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금이라면, 경험은 소금이다

by Rumierumie

2011년 6월, 파리에서 8개월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워킹홀리데이 막판에 런던, 스페인, 이탈리아 등 여행하면서 모아뒀던 돈을 다 써버려서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는데도, 해외 살이 중에 한복판에서 굶어 죽지 않고 살아서 온 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숙제 하나를 해낸 것 같았다.


실험은 대성공이다!!

바게트, 버터, 프랑스에서 먹은 디저트로 10kg 가까이 찐 거대한 몸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처럼 껄껄거리면서 공항을 나섰다.




밥 한번 먹어야지?

한국에 돌아왔으니 밥 한번 같이 먹자고 친구들에게 하나둘씩 연락이 왔다. 파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풀어보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말끔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아차, 그렇지. 한국의 시간은 나 없이도 계속 흐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일상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공수업을 같이 듣던 동기들은 이미 사회 초년생이 되어 있거나, 취뽀에 목표를 두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내 몸 하나 나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보겠다고 떠났던 짧은 모험 이야기는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하나둘씩 털어놓는 사회 초년생들의 이야기 앞에서 갈수록 말 수가 줄어들었다.


친구들이 말해주는 압박 면접 준비, 국가고시 준비, 하다못해 이력서 사진 잘 찍어주는 사진관 이야기까지. 언어가 안 통해서 버벅거렸던 프랑스의 그 어떤 날보다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오갔다. 파리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몸으로 배웠던 것들은 한국에서 무용지물이 된 것 같았다. 모르는 세계, 겪어보지 않은 세상은 한국에도 가득했다.


다시 돌아온 한국은, 8개월 동안 미뤄둔 숙제가 잔뜩 쌓여있는 무서운 곳이 되어버렸다.




출발선보다 한 발 뒤에 섰다.

파리에서 조금은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감을 가졌었는데, 한국에 오고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주눅 들었다.

학교 복학 신청을 하면서, 내 뒤통수에 나를 정의하는 꼬리표가 다닥다닥 붙었다.

4학년 2학기 복학생

인턴 경험 없음

자격증 없음

낮에는 알바하고, 저녁에는 에펠 탑을 보면서 낭만을 즐기며,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고 개똥철학을 마구 날렸는데,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복학한 대학생에게 그런 여유는 부릴 수가 없었다.


대학교 전공 졸업 작품을 부랴부랴 준비하고, 졸업 전시회를 마칠 때쯤, 허겁지겁 입사지원서를 준비하고 취업 준비를 했다.




잡식성의 이력서

대기업부터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회사들까지 쭈욱 지원하려고 이력서를 썼다. 이력서에 나열된 경험과 경력은 중구난방이었다. 여태껏 조금이라도 관심 있으면 뛰어들어서 겪었던 경험들. 긁어모은 경험들을 주욱 훑어봤다. 시작의 즐거움에 너무 중독됐었나?


얼기설기 잡식으로 쌓은 경험을 짜 맞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살짝 부끄럽게 느껴졌다. 면접 준비를 하면 할수록, 친구들이 황금처럼 귀하게 썼던 시간을, 나는 흥청망청 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끌리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주워 먹었던 경험들이 갑자기 배탈을 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시간이 금이라면, 경험은 소금 같다.

서류 광탈, 면접 광탈, 멘탈이 탈탈탈 털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탄탄하게 스펙을 쌓았던 친구들의 노력이 그때서야 이해가 됐다. 아하, 이 친구들 시간을 금같이 썼구나. 왜 그때 충동적으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경험하겠다고 설쳤나.. 하고 후회했다.


어쩌다가 입사 지원 서류 과정을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 갈 때면, 잡식 같은 경험들을 보잘것없다고 비웃음 당할까 봐 항상 걱정했다.


첫 회사생활의 기회를 주었던 모바일 게임회사 이사님을 만난 것은 한창 비웃음에 대한 걱정과 부끄러움으로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작은 회의실, 청바지에 체크 셔츠를 입은 이사님. 면접을 진행하면서 이력서를 주욱 읽어 내려가더니, 중구난방이라고 생각했던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경험을 콕 짚어서 물어봤다. 여태까지 면접 볼 때마다, 잡식 같은 이력이 부끄러워서 덕지덕지 변명을 붙였던 경험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 날 면접에서는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별로 연관성은 없어 보이는 경력이지만, 재밌을 것 같았고, 직접 해보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경험해봤다고. 프랑스에 가보고 싶어서 워킹홀리데이로 갔고, 배우고 싶은 걸 다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잘 놀고 일하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별로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사님 입가가 들썩 올라갔다.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어서 훌쩍 떠났다는 말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는, 지원하는 직무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어도, 내가 가진 경험은 반드시 언젠가 어딘가에 필요한 경험이라고 했다.


살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할 수 있을까? 새로운 환경과 경험에 뛰어들어서 고생도 해보고, 재미있게 살려는 자세를 길러 왔다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 앞에서도 잡식 같은 경험들은 도움을 줄 거라고.


음식마다 간을 맞추려면 꼭 필요한 소금처럼, 부끄럽게 여길 뻔했던 프랑스에서의 내 경험들은 소금 같은 존재였었다.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그 후의 첫 직장

이사님과 면접을 본 다음 날, 마케팅 인턴으로 첫 출근을 했다.

마구잡이로 경험했던 일들도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을, 여러 번 되새기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일을 아주 잘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사회생활 레벨 제로에서 시작했던 인턴은 자신감에 경험이라는 소금을 뿌려 먹으면서 정사원이 됐었다.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경험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결과와는 별개로, 경험의 존재 유무는 살아가는 데에 소금처럼 귀하고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간을 맞추듯이 톡톡.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소중하게 얹어서 도전을 더욱 맛깔나게 이어나가는 것.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는 학생이 이 글을 읽는다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갑자기 자신이 출발선보다 한 발짝 뒤에 서있다고 걱정하지 말고, 워홀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을 소금 간 맞추듯이 앞으로 도전하는 일들에 뿌려가면서 자신감 있게 새로운 경험을 또 쌓아가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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