭고 귀여운 장면이다. 우유는 모두가 알고 있듯 한자어다. 소 우(牛), 젖 유(乳). 소의 젖이다. 개의 젖은 새끼 강아지가 먹고 고양이의 젖은 새끼 고양이가 먹는다. 사람 젖은 아기가 먹는다. 이상하게 소의 젖은 사람이 먹는다. 아기 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먹는다. 물론 그 누구도 소의 젖을 물고 빠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종이팩에 담긴 뽀얀 소의 젖을 마신다.
뽀얀 우유는 어떻게 생산될까.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도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젖이 나온다. 일단 임신을 하기 위해서 강제로 수태를 시킨다. 자연 교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부분 인공수정으로 수태시킨다. 소가 도망가거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틀에 가둔다. 사람이 젖소의 질 안에 손을 집어넣고 손을 넣었다 빼는 동작을 반복하다가 미리 채취해둔 정액을 주입한다. 사실 말이 '수태'이지, 강간이나 다름없다.
젖소는 결국 임신하고 출산한다. 출산 후 몇 시간 이내로 송아지는 사람이 강제로 데려간다. 왜냐하면 젖소의 젖을 송아지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젖을 누가 마시냐고? 바로 우리가 마신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소는 송아지를 실은 트럭을 쫓아가 보지만 어림없다. 결국 몇 시간 만에 젖소와 아기 송아지는 생이별한다. 수컷 송아지는 젖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며칠 후 도축장으로 향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암컷 송아지는 엄마처럼 우유 기계가 된다. 젖소는 대형 착유 축사에 들어가 하루 2~3차례 착유된다. 이런 젖소가 건강할 리 없다. 젖에서 고름이 나오기도 하고 수명도 줄어든다. 자연 상태의 젖소의 평균 수명이 20년인데 반해 착유되는 젖소의 평균 수명은 4~8년이다.
나는 원래 '라테파'가 아니다 보니, 가끔 맛있는 팥빵이나 초콜릿과 같이 달콤한 후식과 곁들여 먹거나 추운 겨울 핫초코나 고구마라테를 먹는 정도로 우유를 소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마시지 않게 되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성분표의 '우유'를 찾아 그 제품은 소비하지 않는다. 더 이상 강간과 강제 착유에 내가 가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유를 맛있게 마시기 위해서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지켜야 하는 원칙이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우유의 생산 과정을 보지 않고 알지 않는 것이다. 우유 생산 과정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맛있게 마실수 없다. 진실이 가려질 때 비로소 우리는 우유를 '맛있게' 마실수 있다.
우유가 함유된 식품
- 각종 우유, 치즈, 버터, 일반 과자류, 빵류 등
- 과자와 빵은 몇 가지 특정 품목을 제외하곤 거의 우유나 동물성 첨가물이 함유되어 있다.
우유 대체품: 아몬드 브리즈, 귀리유, 두유 등
비건 두유 고르는 법
도미니언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