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년이었다. 언제부터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첫 번째 기억은 이상한 모양이 빛이 비치면서 다른 모양이 되던 모습이었다. 그 기억을 할 때는 그것이 계단이었을 거라고 상상하지만, 과연 백색의 공간, 그것이 꿈이었을지 실제로 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나의 이 인생 첫 번째 기억이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섯 살 때, 친구에게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무시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는 결국 글자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놀면서 조금만 불리해지면 글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것을 내세워 화풀이를 했다. 다섯 살 때부터는 이런저런 기억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기억나는 일을 아무거나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 나올 법한 이야기는 모두 9살 이후에 있었던 일들일 것이다. 그때는 동네에 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였다. 나 같은 아이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은 일을 해야 한다고 반대했지만 나라에서 그런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좋았지만 무엇보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책은 학교에서 나누어주었고, 학교 책상에 두고 하교하였다. 두 시에 끝나서 집에 오면 다른 아이들은 집에서 점심부터 먹었겠지만 나는 그대로 숲으로 가야 했다. 사실, 나뭇가지를 주우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흥얼거리다 보면 단순히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은 것보다 훨씬 많은 나뭇가지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도 학교에 다니는 것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화장실에서 어느 날 교실까지 냄새가 엄청났다던가, 청소하다가 유리창이 깨졌다거나 하는 것들 뿐이다.
그러다 졸업할 때가 되어 건물을 2층짜리로 새로 짓는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여자 아이들이 간혹 뛰어다니면서 속옷을 보여줄 때도 있었고 남자아이들도 갑자기 더우면 웃통을 벗었다. 지금으로 보면 중학교 2학년 정도 될 만한 나이의 아이들까지 같이 다니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다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모두 운동장에 천막을 쳐 놓고 그곳에서 수업을 하니 싱숭생숭한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음악 수업은 없었다. 읍내에 중학교를 다니기로 한 아이들은 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산수 공부와 똑같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중학교 갈 돈이 없었기에 똑같이 두 시가 되면 집에 와서 부모님이 밭에 나가신 걸 확인하고 바로 숲으로 갔다. 그때쯤에는 조그마한 토끼나 여우 같은 것은 잡아서 숲에서 구워 먹기도 하고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한 번은 구워 먹고 밤에 열이 많이 나서 이틀을 내리 누워 있다가 어머니께 토끼를 구워 먹은 일을 이야기했는데 손질을 하지 않고 먹어서 그런 거라고, 고기에 눈이 뒤집혀서 부모님에게 말도 하지 않고 혼자 먹었다고 호되게 맞았다. 다른 아이들은 형제가 많았지만 우리 집은 나 혼자였다. 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가 화를 냈고 어머니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기 때문에 왜 그런지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열 살이 넘어서 다행이지, 아마 동생이 있었다면 몰래 같이 먹고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때부터는 동물을 잡으면 손질하고 씻어서 집에 갖다 놓았다. 보관할 수 있는 곳도 없고, 늘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날 잡은 것은 그날 바로 굽거나 쪄서 먹었다. 쌀도 부족해서 고기로만 배를 채우는 날도 많았다. 겨울에는 고라니를 잡아먹기도 했다.
열여덟 살에는 아버지를 따라 도시로 갔다. 트럭을 타고 읍내에 갔다가 기차를 탔는데, 처음 타 본 트럭은 몇 시간을 탔는지 몰라도 내려서 바로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바로 구석으로 가서 토하고 말았다. 그것도 읍내를 처음 가 보았는데도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건물을 보아서 그 뒤로 뛰어가서 망정이지 길 한 복판에서 토하면 벌금을 낸다고 했다.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라는데, 어차피 비가 오면 씻겨 갈 텐데 뭐 하러 그렇게 까지 하나,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돈을 가져가려고 만든 규칙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도착해서 처음 보는 음식이 많았다. 아버지가 투자금이라는 걸 받았다면서 길거리에서 음식 몇 가지를 사 오셨다. 구석에 서서 다 먹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읍내에서도 다시 삼십 분쯤 걸어가니 기차역이 있었다. 그리 발달한 곳이 아니라서 기찻길이 읍내 한가운데까지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정도만 해도 내가 살던 마을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에 처음 보는 것들인데 이게 발전한 게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기차를 타고는 한 시간 정도만 가서 내렸다. 기차는 트럭보다 훨씬 좋았다. 내부도 깔끔하고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도 많이 있는 데다 멀미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사람이 많아서인지 조선말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집에서는 조선말도 하기는 하지만 밖에서는 일본어만 해 보아서 어색했다.
