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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만 쓰는 건 아닙니다.

2025 춘천마라톤 후기

by 러너인

네 번째 춘천마라톤, 출발선에 섰다. 5, 4, 3, 2, 1. B조 출발. 5분 만에 마감된 치열한 춘천마라톤. 참가자 2만 명 중 풀코스 주자만 1.1만 명. 이 힘든 운동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까. 출발선에 서서 주로를 가득 메운 우리를 바라본다. 각자 나름의 이유로 주로에 선 사람들. 시원한 싱글렛에 각양각색의 러너들.

올해 3월 책을 냈다. 어느 분이 말했다. "좋은 책인데 너무 안 알려졌네요. 출간은 끝이 아닌 시작이니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알리시면 됩니다." 책을 내고 멈추지 않았다. 계속 쉬지 않고 sns에서 책을 알리고 책 비하인드 스토리를 브런치북으로 발행했다.


매일 글쓰기 100일, 브런치 글쓰기 등 글에 집중한만큼 이쪽에서는 성과가 나왔다. 용인시 휴먼북 등록, 도서관 운영위원회 위촉, 도서관 특강 섭외, 브런치 에세이 부문 크리에이터 선정, 경기도인재개발원 인문학 강의 섭외까지.


어느 분이 물었다. "요즘 안 뛰세요?" "아니요. 뛰어요." "요즘 거의 러닝기록은 안 올리셔서 궁금했어요." "저 매주 러닝클래스에서 세 번 훈련 계속하고 있어요. 요즘 글쓰기에 진심이고 제 책이랑 오디오북 출시도 sns로 알려야 해서 예전처럼 매번 훈련후기 올리기가 어렵더라고요."


문제는 달리기였다. 화목토 러닝 클래스를 다니고 있지만 평일 조깅 마일리지가 줄고 달리기에 진심을 다 쏟기 힘든 상황이 많아졌다. 가을 마라톤 대비반 특성상 주말마다 장거리 숙제가 있고 계속 몸을 끌어올리는 고강도 훈련이 이어졌다. 일하고 틈틈이 글 쓰고 홍보하느라 수업에 겨우 와서 주어진 훈련을 소화하기도 버거웠다.


달리기 책을 쓴 원죄가 있어서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 그게 나였다. 달려야 하는 수많은 이유 중 이렇게 강렬난 동기부여가 있을까? 책 내고 게을러졌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늦게 잠들고 새벽에 일어나 매일 500자 이상 글을 써서 올리는 100일 글쓰기에 몰입하며 수면부족으로 새벽에 더 일찍 일어나 달리는 건 쉽지 않았다. 밤 12시가 넘어 잠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글을 쓰며 일하고 저녁엔 러닝클래스에서 고강도 훈련을 해도 작년보다 마일리지가 현저히 줄었다.


풀코스 3시간 30분 목표조에서 훈련했다. 조금만 목표 페이스가 올라가는 날엔 따라가기가 버거워 멈출 때도 있었고, 조금 더 느린 조로 피하기도 했다. 주말 장거리 주에서 목표 거리를 채우지 못하기도 했고 자신감은 더 떨어졌다. 훈련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정신이 들었다. 조금씩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코치님이 말했다. "승우님, 예전보다 많이 가벼워지셨어요. 그래도 더 가벼워져야 돼." 목표 330은 개인최고기록은 아니지만, 지금의 몸과 적은 마일리지로는 어려웠다. 마지막 훈련 때 10km를 달렸는데 나쁘지 않았다. '혹시... 이러다가 330 하는 거 아닌가?'


10월 중순 오디오북이 나왔다. 요조 님의 목소리로 다시 쓴 책. 대회 당일 새벽 춘천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이어폰을 끼고 내 오디오북을 틀었다. 편안하게 한참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허겁지겁 짐을 맡기고 러닝클래스 모임장소로 향했다.. 코치님, 매니저님, 함께 훈련한 분들을 만나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했다. 올해가 연진코치님이 춘천마라톤에서 여성부 우승을 한 지 10년째 되는 해. 의미 있는 날이었다. 부끄럽지만 않게 달리기로 했다.


드디어 출발. 출발 전에 다녀왔지만 화장실 생각이 났다. 책에 쓴 에피소드 '화장실이냐, 달리기냐'의 악몽이 스쳤지만, 그땐 big 이번엔 small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화장실이 보여도 문제 안 보여도 문제다. 보이면 더 가고 싶어 지고 안 보이면 혹시 사고가 생길까 신경 쓰이니까. 첫 번째 급수대에서 잠시 목을 축였다. 화장실 생각이 조금 옅어졌다.


