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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Feb 11. 2021

깨달음: 다시, 자유

깨달음은 꽤 의외의 순간에 왔다. 인도에서는 얻은 게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결론 지었다. 아니, 어쩌면 어디나 삶은 똑같이 힘든거니까 그냥 지금 이대로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공항으로 오기 전 한국인 여행객이 모이는 식당으로 갔다. 나와 같은 비행기 시간인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인도에 온지 얼마 안된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6개월 째 인도를 여행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6 개월 동안 여행했다는 사람은 인도가 매력적이라서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그가 인도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진절머리 느꼈던 '사람' 때문이었다.


- 북쪽으로 가면 겨울이고 남쪽으로 가면 여름인 이런 나라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은지 한 도시마다 한 달은 머물렀어요. 사람들이랑 정이 들어서 떠나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는 인도 사람들이야 말로 '인간답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다움'이란 여유를 가지고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급하게 성장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제도로 생각하면 비합리적인 결정이지만 그 결정이 곧 인간을 위하는 것이 여유로운 자세라고 했다. 그런 여유에서 ‘인간다움’이 나온다고 했다.


- 인도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귀찮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쓰레기를 버리는 게 또 누군가에게 일거리를 주는 거거든요. 그럼 그 사람은 쓰레기를 주어다가 또 밥을 먹을 수 있는 돈을 벌잖아요. 이게 인간답게 사는 거지 뭐겠어요?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가 그렇게나 사랑스럽다는 사람과 마지막날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이 다가왔고 비행기 시간이 같았던 일행은 복잡한 인도 골목을 지나 메트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뚱뚱한 여자와 나와 고향이 같은 남자 한 명이었다. 뚱뚱한 여자는 메트로를 타고 가는 동안 육년을 사귀다 헤어진 남자 친구에 대해 얘기했다. 


- 걔가 날 엄청 좋아했었지. 내가 싫어서 헤어졌어요. 얼마나 매달리는지.


그리곤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 이렇게 뚱뚱한데 어떻게 그 남자가 나한테 매달렸는지 궁금한거죠?


결단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사실 그 얘기에 관심이 없었다.


- 일본 유학가서 살 찐거지 원래는 뼈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이 몸이 약해서 걱정하면서 한약을 먹였더니 살이 이렇게 찌더라고. 중간에 한 번 뺐는데 공부 스트레스가 심해서 다시 찌더라고. 어떻게 뺐는지도 가르쳐 줄까요?


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다시 주제가 다이어트가 됐는지 생각했다. 대답도 끝나기 전에 그 여자는 자신이 야채만 먹고 살을 뺐다고 했다. 힘들 땐 잠을 잤다고 했다. 듣고 있던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했다.


- 여기 흡연실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유학생 여자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도 몰랐다. 그 때 우리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얼굴이 하얀 남자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 여기서 좀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흡연실 있어요.


유학생 여자는 말끔하게 생긴 그 한국인을 보고 목소리 톤을 한층 높여 말했다.


- 어머, 한국인이셨구나. 안그래도 아까부터 말 걸고 싶었는데. 여행하고 돌아가시는 거에요?


- 아니요. 저는 뭄바이에서 유학 중이라 공부하다가 방학이라서 잠시 한국 돌아가는 거에요.


- 어머, 나도 일본에서 유학 중인데 유학생활 힘들죠? 인도는 햇빛 강해서 얼굴이 탈 텐데 어떻게 그렇게 흴 수가 있어요?


하얀 얼굴의 남자는 웃으며 원래 잘 타지 않는 다고 말했고 뭄바이 국제 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고향은 포항이고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다니다가 친척의 권유로 인도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앞으로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과 관련된 사업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담배를 다 피운 동향의 남자가 돌아왔고 우리는 비행기 탑승 시간이 되어 이동했다. 그 하얀 남자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말을 놓기로 했다.


- 넌 커서 뭐하고 싶어?


아주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부끄러웠다. 난 내가 뭘하고 싶은지 치열하게 고민을 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끊임없는 현재 속에서 살고 있었다. 미래는 나에게 불투명한 시간이었고 현재를 살기도 나에겐 숨찬 상태였다. 나는 나의 시간들을 내 외모와 내 몸에만 쏟고 있었던 것이다.


- 난 고민 중이야. 아마 전공에 맞춰서 직업 선택하지 않을까 싶어.


- 그 전공은 왜 선택했는데? 


나는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수능 점수를 받고 고민했다. 점수가 높은 대학의 낮은 과를 갈지 낮은 대학의 내가 원하는 과를 갈지가 고민이었다. 선생님들은 문과에서는 무조건 대학 이름을 보고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 당시 자유와 인권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내가 자유와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중학교때다.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수업 시간에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이 선생님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무시하냐" 며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거나 말 대답을 한다고 막대기로 머리를 툭툭 치기도 했다. 어깨를 막대기 끝으로 밀기도 했다. 그렇게 때리고 나서 종례 시간이 되면 그 학생을 불러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선생님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 태도가 굉장히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교권 약화로 선생님을 때리는 학생도 있고 휴대폰으로 찍어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내가 다니던 시절의 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날도 한 명의 희생양이 맞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 선생님, 걔 때리지 마세요. 때리면 신고 할거에요.