"조선말도 일본어처럼 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에 맞춰주는 게 예의니까."
아버지가 당부하셨지만, 아직까지도 조선말은 가족끼리만 하는 것 같은 고정관념이 있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웅얼웅얼하며 조선말로 말하는 가상의 대화를 하다 보니 내려야 하는 곳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려고 하기에 아버지를 보니 아버지도 짐을 메고 계셨다. 다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내렸다.
역은 정말 사람들이 물처럼 흘렀다. 사람들이 떼로 이리 한 번에 지나갔다 저리 한 번에 지나갔다 했다. 횡단보도에도 사람들이 잔뜩 서 있다가 신호가 되면 우르르 건너갔다. 읍내에서도 못 보던 인파가 하루 종일 이리저리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은 처음에는 보고만 있어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심지어 신호등은 읍내에도 있었지만 꺼져 있었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신호등만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인쇄하는 가게에서 일을 하셨다. 일본인과 함께 일을 한다고 했다. 실제 그곳은 함께 일하는 일본인이 일본에서 구해온 돈으로 처음 운영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을 갚고 나면 그 일본인과 아버지가 나누어 가지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학교 끝나면 일을 돕기로 했다.
학교에 다니는 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았었고, 집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돈이 있으면 다닐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는 중학교 입학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그냥 때려치우라고 하셨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일본인의 아들이 고등학생이어서 인쇄소에서 틈틈이 일을 가르쳐 주면서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도 도와주기로 했다.
아버지와 같이 일하는 일본인은 원래는 아버지와 알지 못하지만, 그분의 형이 아버지의 신세를 진 일이 있다고 했다. 그 시골까지 와서 신세 질 일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믿을 만하다고 신신당부한 모양이었다. 그 일본인은 5년 뒤 투자금을 다 갚고 나자, 아버지가 여기저기 단체에 인쇄를 독점계약을 따온 것을 핑계로 수익에서 20%를 유보금으로 놔둔 것을 제외하고 60%를 우리 집에서 가져가고 자기는 40%만 가져갔다. 사실, 아버지가 술 마시면서 사람 상대하는 걸 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조선말로 영업을 하고 어떤 때는 일본어로 영업을 하는데, 농담으로 비꼬기 위해 조선말로 이상한 발음으로 웃으면서 말할 때도 있고 일본어를 천천히 말하면서 약을 올릴 때도 있는 등 언어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 데서는 나 역시 한두 잔 술을 얻어 마셨지만 아직 어리다고 많이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중학교에 가고 애들끼리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고 하긴 했지만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끝나면 인쇄 일을 도와줘야 했고 인쇄 때문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우리 학교에서도 인쇄를 우리 가게에 맡기기로 하면서 아이들도 나를 피하는 눈치가 약간 보였다. 나는 이런 식이라면 인쇄업을 이어받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반면 아버지처럼 영업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인쇄감이 오면 그것을 글자수를 세어서 일정한 글자수마다 빗금을 친다. 그러면 빗금과 빗금 사이가 인쇄기에서 한 줄이 된다. 인쇄할 폭이 좁을 때도 있고 넓을 때도 있어서 그 폭에 따라 한 줄의 길이가 결정된다. 그렇게 표시를 다 한 종이를 받으면 활자를 꽂아 넣는다. 이것이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는 부분인데 혹여 하나라도 빗금을 잘못 친 것이 있으면 그 뒤로도 모두 틀린 만큼 빗금을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된다. 그렇게 다 꽂고 나면 일본인 형이 맞게 했는지 죽 둘러본다. 일본어인 경우에는 내가 꽂고 일본인 형이 확인하지만 조선어인 경우에는 일본인 형이 꽂고 내가 확인한다. 상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꽂는 것보다 오래 걸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이 없으면 기계를 작동시켜서 롤러로 잉크를 묻히고 종이가 지나가면서 찍게 되는데, 우리 집은 보통 신문지처럼 양면으로 된 커다란 한 장을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자를 일은 별로 없지만 접는 것이 요령이 많이 필요했다.
