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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디터 Jun 29. 2022

다 울었니? 이제 바벨을 들자.

생존 운동, 크로스핏

2022년 6월 29일. 서른여덟 번째 크로스핏을 다녀왔다. 이 문장을 쓰고 문득 달력을 뒤집어보니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어제로 딱 두 달이 되었다. 대박. "그래, 운동은 인내가 중요하지. 세 달 등록하는 게 한 달 등록하는 것보다 가성비 오지니까 바로 세 달 가자!" 다짐했다가 첫날 무료 체험이 끝나고 "하.. 한 달만요.."를 간신히 토해내던 내가 어느 새 두 달이나 다녔다니. 내가 다니는 박스(체육관을 '박스Box'라고 한다. 이 운동의 탄생국인 미국에서 창고를 체육관으로 삼았던 게 굳어진 것인데, 크로스핏에는 이런 재미있는 유래를 가진 용어들이 많다. 앞으로도 아는 대로 소개를 해볼 테니 기대하시오. 예비 피터들!)는 토요일까지 주 6일을 운영하는데 나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으니 꽤 성실하고 부지런한 피터인 셈! 




지옥을 지키는 문지기들처럼 서 있는 쇠 냄새 풍기는 바벨들과 덜덜 돌아가는 대형 선풍기 등등.





나는 갓은영 선생님의 수많은 명언 중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라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왠지 내가 꺼이꺼이 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주다가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토닥하고는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는 것만 같다. 나는 불행히도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회사를 다니며, 인간 관계에서 몇 번의 뼈아픈 교훈을 얻으며 나의 자아는 버려진 행성에 속도도 무게도 제각각인 운석들이 빠르게 날아와 친 탓에 여기저기 크레이터가 깊게 패인 모양이 되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한껏 쪼그라든 자아는 퇴근 이후에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에 눌려 더욱 기가 죽었다. 정신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처방법은 몸을 힘들게 하는 것이란 걸 터득한 나는 한동안 억지로라도 운동 후 나오는 엔돌핀으로 삶을 고양시키기 위해 달리기와 스피닝에 매달렸다. 확실히 유산소 운동으로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송골송골 땀을 흘리면 한 서너 시간 정도는 머릿속이 단순해졌다. 내 나름의 운동 마취였다.     







그러나 달리기도 한 2년, 스피닝도 6개월 정도 하고 나니 비슷한 패턴으로 동일하게 지속되는 유산소 운동의 단순함이 효력을 잃기 시작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성인 발레, 필라테스 등 여러 운동의 후기를 기웃거렸으나 그동안의 자가 데이터 축적으로 나는 동적이고 정신 없이 휘몰아치는(특히 중요) 운동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크로스핏으로 정해졌다. 다만 이 운동이 근력량이나 운동 경력 등의 다른 무엇도 아닌 '인싸력'이라는 게 최대 진입 장벽이었다. 나는 나를 알은 체하는 곳이면 잘 가던 편의점도 발길을 끊는 개복치 인간이기 때문에 친목이 심하다는 후기에 엄청 망설였다. 웃통을 벗은 근육몬들과 레깅스를 입은 멋진 여성 회원분들 사이에서 바벨이라는 것을 들고 엉거주춤할 나를 상상하니 심장이 뻐근해질 만큼 수줍어졌다. 




젝시믹스 380N 돈 벌어서 또 사러 간다. 기다려라, 쫄쫄이.


그러나 그 (내뇌망상의) 창피함만 뚫으면 나는 근육으로 가득 차오른 저 몸들처럼 될 수 있다! 아니, 애초에 내 목표는 근육이 아니라 '정신 없이 휘몰아쳐서 우울할 겨를이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시간 내 알 수 없는 몸짓으로 체력을 그야말로 폭발시킨 뒤 박스 바닥에 드러누워 헉헉대는 회원들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안 무섭다. 나는 소심한 게 아니라 차갑고 도도한 것이다' 같은 주문으로 나를 세뇌시키며 크로스핏 무료 체험을 신청하고 쭈뼛거리며 발을 디뎠다(크로스핏 박스의 대부분은 무료 체험 1회권이 있다. 등록했다가 도망치는 회원들의 후회를 막아주기 위한 관장님들의 암묵적 배려일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 


     

각 1분 씩 각 종목을 최대한 많이 히고, 총 개수를 기록하면 된다. 나의 총합은 146.



1시간의 운동을 힘겹게 따라간 뒤 그저 턱 안에 괴인 침을 흘리며 "세..세 달 말고..한 달만요"를 토해냈다. 그렇게 막막하기만 한 한 달이 지나, 어느덧 두 달째라니! 위의 표는 6월 29일 오늘의 와드다. WOD(workout of the day의 약자로 크로스핏 박스의 당일 운동 루틴을 뜻한다. 다수의 종목을 랜덤하게 짜거나 특정 WOD들 중 하나를 골라 하기 때문에 매일 바뀐다. 세세한 용어들도 나올 때마다 설명 예정!) HOPE 와드는 걸스 네임 또는 히어로 와드인 줄 알았는데 알아보니 소아암 등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운동하고 기부 등을 하는, '희망'을 바라는 와드였다. 이 일기를 쓰면서 뜻을 알게 되어 더욱 숙연해진다. 크로스핏 와드는 이렇게 의미 있고 역사가 흥미로운 와드가 많아서 인간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주 잠시라도 타인의 괴로움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게 드문 시대니까.



https://de.wikipedia.org/wiki/CrossFit


     

스트레칭 10분, 연습 30분, 본격 와드 20분, 약 1시간 가량 운동을 하고 나면 온 몸이 털린다. 고작 20분 내외로 운동하는데 쓰러져서 헐떡거린다는 게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자신의 체중만큼, 또는 그 배 이상의 무게를 달고 반복적으로 달린다고 생각해본다면 이 짧은 시간 내에 운동 강도가 절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내 체력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치다보면 어느 새 종료음이 울린다. 우울과 자기 부정으로 뒤엉켜 있던 내 머릿속 주파수도 함께 꺼진다. 아니, 새로 시작되는데 단순한 패턴을 그리게 된다. 마치 약한 약에 취한 것 같다. 


 

Why-women-are-choosing-CrossFit-as-the-perfect-lifestyle-to-achieve-their-goals



쓰고 보니 크로스핏 '뽕에 취한다'가 아니라 '뽕처럼 몽롱해진다' 같은데, 내게는 바벨 한 번 들고 우울감 하나 날려버리는 게 더 약효가 좋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크로스핏 두 달차, 이제는 웬만한 괴로운 일이 생기면 '하, 이따가 바벨 한 번 들자' 중얼거린다. 그렇게 바벨을 들고, 철봉에 매달리고 구르다 보면 죽을 것 같은 그 힘듦이 역설적으로 하루치 생존력을 늘린다. 한껏 구겨진 얼굴로 마구 눈물을 쏟아내던 아이였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오늘도 크로스핏이 만들어준 생존 근육으로 엉망진창이지만 용케 살아간다. 다 울었니? 이제 바벨을 들자. 내 나름의 갓은영식 기출 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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