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나왔던 그 말은 아직도 나에게 후유증을 남긴 결과를 가져 왔다. 

키가 커서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에게 선생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단 세 걸음 만이었던 것 같다. 손에는 출석부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은 내 의자를 뒤로 당겨 날 넘어지게 했다. 난 바닥으로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다. 담임은 출석부와 주먹으로 내 머리와 얼굴을 사정 없이 때렸다. 내 머리쪽으로 그의 주먹이 날아왔을 때 나는 그 주먹에 흐르던 피를 보았다. 그걸 보고 있던 몇몇의 반 친구들은 무서워서 울었지만 아무도 말리진 못했다. 아프지 않았던 것 같다. 단지 이 부당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 신고해봐 이 새끼야, 신고해 봐. 네가 반장이라고 뭐 커다란 책임감 이런게 느껴지냐? 어?


맞는 동안 참 많은 욕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말만이 계속 내 귀에 울렸다. 종이 쳤고 그는 손의 피를 바지춤에 닦았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나를 한 번 노려 본 뒤 뒷문을 쾅 열고 나갔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가 뒤에서 빠르게 따라오면 무서워서 뒤로 걷거나 뒤를 쳐다보며 걸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한 폭력이었다. 그 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그 다음날 담임은 날 불렀다. 아이스크림도 출석부도 없었다. 


- 할 말 없어?


- 네


- 네가 뭘 잘못 한 지는 알아?


난 대답하지 않았다. 


-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너 같은 애 하나 학교에서 왕따 만들기 어렵지 않아. 학교에서는 내가 너보다 권력이 있어. 네가 뭐라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 같아다고 생각하지? 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널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반 애들이 널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거라는 거몰라? 다른 선생님들한테 너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면 네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난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중학생이었지만 나는 그게 교육자로서 할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본인은 그걸 모르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어차피 난 맞을 만큼 맞았는데 날 붙잡고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도 이해 할 수 없었다.


- 네 주위에 친구들이 많으니까 걔들이 영원히 네 편 같아? 앞으로 학교에서 소외 된다는 게 어떤 건지 경험하게 해줄까?


왕따가 되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 친구들이 나의 손을 쉽게 놓을 것 같지 않다는 믿음도 있었다. 모두들 그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난 그걸 말했고 다른 애들은 입 밖으로 그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 너 이 일 부모님한테 얘기 했어?


- 아니요.


- 왜 안했어?


왜냐하면, 나는 부끄러운 딸이 되기 싫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그 이중적인 감정이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분명 내가 잘못한 게 아니지만 부모님은 나의 행동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그 때까지 놀고 싶은 걸 참으면서 악착같이 공부하고 학급 반장, 학생 회장을 한 것은 모두 부모님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서였다. 엄마, 아빠는 두분 다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크게 신경을 못 써주는 데도 맏딸인 내가 동생까지 챙기며 공부도 잘하는 걸 대견해 하셨다. 난 그 힘으로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 경시 대회 준비반을 할 때 어떤 남자 애랑 싸운 적이 있었다. 키도 덩치도 나보다 작은 그 짱구를 닮은 애를 일방적으로 때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 다음 날, 그 아이의 엄마가 찾아와 학교가 떠나가도록 내 이름을 불렀다. 아줌마는 당장 나의 엄마를 학교로 오라고 했고 엄마는 점심시간을 내어 잠시 학교에 왔다. 엄마는 학교에 와서 날 보지 않고 아줌마에게 사과한 뒤 바로 일터로 돌아갔다. 그 날 저녁, 엄마는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엄마가 나에게 실망한 듯 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담임에게 그렇게 말한 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말썽을 부려 어른스럽지 못한 딸에게 신경을 쓰게 만드는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담임은 내가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내가 잘못을 했다고 인정하는 실마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 너 지금 나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부모님께 이 일 말씀드리고, 부모님께 정식으로 사과 받을 거야. 


그 때 내가 사과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담임이 부모님에게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기억이 다른 기억에 묻혀 밀려나기 전까지 부모님이 그 사실에 대해 언급할까봐 식사 시간마다 불안에 떨었다. 그 때부터였다. 나는 날 구속하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부모님때문에 내가 잘못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사과를 해야했던 것도, 학생이라서 담임의 수업 시간에 억지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던 것 모두가 날 숨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 모든 걸 참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는 부당함이 너무 많았고, 나는 이 모든 걸 내가 자유를 찾기 전까지는 견뎌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 구속에서 모든 걸 해방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전공이, 나의 배움이 나와 사회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얼굴이 하얀 남자 아이는 질문으로써 나에게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가르쳐주었다. 인도에서 그렇게 바랐던 내가 해야 할 것에 대해 깨우쳐 주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지금의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인도에 오기 전 처해 있었던 상황은 자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예전에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는 물리적 자유 박탈이었다면 지금은 아무도 살 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시선과 보여줌으로써 정신적 자유 박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만약 내가 내 몸을 '시선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면 오게 될 사회적 처벌이 날 두렵게 만들었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내 발이 한국에 닿는 그 순간부터 이 구속의 실체에 대해서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오랜 꿈이었던 자유를 하나씩 이루어나갈 것이다. 결국 인도에서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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