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시지프스 신화
밤 12시, 마법은 끝났다.
이제는 새벽마다 바지가 당기는 불편함은 없다. 이제 몸도 포기한 걸까. 이 몸을 입은 사람이 더 이상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 눈을 뜨자마자 이런 생각을 한다. 금욕은 육체의 욕망이 아닌 영혼의 일이다. 영혼으로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금욕이라는 단어는 틀렸다. 이는 육체의 즐거움을 금하는 일이 아닌 영혼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이다. 너무 좋은데 더 많이 더 오래 하지 못해서 원통하고 분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 요즘 금욕한다고 말하니 그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아니, 그 좋은 걸 왜 안 하세요?”
그땐 미처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선생님, 정말 그렇게 좋으셨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자. 눈으로 벗은 몸을 보고 손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 정말 좋았던가 말이다. 담배가 맛있다는 흡연자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사실 담배는 맛이 없다. 그렇게 맛있다면 왜 흡연자조차 자신의 몸에 밴 담배냄새를 지독히 싫어하고 꽁초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않는가.
담배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중독자의 몸에 담배는 맛있다는 환상을 심는다. 게다가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강력한 환상까지 불어넣는다. 담배는 스트레스를 줄여주지 않는다. 원래 없었던 흡연이라는 스트레스를 더한 후 금단현상을 해소하며 착각할 뿐이다. 자유롭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스스로 자신의 몸에 1인용 담배 감옥을 만든 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을 때마다 담배라는 열쇠로 감옥에서 들락날락하는 것처럼. 하지만 감옥은 허상이다. 자신이 만든 중독 습관이 뿐이다.
성적 탐닉이 그렇게 좋다면, 클라이맥스 이후에도 계속 좋거나 최소한 유지라도 되어야 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허무하다. 당신도 알지 않은가. 모든 동물은 사정 후 우울하다는 유명한 말처럼, 성적인 탐닉의 끝은 언제나 우울하다. 섹스라는 열쇠로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들락날락하며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하냐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데렐라 동화에서 재투성이 신데렐라는 마법의 힘으로 반짝이는 호박마차를 타고 생쥐 시종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한 무도회장에 도착한다. 그날의 주인공처럼 왕자의 파트너가 되어 꿈결같이 춤추며 그윽한 눈빛을 나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시간은 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서 한 순간 끝난다. 밤이 사정하고 사방으로 어둠이 쏟아진다. 진실의 시간이 찾아온다. 무도회장은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찍찍 소리 내며 돌아다니는 거대한 방사능 쥐들의 실루엣만 차가운 들판 풀숲 너머로 나타난다. 재투성이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 두 손으로 자신의 몸 위아래를 가리며 숨으려 달려가는 자신만이 보일 뿐. 선악과를 따먹고 벗은 자신이 부끄러워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처럼.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다시 생각해 보라. ‘이렇게 좋은데 왜 안 해요?’ 진짜 좋은 게 맞나? 솔직해지자. 전희와 1초의 사정의 순간, 정작 즐거움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고작 몇 분에 불과하다.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그날의 클라이맥스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디지털 낭인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0과 1 사이에서 하악하악 밤 12시를 향해 달려가는 그 모습. 무엇이 보이는가. 사실 그는 진짜 내가 아니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붉어진 얼굴로 부르르 떨며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닦으며 후회하는 모습은 결코 ‘이렇게 좋은 데’와는 거리가 멀다. 허공에 사정하고 침울해하는 시간이 언제나 찾아온다면 그 행위가 어떻게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성은 창조의 원천이고 생명을 낳는 일이다. 나는 금욕이 아닌 창조를 욕망한다. 밤 12시가 되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초라한 욕망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환하게 빛나는 창조의 더 큰 욕망이 숨 쉬고 있다. 우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종을 치면, 아니 누군가 종을 치기만을 기다리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종소리가 들리면 헐떡거리며 달려가야 하는 비참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도파민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창조자다.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부어야 하는, 매일 자신보다 더 큰 돌을 언덕으로 굴리고 또다시 영원히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가 아니다. 정상까지 겨우 돌을 올려놓는 그 순간에만 1초 짜릿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시지프스 따위가 아니다. 돌을 굴릴지 말지를 정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다. 도파민 돌 굴리기는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