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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단뱀클럽 Nov 28. 2017

그는 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다

그는 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다. 아침 6시, 알람이 한번 울린다. 더 이상의 알람은 없다. 그는 늘 단번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침대 밑에 가지런히 벗어 둔 실내화에 발을 얹는다. 냉장고로 걸어가 문을 열고 맨 아래 칸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생수통을 꺼낸다. 절대 생수통 그대로 물을 마시는 법은 없다. 반드시 물을 마실 때만 사용하는 초록색 머그잔을 꺼내 들어 반 정도만 따르고, 두 번에 걸쳐 천천히 마신다. 


그는 샤워한다. 구석구석을 순서대로 오랫동안 깨끗이 씻는다. 샤워시간은 25분이다.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스킨과 로션을 바른다. 어제 반듯하게 다려서 문고리에 걸어둔 목요일의 셔츠를 입는다. 주방으로 나와 라디오를 켜고 뉴스를 듣는다. 비가 온다고 한다. 매일 밤 자기 전 일기예보를 미리 확인하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제 미리 가방에 3단 우산을 넣어두었다. 


선반 위 흰색 그릇을 집어 우유 200mL를 붓는다. 통곡물로만 만든 시리얼 400g만 정확히 말아 먹는다. 설거지를 마친 후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해 제자리에 두고, 현관으로 걸어가 어제 잘 닦아놓은 갈색 구두를 신는다. 신을 때는 반드시 구두칼을 이용한다. 나오면서 이어폰을 오른쪽부터 꼽고 어제에 이은 다음 파트의 영어 회화를 듣는다. 10분 뒤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도착하기까지 걸음 수는 어제와 똑같다. 그는 환승이 가장 빠른 5-1 플랫폼은 사람이 너무 많기에 합리적이라고 규정한 5-3에 서서 늘 지하철을 기다린다. 


잠깐 무엇을 찾는지 두리번거린다. 그녀를 찾기 위해서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운 좋으면 그 이상 그녀를 만난다. 머리를 묶었다가, 풀었다가, 올렸다가, 내렸다가, 염색도 했다가, 큰 귀고리를 했다가, 하지 않았다가, 가방을 옆으로 메고, 뒤로, 혹은 앞으로 매고, 또 가방이 없다가, 형형색색의 면바지, 제멋대로 찢어진 청바지, 긴 치마, 핫팬츠를 번갈아 입었다가 킬힐, 샌들, 페인트 물감이 잔뜩 묻은 컨버스 운동화를 번갈아 신는 신기한 여자를 마주친다. 그는 매번 그녀의 차림에서 느껴지는 변화와 무질서에 대해 호기심과 묘한 쾌감을 얻는다. 


여자는 그보다 먼저 내릴 때가 많고, 나중에 내릴 때도 있다. 여느 때처럼 30분이 지났고, 회사 근처 역에 내렸다. 처음이다. 오늘은 그녀도 함께 내린다. 그는 잠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를 규정짓는 게 의미 없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킨다. 역을 나오니 비가 온다. 그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낸다. 그런데 우산이 펴지지 않는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며칠 전에도 멀쩡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펴려고 노력해보지만, 우산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불안해진다.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비가 세차게 오고 출근 시간이 다가온다. 


그때 누가 그를 밖으로 밀친다. 돌아보니 그녀다.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어서 뛰라고 손짓한다. 그는 잠깐 멈칫하지만 이내 무언가에 홀린 듯 빗속을 뛰기 시작한다. 젖는 머리도, 옷도, 구두에 들어오는 물도 너무 익숙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점점 편안함을 느낀다. 신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세찬 빗속을 춤추듯 뛴다. 회사가 가까워져 온다. 회사 앞 벤치에서 비를 맞으며 누워있는 걸인이 술이 덜 깬 듯한 목소리로 옛날 노래를 흥얼대고 있다. 흠뻑 젖은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가 어느새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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