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떠났던 첫 번째 워킹홀리데이는 재미있었다.
유럽에 대한 환상과,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싶다는 욕망으로 결정했던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였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가 실험을 했다.
프랑스 워킹홀리데이의 컨셉?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무엇을 얻고 싶은지 어렴풋이 마음에 담아둔 목표가 있었다.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서 씩씩하게 생존해보는 것. 몸만 큰 어른이 아니라, 제 몸뚱이, 앞가림 모두 스스로 해낼 수 있는 머리가 큰 어른이 되는 것.
컨셉에 너무 충실했던 걸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다니다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고, 결국에는 커다랗게 변해서 못된 여왕과 맞서 싸우다가 꿈에서 깬다는 이야기다.
앨리스처럼 나도 첫 번째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한 지 8개월 만에 생애 최고의 몸무게를 달성하고 몸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리고 꿈을 꾸듯이 성취하기를 기대했던 결과의 절반도 달성하지 못한 채, 파리라는 환상에서 깨어나 한국에 돌아왔다.
앨리스는 꿈에서 깼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무거나 집어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노력만으로는 사건을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노오오력만으로는 부족했다.
겨우 슈퍼마켓에서 가격 흥정하고, 길 잃었을 때 도움 요청하는 수준의 프랑스어를 가지고 파리에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비자 있습니다.
일한 경험은 없지만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준비해온 자기소개를 반복했다. 대학교 전공과 가장 가까운 웹디자인 관련 분야의 면접은 모두 Non! 경험도 부족하고, 언어도 부족한 외국인을 ‘노오오력’만 가지고 채용해주는 회사는 프랑스에 없었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야금야금, 파리 생활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갉아먹었다. 대학생 새내기 때는 먹혔던 ‘노오오력’ 전략이 진짜 사회생활에서는 안 먹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3개월 정도 먹고 살만큼은 된다고 가져왔던 초기 자금이 빠르게 사라진 후였다.
원하는 분야만 고집할 게 아니구나, 느지막이 깨닫고 부랴부랴 구직활동 범위를 넓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급한 불을 껐다.
서빙 알바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에게 한인식당에서 일자리를 주신 분들이 있었다. 구인광고에는 빨리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고 했는데, 나의 경험이나 언어 능력을 금세 파악하시고, 적응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
서빙에 필요한 기초 회화도 가르쳐 주시고, 테이블 매너, 와인을 소개할 때 순서와 방법 등 식당에서 일하는데 필요한 것과 더불어 프랑스의 식사 문화까지 설명해 주셨다. 그분들 덕에 집세도 내고, 파리의 미술관에서 커피도 한잔씩 마실 수 있는 용돈도 벌었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까
그제야 파리가 Paris (빠-히-)로 보였다.
시야가 트였다. 미술관도 박물관도 거의 대부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평일마다 식당에서 점심 서빙을 마치고 퇴근길에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았다.
시야가 넓어지니까 마음의 공간도 넓어졌다. Meet up이나, 아는 사람의 하우스 파티에도 가보고, 점차 파리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들은 좋은 기회도 주었다. 파리에서 만나 친구가 된 사람들 덕분에, 돈을 받고 내 그림을 팔아보는 일러스트레이터도 되어보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웹디자인을 해서 용돈도 벌었다.
시작은 반이 아니라 전부다.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고 부랴부랴 여러 방면의 구직 활동을 했던 것이 파리에서의 워킹홀리데이의 진짜 시작이었다. 원래 계획하던 방면의 직업이 아니었지만,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았다.
어떤 일이던지 시작하면 그 뒤에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버렸더니,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만약 해외 생활에 도전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응원하는 마음으로 몇 가지 체크리스트를 나누고 싶다.
하나. 준비물 잘 챙기기, 경험담 잘 챙기기
내가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비자 승인을 받은 때는 워킹홀리데이 체결된 나라가 많지 않던 시기였다. 프랑스와 한국의 워킹홀리데이 체결이 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나라마다 요청하는 서류와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준비물을 잘 알아두는 것이 좋다.
내 경우에는 프랑스에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두는 것이 도움이 됐다. 외교부에서 주최한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설명회에 1차 신청자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했었다. 초대된 분들의 경험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초기 비용, 물가, 구직 환경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설명회에 다녀온 이후에, 비자 서류 작업, 초기 3개월 정도 일 없이도 살 수 있는 생활비용, 여행 가방, 등등 하나씩 준비물을 챙겼다. 마치 무인도에 꼭 필요한 것들을 챙기듯이.
둘. 지금 정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한국에서 파리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챙기기 가장 어려웠던 준비물은 두 가지였다.
어디서 살 건지
어떤 일을 할 건지
정해진 예산을 가지고 어떤 곳에서 살 수 있는지 현실적인 감이 없었다. 직업을 구하는 방법도 잘 몰랐다. monster.fr 같은 구직 웹사이트를 검색으로 찾았지만, 내가 가진 얕은 경험과 기술을 활용해서 아르바이트 수준의 직업을 구할만한 웹사이트는 찾기 어려웠다.
현지 정보가 부족하다면,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모험을 받아들이면 어떨까? 모든 것을 계획할 수는 없다. 직접 목적지에 도착해서 눈으로 확인한 후에 결정하는 방법도 있다. 워킹홀리데이 초반에 리서치 기간을 정하고, 호스텔에서 지내면서 직접 시장조사를 해보고, 면접도 지원해보고,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검색엔진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감이 생긴다.
셋. 언어는 모험의 문을 여는 열쇠다.
프랑스어는 아름답다. 프랑스어가 멋있어 보여서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선택했었다. 대학교에서는 프랑스어를 잊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프랑스어학과 1학년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는 언어 준비 오케이! 의기양양하게 준비물 리스트에 체크했었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를 준비하면 일상생활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다면 언어 준비에 더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들을 수 있는 만큼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말할 수 있는 만큼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 비용을 계획할 때, 언어 정복보다는 많이 보고 돌아다니는 것에 더 중점을 두기로 했었기 때문에, 어학원은 별도로 등록하지 않았다. 만약 워킹홀리데이 기간동안 언어도 함께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면 어학원에서 차근차근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넷. 제일 중요한 것은 용기다, Bon courage!!
샤르드골 공항의 출입국 보더(?)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내밀면서 파리에 온 이유를 짧은 불어로 설명했다. 어디에서 살지, 무슨 일을 하면서 살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으면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잘 모르는 공항직원에게 당당하게 나는 일도 하고, 인생도 즐기러 왔다고 했다.
Bon courage!
행운을 빈다면서 입국 통과 도장을 찍어줬다. 날짜가 찍힌 도장일 뿐인데, 파리에서 12개월 동안 행운만 가득하라고 승인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처음에 막 새로운 환경에 도착했을 때의 기대와 달리, 혼자서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서 적응하려고 하면 현실적인 시련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속상한 일이 생길 때는 플랫 메이트가 잠든 사이에 혼자 거실에서 불도 안 켜고 울면서 분을 삭였는데, 실컷 울고 마음이 풀려갈 때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용기가 난다고, 봉꾸라쥬! 하자고.
워킹홀리데이는 새로운 환경에서 혼자 살아보는, 일종의 실험이니까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할 거면 용기를 낼 때까지 내보고, 그래도 안되면 포기하고 집에 가도 된다고 마음을 달래보면 어떨까?
혼자서 해외 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건강, 몸 건강이니까, 혹시라도 혼자 숨죽여 속상한 마음을 품고 우는 사람들은 꼭,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외워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