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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깨어있는 시간에 들어차는 생각들이 '나'를 꺼낸다. 그것은 진심이고, 거짓일 수 없다. 손발 오그라드는 감성에 사로잡힌 글을 끄적일 때도 있으나 순간의 진심들을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이유로 꺼내지 못한다면 진심은 다시 휘어져 먼 곳으로 던져질 뿐. 감정을 잘 정리해서 보여줘야 하는 직업이 작가라면 나는 아마 작가는 되지 못하겠지. 알고 있다. 그러니 정리되지 않는 순간들을 끄적이며 백 지위에 까만 칠을 한다. 이게 뭔 소리야, 그래. 그러니 당신 인생이 그런 것이지. 그런 것이야 ㅡ라고 말한다면 맞소. 그렇소. 이게 내 인생이오. 하고 말 일. 이라며 회피 아닌 회피를 할 것이다. 물론 나로선 회피가 아니라 직면한 것이겠지만. 아무도 그렇게 여기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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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망가지는 게 두려울 때마다 책장을 넘겼다. 아니 망가지는 순간마다 였던 것 같다. 나와는 달리 잘 정돈된 문장으로 나아가는 것만 같은 사람들.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바스라지는 인간. 곧고 반듯하고만 싶었던 내가 바스러져가는 것을 생생히 느낄 때마다 도피처를 찾았다. 지난 몇 년이 그러했다. 나는 지금보다 아래.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는 냉담한 바닥으로는 꺼져 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름의 발버둥을 친 것이다. 비록 나의 무력과 우울의 호소는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이렇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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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어느 여름은 가혹했다.
어느 여름. 사방의 창을 모두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어컨이 없는 집안은 아무 미동 없이 대기의 열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한낮의 태양은 뜨겁게 타오르기만 하고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없는 날씨가 야속하기만 한 아름다운 날이었다. 집안은 등을 켜지 않아도 환히 밝았고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고 열은 계속해서 올랐다. 정지된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거실 바닥에 맥없이 눌어붙어버릴 듯했고 뜨거운 공기를 어떤 식으로든 가르려 해 보았지만 밀도 높은 열은 흩어질 줄 모르고 그 안에서 우린 힘겨운 숨을 뱉어야만 했다. 그 여름날을 나는 기억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다른 온도의 조금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아주 잠깐 얼굴을 스쳤을 때에 나는 내가 완전한 현실에 속한 하나의 인간임을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너는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증발되지 못해. 너는 이 자연에게서 한 발자욱도 멀어지지 못해. 너는 잠시 잠깐 불어오는 바람에도 감사해야만 해. 자연이 내게. 여름이 내게 걸어오는 듯한 말들에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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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동을 하지. 한낱 먼지가 고요 속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건 착각일 수밖에 없어. 도대체 누가 고요 속에 머무를 수가 있지? 네 조용한 얼굴이 오늘도 시끄럽구나. 자연의 것으로 치부된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은 한순간도 고요를 지닐 순 없는데 너는 너무도 큰 꿈을 갖고 있어. 고요에 깃든 평화를 바란다면 네 내부에서 울리는 그 시끄러운 소리들을 먼저 잠재워 야만 할 거야. 네 조용한 얼굴이 어디로 흐를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네가 바라는 고요가. 그것이 쉽게 찾아오리란 생각은 버리길.
자아. 너는 선풍기를 틀어야 할 거야. 가진 게 부채라면 손이라면 그것뿐이라면 그것으로도 좋아. 남들보다 더. 조금 더 움직여야 하지. 멈춰있어선 안돼. 미동도 없는 대기? 네게 보이지 않는 세상이 그렇게 한가 할리는 없어. 정체되었다 여겨지는 시간에도 분주하기만 해. 여름은 짧고, 곧 선선한 바람이 창으로 스미는 계절이 되면 너는 알게 되겠지. 분주한 움직임의 결과가 어땠는지를. 여름은 녹아들기 위해 있는 건가. 뜨거워지기 위해 있는 건가. 동시에 존재하는 개념들에 의문을 품게 되겠지만 아무도 알지 못해. 그것들의 의미를. 자연의 인간의 의미를 설명하려 하다간 더 많은 소리들이 너를 괴롭힐 걸. 네 내부에서 울리는 그 말들을 하나하나 챙기려 하다간 네 그 조용한 얼굴이 점점 흐려지는 것만을 느끼게 될 테지. 자아. 이제 여름이 시작되었을 뿐이야. 너는 벌써부터 숨쉬기가 버겁다며 징징거리고 있어. 자아. 녹아들기를 그만 멈추고 좀 더 뜨거운 인간이 되어야만 해. 자아. 여름의 해가 너를 비추고 있잖아. 자아.
여름, 여름. 다만 아름답다고 생각해봐.
- 어느 지난여름
어느 여름에 쓴 글을 주워 올린다.
그 여름은 분명 가혹했다. 그리고 그 여름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도 사실.
항상 이쪽과 저쪽 두 갈래다.
나는 고통과 실재와 존재 그리고 이상 또 자연…. 다시 떠오른 잡념들을 잠재워야 한다. 곧 여름이 오고. 집엔 여전히 에어컨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