어느 날, 일을 하는데 누가 창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치곤 하는 여자애였다. 처음에 몇 번 마주쳐서 인사했을 때는 신경질 부리듯이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더니 더 지나니까 자기가 먼저 손을 들어서 인사하고는 했다. 그래도 말을 걸면 도망가곤 했는데 오늘은 학교 끝나는 길에 우리 가게에 들른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기계를 돌렸다. 종이가 잘리면서 쌓여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창가로 눈을 돌리니 그 여자애가 아직도 서서 멍하게 인쇄기를 보다가 내가 자기 쪽으로 보고 있는 것을 알고서는 다시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손만 흔들고 나니 다시 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고등학생 형이
"쟤가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라고 말했다. 귀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별로 안 좋아해요. 처음에도 얼마나 짜증만 부리던지."
"잘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이제는 자꾸 보니까 괜찮아 보여서 여기까지 왔을 거고."
"잘 알만큼 보지도 못했어요. 인쇄소에 아는 사람 있는 게 드무니까 신기해서 와 본 거겠죠."
그래도 형 말을 듣고 보니 약간은 관심이 생겼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인쇄기의 볼트를 조였다. 풀릴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 곳은 돌리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인 곳은 인쇄기가 돌아가면 진동 때문에 계속 조금씩 더 풀리는 법이다. 우리 아버지도, 형의 아버지도 인쇄 시작할 때나 끝날 때는 손으로 볼트를 한 번씩 돌려 보고는 했다.
그날도 원래 볼트를 조이는 날이었는데 복잡한 글자가 많아서 마음이 급해서 조이는 것을 잊고 서둘러서 활자를 넣고 기계를 돌렸다. 그리고 기계가 도는 동안 늦게나마 볼트를 조이는데 중간에 하나를 빼먹었다. 빼먹었다는 걸 알고 마지막에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가 그냥 잊어버릴지도 모르니 지금 하자고 생각하고 스패너를 돌렸다. 의외로 훅 돌아갔다. 거의 한 바퀴를 돌린 것 같다. 그래도 힘을 주니 그냥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거의 두 바퀴를 돌렸는데도 계속 돌아갔다. 조금난 더 돌리자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핑, 하는 소리가 났다. 뭐지? 하면서 스패너를 보니 볼트 머리가 없었다. 그리고 앞이 점점 흐려졌다. 순간적으로 형이 부르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앞이 새카맸다. 보니 이불을 덮고 있었다. 일어나 앉는데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바닥에 깔린 게 요가 아니다. 다다미도 아니다. 정신이 든 것 같은데 이상하다. 간신히 일어났다가 다음 순간 쿵 하고 쓰러졌다. 바닥이 꺼진 것이다. 발목, 무릎, 골반 할 것 없이 비틀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이 없다. 간신히 일어나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내가 있어본 적이 없는 커다란 방이다. 벽에 형광등을 켜는 스위치가 있는데 그 스위치는 인쇄소에나 있었지 집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는 전구와 전구 목에 달린 스위치가 다인데 흐리게 보이는 광경으로는 천장에는 전구가 없다. 벽까지 간신히 걸어가서 스위치를 위로 딸깍 하고 올렸더니 순간 눈이 부실 만큼 밝은 형광등 불빛이 쏟아졌다.
한쪽 벽이 자개장롱으로 꽉 차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내가 누웠던 원목 침대가 보였다. 이불은 반짝반짝 거리는 비단이었다. 어리둥절해서 앉아서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보았다.
나는 시골에서 형제 없이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따라서 어느 도시로 가서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중학교를 다녔다. 어떤 여자애가 나를 따라왔고, 그 이야기를 아버지의 동업자 아들인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형에게 했더니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거라는 말을 해 주었다. 인쇄소 일은 활자 맞추고 기계 작동시키는 정도는 어른들이 없어도 할 만큼 손에 익었다. 손을 들어서 내려다보았다. 활자를 하나하나 집어 들면서 옆에 있는 것이 따라오지 않도록 옆 벽에 살짝 비볐던 동작, 손가락 끝을 인쇄틀에 베이스처럼 대고 활자를 넷째 손가락으로 밀어 넣는 동작 등 손가락은 지금 한밤 중이라도 눈앞에 인쇄기만 갖다 놓으면 순식간에 활자를 맞출 것 같았다. 그런데 일본어는 못한다.