9km에서 첫 에너지젤을 먹었다. 그쯤일까. 땀이 어느 정도 흐르니 화장실 마음이 사라졌다. 앞에 딱 5분 페이스로 30km 정도까지 갈 계획이라는 몇 분이 있어서 잠시 같이 달렸다. 4분 후반대로 달리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5분을 넘어가기도 한다. 시계를 보지 않기로 했다. 달리다 보면 시간이 안 가니 굳이 계속 시계를 보기보단 몸에 집중하는 게 나으니까.


60년생 선배님이 날씬한 몸매로 앞에서 달리고 계신다. 14년 뒤 나도 저 선배님처럼 춘천마라톤에서 건강하게 풀코스에 도전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무념무상 뛰다 보니 15km가 지나고 곧 하프 구간이 다가왔다. 반가운 연진코치님, 매니저님, 희준 님. 마법의 물약을 받았다. 따뜻한 바나나 런클럽 응원을 받으며 다시 힘을 낸다. 항상 이 구간의 응원은 가슴이 뜨겁다. 오버페이스 주의 구간. 사람들과의 하이파이브, 여기서 응원단을 지나 반환점을 도는 구간에서 항상 눈물이 찔끔 난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벅참, 함성, 발소리, 누군가의 이름.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응원을 받은 적이 있을까? 감동을 오래 간직하긴 어렵다. 하프 반환점을 돌고 급수대를 지나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21km를 지나면 어느새 30km가 된다. 벤자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지만, 주로의 시계는 어느 거리를 넘으면 빠르게 간다. 중간에 조금 밀리기도 했지만 나름 나쁘지 않게 달리고 있다. 30km가 지나니 오히려 몸이 나아졌다. 조금 속도를 올려서 달려본다.


에너지젤은 9의 배수 거리마다 먹었다. 9, 18, 27, 36km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달리기 시작할 때 앞으로 3시간 넘게 어떻게 뛰나 하지만, 달리기 시작하면 거짓말처럼 뛰어진다. 힘들다는 생각에 빠지면 다리가 무거워진다. 달리는 팔의 리듬을 생각하는 게 낫다. 어차피 중간에 멈출 건 아니니, 어차피 뛰어서 완주해야 하는 인생이니까. 어차피 완주해야 하는 마라톤이니까.


나는 오늘 나를 완주하라고 나를 이곳 춘천에 보냈다. 내가 책에 쓴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 모든 한계에 도전하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달리기 자체가 목표이고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달리기가 목표여도 좋다. 대회장에서 만큼은. 오늘은 최선을 다해 뛰기로 했다. 작가의 시선이 아닌 러너로서 나를 바라보기로 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달리기로 했다.


또 연진코치님을 뵈었다. "캐로로 중사 파이팅!" 화려한 모자와 붉은 레깅스. 이 레깅스는 책에 썼던 '남자가 레깅스라니'편에 나오는 그 레깅스다. 레깅스 크루 이벤트에서 1등 상품으로 받은 그 행운의 레깅스. 전사의 마음이 필요한 날 나는 이 레깅스를 입는다. 삶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오늘은 뜨겁게 달리고 싶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39km를 지나 서윤코치님의 응원을 만났다. 이제 3km도 남지 않았다. 주로엔 여러 가지 이유로 걷는 사람들도 보인다. 걷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걷지 않는다. 이렇게 오래 힘들게 달려왔는데 그 조금을 못 참으면 얼마나 후회될지 아니까. 멈추는 것도 습관이고 계속 달리는 것도 습관이니까.


어느새 40km가 지났다. 페이스를 끌어올린다. 4분 25초 페이스. 계속 빌드업. 기록은 생각하지 않는다. 길에서 누군가 외친다. "이제 330 들어온다." 330? 진짜? 나도 오늘 3시간 30분 언더 할 수 있는 걸까. 가슴이 뛴다. 올해 훈련하면서 한 번도 자신 있게 올해 330을 할 수 있다고 믿지 못했다. 되든 안 되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남은 거리에 온 힘을 다해 전력으로 달린다.


저 멀리 네모 결승선 부스가 보인다. 저절로 두 팔을 날개처럼 활짝 벌리고 웃으며 달려간다. 승우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어느새 결승선을 밟았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나 애써준 내가 기특해서. 올해 달리기 책을 내고 오디오북을 내기 위해 쉼 없이 굴하지 않고 달려온 내가 대견해서. 오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준 나와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나를 훈련시켜 주신 코치님과 매니저님. 러너 친구들... 그리고 당신.


시계를 본다. 3시간 29분 33초. 웃음이 터졌다. 이게 된다고? 마지막 4km를 빌드업으로 달리지 않았다면, 마지막 200미터를 끝까지 질주하지 않았다면 어려웠다. 끝까지 나를 믿고 달렸다.


될 일은 된다. 달리기와 책이 목표가 아닌 플랫폼임을, 내 삶과 가능성의 문을 여는 출발선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제 또 새로운 나와 만날 시간이다.

5, 4, 3, 2, 1... 출발!


P.S. 글벗님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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