응?
그렇다. 나는 일본어는 못 한다. 그리고 조선말은... 조선말이 아니고 한국어를 하는데? 그리고 혹시나 해서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가슴에도 손을 대 보았다. 틀림없는 여자다. 그런데 남자였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죽은 건가? 볼트 머리에 맞아서?'
지금이 1960년이니까 적어도 삼사십 년 전이 배경일 것이다. 그런데 그 도시가 어디인지도, 그 시골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이름은 들은 것 같은데 벌써 꿈이라 흐릿해지고 있다. 내가 마흔이니 죽으면서 나로 환생한 건가?
어쨌든 너무 꿈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여자애도, 공부도 앞으로 당연히 어떻게 행동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끝나 버리니 분했다. 안타까웠다. 어떻게 이렇게 어이없게 끝날 수가 있지?
거실로 나가서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따랐다. 물병 뚜껑이 끝까지 안 돌아갔는데 컵은 잘 씻어져 있던 것을 보니 남편이 또 물을 마시면서 물병에 입을 대고 마셨나 보다. 평소 같았으면 화가 났을 텐데 오늘은 꿈속의 감정과 얽혀서 왠지 모든 느낌이 흐릿했다. 아까 넘어지면서 아팠던 무릎과 발목은 아직도 약간 시큰거리는 느낌이 있지만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꿈속에서 다치고 나서 깨어난 것 같다.
눈물이 났다. 그 소년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더 열심히 살 걸,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 조금 더 최선을 다해 주위를 돌아볼 걸 하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다.
식탁 의자에 앉아서 생각하니 하나씩 기억이 났다. 물병은 내가 냉장고에 물을 채워 넣을 때 덜 닫았을 거고 남편은 2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시골집에는 지금 5남매가 자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남편이 남겨 놓은 의류 브랜드 때문에 서울 집에 올라와 있다. 웬만한 건 임원들이 알아서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올라와서 일을 끝내고 아침에 기차로 집에 내려갈 것이다. 첫째와 둘째는 대학생이고 셋째는 고등학생, 넷째와 다섯째는 초등학생이다. 다섯째를 빼고는 모두 아들이다. 시댁에서 아들 아들 거리기는 했지만 아들을 셋을 낳자 손녀도 보고 싶다고 하셨다. 막내를 낳았을 때는 좋아서 일 년동안 집에 거의 매일 드나들다시피 하셨다.
의류 브랜드는 생각보다 잘 된다. 남편이 죽기 직전에 준비를 하려다 끝을 보지 못했던 백화점 입점이 확정되면서부터 회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가면서 주식 상장도 하고 판매와 자산관리 쪽 계열사를 분리해서 만들기도 했다. 남편이 살아 있었으면 지금쯤 회장님 소리를 들을 텐데, 안타깝기는 하지만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 감상에 젖을 틈도 없다.
내일은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넷째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 아이들은 말썽은 피우지 않는데, 가끔 엉뚱한 짓을 할 때가 있다. 제일 얌전한 건 첫째였지만, 얌전했을 뿐이지 엉뚱한 건 똑같았다. 둘째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겠다며 미국에 유학 가겠다고 하다가 선생님한테 노래를 너무 못해서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의아하게도 다음날부터 다시 공부하겠다고 했다.
이번에 넷째는 교실 안에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유명한 댄서가 되겠다고 했다는데, 애들이 야유를 보내고 해도 바득바득 우기면서 책상을 교실 되로 다 물리게 해 놓고 춤을 추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애들이 못 춘다고 했더니 엉엉 울고는 어제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제 그 전화를 받고 나서 가정부에게 전화해 보니 방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히 식사는 갖다 주는 대로 다 잘 먹은 모양인데,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달래도 달래고 혼을 내도 제대로 혼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이 그렇게 엉뚱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인쇄소 아들이었다면 학교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전화를 했을까? 그렇게 춤추고 노래 부르고 했는데 때리지 않고 얌전히 보고만 있었을까? 새삼 남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니 꿈속에서 아버지가 그래서 아등바등 조금이라도 더 잘 살려고 그렇게 뛰어다녔나 보다 하는 생각에 눈물도 조금 났다.
나는 아침이 되도록 그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상실감이 너무 컸다. 인생 하나가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는데, 그게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건지, 실제로 있던 것이 없어졌는데 그걸 내가 알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차이는 없다. 소설을 읽어도 생생하던 주인공이 죽으면 슬프지 않은가. 꿈이 생생하기 때문에 슬픈 거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 아버지의 아들을 잃은 슬픔, 친한 동생이 눈앞에서 죽은 것을 본 형의 충격, 좋아하던 남학생이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분 되지 않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에 빠질 그 여학생. 과연 그 인쇄소는 그대로 유지가 되고 아버지는 제정신으로 인쇄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는 사람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본 그 고등학생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꿈이었다면 그냥 꿈이 끝났으니 그다음은 없다. 걱정할 것도 없다. 하지만 왠지 그 이후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계속 흐르고 내가 그 볼트 때문에 그 흐름을 보지만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본능적인 느낌이다.
다시 자려고 침대로 와서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인쇄소의 내부가 보인다. 인쇄기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유리창을 쳐다보면 여자애가 웃고 있다. 뒤를 돌아보면 인쇄가 잘 되고 있는지 긴장된 눈으로 보고 있는 형이 있다.
새벽이 되어 문득 잠이 들었다가 깼다. 한 시간 조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누워서 뒤척이다 잠시 잠이 들었던 것뿐이라서 피로는 전혀 풀리지 않은 느낌이다. 게다가 어젯밤 꿈은 아직도 생생해서 지금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발을 걸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약속을 모두 잡아 놓았으니 방법이 없다. 기차에서 푹 자는 수밖에 없다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화장도 도착해서 다시 하기로 했다.
기차역에서 내려 플랫폼에 서서 다른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잠시 서 있었다. 방금 내린 사람들 중 극히 일부만 건너간 상태여서 아직도 플랫폼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기 직전에 내 눈에 뭔가 낯익은 것이 지나갔다. 아니, 낯익은 거라고 생각이 드는 뭔가가 풍경 안에 있었다. 기차역 자체 말고는 '의외로' 낯익은 거라고는 없는데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기관차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머리와 모자들 사이로 기차역 역사를 바라보면서 방금 그게 뭔지 찾느라 바빴다.
모자.
꿈속에서 형이 쓰고 다니던 모자였다. 아마 학교 교복에 딸린 모자가 아니었을까? 꿈이 생생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기억에 각인이 될 정도로, 진짜 있었던 일로 생각될 만큼, 기시감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바로 기차가 지나가 버렸고, 사람이 있는 플랫폼을 지나는 기차라 그 속도도 매우 느렸다. 기차가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과도 눈이 충분히 마주쳤을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플랫폼을 대여섯 개 지나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런 모자는 볼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서 대충 화장을 손보고 나와 광장을 향했다. 겨울답게 여기저기서 고구마와 밤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고프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일찍 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급히 갈 시간은 아니기에 군밤 한 봉지를 샀다.
아저씨가 종이를 후 불어 봉투로 만들고 거기에 집게로 군밤을 꽉 찰 때까지 집어넣었다. 나는 돈을 세서 드리고 봉투를 받았다. 보통 군밤이나 군고구마를 사면 맛있게 드시라거나 감사하다는 말을 보통 하는데 아저씨가
"힘내세요!"
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넷째 때문에 골치 아픈 게 티가 났나? 아니면 꿈 때문에 혼란스러운 걸 알았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당황하면서 말했다.
"아니요, 손님께서 잠을 못 주무신 것처럼 보여서 그냥 힘내시라고 한마디 한 거예요.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아마 졸려서 조급하게 단정 지었던가 보다. 나도 멋쩍어서
"아니요, 힘이 됐어요."
하고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서 걸었다.
기차역 광장은 꽤 넓다. 자동차가 점점 많아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인도를 구분할 정도는 아니어서 차와 사람이 섞여서 다니고 있었다. 서울이서 이 정도면 여기저기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올 텐데 여기는 운전하는 사람이 알아서 요령껏 피해 가야 한다. 그래도 걸어 다니는 사람도 많아서 뭔가를 들고 다니면서 먹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시 역사 안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기사에게 나오라고 할 걸 그랬다. 학교에 가면서 유세 부리는 것 같아 근처에 내려서 걸어가려고 택시를 타기로 한 건데, 생각해 보니 내 차로 가더라도 운동장까지 가지 않고 내려서 걸어가면 될 일 아닌가. 군 밤 하나씩 입에 집어넣으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잠도 잘 자고 난 어제 아침이었다.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하지만 그렇게 작은 것에 집중하면서 아무리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나무틀로 된 유리창이 있던 인쇄소의 내부가 떠올랐다. 그렇게 죽은 게 억울해서 지금까지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내 몸으로 태어나 살아간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나 걱정을 하면서 갔던 학교에서는 면담을 해 보니 실제로는 결국 별 일이 아니었다. 별 일이 아닌데 괜히 걱정했다기에는, 차라리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이기는 하다. 선생님은 단지 편모 가정이어서 내가 아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지, 혹시 잘못 알고 있으면 너무 심하게 걱정하지 않을까 싶어 친절한 마음에서 알려주려고 한 거고, 첫째 때와 같은 큰 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넷째는 정말 끼가 있긴 한 것 같긴 했다. 그걸로 돈 벌어먹고 살 정도가 아니라서 그렇지 아마 기획을 하거나 무대를 짜는 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십 년이 지나고 그 꿈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렸다. 아이들도 모두 돈을 벌고 있다. 회사는 둘째가 이어받았고 첫째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다. 패션 쪽으로는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산업 쪽으로는 계산이 되는지 무역상사 쪽에서 영업 일을 한다. 산업재 수입 쪽이라 우리와는 접점이 거의 없다. 셋째와 넷째는 우리 회사의 영업점에서 일을 한다. 영업점 한 군데가 아니라 총괄이기는 하지만 영업점 디자인이나 배치 같은 것을 하기 때문에 감각이 중요한데, 넷째가 서너 가지를 제시하면 셋째가 그중 하나를 고르는 식이다. 둘이 붙여 놓으면 사실, 어떤 일이든 잘 될 것 같긴 하다. 막내는 교수가 되었다. 일찍 교수가 된 것을 보아 아마도 집안의 배경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 본인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굳이 자랑은 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다섯 남매가 알아서 하고 있고, 나 역시 이사회의 도움을 받아 회사가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문제가 생겼다. 남편과 처음부터 동업을 하던 사람이 대주주들을 모아 회사를 팔아넘기려 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주주총회 몇 번을 거치고 소송 전을 거듭하면서 언론에 나오게 되었고 아이들도 회사에서 일하기 힘들어했다. 어느 날 나는 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당부했다.
"지금 우리 집안은 문제가 없지 않니? 회사 문제는 회사에서 법적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 첫째 너도 이것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들어와서 뭘 하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말고 우리 회사 밖에서 돈을 버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만 잊지 마라. 잘못돼서 너희 가족들도 피해가 가면 안 되지 않겠니. 둘째도 이사회는 내가 아직 잡고 있으니 하던 대로 경영해 나가면 된다. 셋째와 넷째도 현장에서 대놓고 무시하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손님들 앞에는 나서지 말고, 하지만 아직까지 회사의 주인은 우리라는 거 잊지 않게 자주 영업점 나가 주고. 막내는 언론 보도를 보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논문 때문에 좀 바쁜 것 같더라. 굳이 연락해서 말해줄 필요는 없지만 나중에 한숨 돌릴 때 연락이 오거든 사실대로 얘기해 주고."
아이들은 모두 결혼은 했지만 자녀는 첫째만 아들 둘이 있었다. 아기일 때만 보고 조금 크고 나서는 보지 못했다. 아마 이 사태가 다 끝나야 놀아주더라도 애들이 안심하고 할머니에게 안길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고 회사는 다시 안정되었다. 회사에서 가장 큰 고비였다. 그러면서도 회사는 계속 성장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수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질 때마다 남편의 산소에 가서 울었다. 회사를 기반을 다 닦아 놓고 떠나버려서 그 회사가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하지 못했고, 위기를 간단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 썩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도려내고 더 우직하게 일어섰다.
"나 잘했지요?"
산소에 갈 때마다, 안방에서 사진을 볼 때마다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사진은 항상 웃고 있기에 다 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섯 남매도 아직 다 자라서는 모인 적이 없었다. 가족 모임만 한 번 하면 남편에게 할 도리는 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족 모임은 다섯 명 모두 나에게 손자, 손녀를 만들어주고 나서야 열 수 있었다. 그렇게 북적북적한 가족 모임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가족모임은 내 환갑잔치를 겸해서 열렸다. 잔치라고는 하지만 그냥 조그마한 예식장 하나 빌려서 회사 돈을 쓰지 않고 열었다. 임원들도 초대하지 않았다. 가족 모임이라고만 했지, 생일인지 환갑인지 같은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커다란 케이크가 나왔고 커팅식이다 뭐다 서양식으로 많이도 준비했다. 비용 얘기를 꺼내자 막내가 말을 막았다.
"에이, 얼마 안 해요. 자, 여기 칼 잡고 잘라 보세요. 저기요! 여기 사진 찍고 있지요?"
막내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어린아이들도 엄마가 그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 보았는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케이크를 자르고 나니 그제야 자리마다 맥주가 올라왔다. 소주나 양주 이야기도 처음에 물어보긴 했었다. 원래는 먹고 싶으면 주문하라고, 대신 나는 맥주만 먹겠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꿔서 소주나 양주는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회사 일을 하면서 투자 유치를 할 때, 안 좋은 일들을 상대할 때 언제나 소주나 양주가 끼면 성희롱이나 욕설이 따라왔던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야 괜찮아졌지, 그전까지는 내가 패션업계 사람인지 술장사 업계 사람인지 헷갈려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고 넘긴 게 몇 년 경력인지 모르지만 그런 건 자랑이 아니다. 굳이 그렇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을 내가 더 사업에 힘을 실었다면 이 나라가 훨씬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더욱이 그런 경우가 나 하나만 생기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소주나 양주를 보면 속이 상했다.
맥주 한 잔을 한 번에 마시고 아이들을 불렀다.
"나 더 마시면 얼굴 빨개질 것 같은데 우리 단체사진 지금 찍을까?"
그때 첫째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제 사진 찍어야 되니까 멋진 옷 입고 와."
아이들이 제복 같은 웃옷을 가방에서 꺼내 입고 왔다. 그리고 사진 찍기 직전, 모자를 썼다. 뒤에서 보니 그 옛날 꿈에서 보았던, 형이 썼던 모자, 낯익은 기찻길의 모자, 그것이었다. 나는 그냥
'아, 알고 보니 그냥 교복이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그런 건 내가 어렸을 때도 많이 보았던 거니까. 꿈에 나왔기 때문에 조금 눈에 더 띄었을지는 몰라도, 꿈에 나온 것 자체가 익숙했기 때문일 수 있으니까.
환갑잔치를 하고 오 년 후, 길을 걷다가 쓰러졌다. 누군가 신고해서 구급차가 나를 실어갔다. 쓰러진 기억도, 어디가 아팠던 기억도 없었다. 그냥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병원에 있는데 바로 둘째가 병실로 찾아왔다. 병원에서 바로 연락이 갔던 모양이다.
"엄마, 형도 이따 밤에 올 거예요. 의사한테 들었는데, 수술 가능하다던데 그 얘기는 제가 의사하고 할게요."
나는 수술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대답 대신 둘째에게 이렇게 말했다.
"첫째도 첫째지만 내가 느낌이 안 좋아서 한번 너희들 모였으면 좋겠다. 아가들 말고 우리 여섯 명만."
"알았어요. 모두 연락할게요. 안 좋은 생각 하지 마시고요. 수술하면 나아질 거예요."
하지만 의사는 뇌 쪽을 의심했고 검사를 했지만 수술을 해도 생존 가능성은 그리 많이 올라갈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내 느낌이 다음 주 수요일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둘째를 다시 불러서 다음 주 수요일 저녁에 다시 모이자고 했다. 막내가 해외 발표 때문에 아직 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수요일에는 모두 모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다음 날 아침, 막내의 전화가 왔다.
"엄마, 수요일 아침에 도착하는 비행기로 끊어 놨어. 저녁 말고 아침부터 계속 옆에 있을게. 사랑해."
목소리가 여기 아침에 시간 맞춰서 전화하느라 한밤중인 모양이었다.
"알겠으니까 어서 자. 오빠한테 얘기하면 되지 그걸 뭐 전화까지 하냐?"
"원래 아프면 서러워. 한마디라도 더 챙겨줘야지. 딸 말고 누가 그걸 해줘?"
"야, 와서 해, 와서. 어서 잠이나 자라."
"알았어. 엄마도 쉬고 편하게 있어. 그래야 피가 잘 통하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가 제대로 놓여 있지 않다는 뜻으로 뚜뚜뚜뚜 하는 큰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듣고서야 침대 위를 기어가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토요일에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 아마 뇌나 혈관 쪽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 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고, 의사는 혹시 모르니 할 얘기가 있으면 지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첫째가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셋째, 넷째, 그리고 둘째...
"막내는 언제쯤 올 수 있다 얘기 있던?"
"지금 급하게 비행기 표 끊었대요. 최대한 빨리 출발하는 거 아무거나 탄다고 연락 왔어요. 지금 많이 서두르고 있어서 벌써 공항이라 연락이 힘들어요."
"일단 자야겠다. 지금은 밤이라서 졸린 것 같아. 아침에 막내 올 때쯤 돼서 깨면 되겠지."
그때 나는 웬일로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푹 잔 것 같았다. 회사를 운영하면서는 한 번도 그렇게 자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아침에도 햇빛에 눈이 부셔서 눈을 떴을 정도였다. 눈을 떠 보니 넷째가 앞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일어나셨어요?"
한 마디만 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나머지 세 명과 함께 우르르 들어와서 나는 눈으로 막내를 찾았다.
"막내는 아직 안 오니?"
그리고 첫째가 뭐라고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말이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은 건 아니고 소리는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만, 다시 말해 볼래?"
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어째 된 일인지 나는 앉아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꾸라진 것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놀라서 나를 부축해서 베개 위에 똑바로 눕혔다.
"막내를 보고 싶었는데, 안 되겠다. 너희보다 막내를 더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다섯 명이 모여 있는 것만 마지막으로 보면 소원이 없었는데..."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지만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눈물이 나왔는데, 흐르지 않는다.
왜?
눈물이 말라버렸나? 분명히 눈물방울의 장력과 중력이 느껴졌는데 손을 대자 눈물이 없다. 똑바로 다시 앉았다. 그리고 어리둥절해졌다. 방금까지 환하던 병실이 어두컴컴했다.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병실도 아니다. 침대에서 내려와서 시계를 보니 열한 시다. 밤 열한 시?
무슨 상황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지금 바라는 건 막내 얼굴을 보는 것뿐이다. 잠시 기억이 헷갈렸다. 평생 일군 회사가 있는데, 나는 캐나다에 어학연수 와 있는 학생이다. 기억을 더듬는 게 힘들다. 기억을 더듬으면 두 가지 줄기가 한꺼번에 읽힌다. 손자 손녀들의 얼굴과 부모님의 얼굴이 겹친다. 손자 손녀들은 꿈에 나온 애들이고 부모님은 한국에 계신 진짜 부모님이다. 자식들도 실제가 아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멍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와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벽에 기대고 앉아 어젯밤에 꾼 꿈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하룻밤 꿈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단순한 하룻밤 꿈이 아니라 그 꿈속의 하룻밤 역시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건 막내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미어터질 것 같은 느낌에 목이 메었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마음껏 쏟으며 엉엉 울었다. 그럼에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울 거면 꿈속에서 울었어야 했다. 그 안에서 울었어야 했는데 이미 그것이 현실이 아닌 것이 된 지금 울어서 무슨 소용인가. 그때 나는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는 것, 적어도 그림 연습을 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막내딸의 얼굴이 그렇게 생생한데, 꿈속에서 생생하던 걸 현실에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이미 기억의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 막내딸의 얼굴도 곧 잊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다섯 남매가 맞는지도 의심하게 될 것이었다. 차라리 그 때문에 그 마지막 슬픔도 잊어버리면 좋겠지만, 감정적으로 심각하게 마음에 조각칼 같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잊어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무가 되는가. 알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환생하는가. 알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 인생이 한낱 꿈으로 남는가. 이것은 겪어본 사람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한낱 꿈이라는 것은 결국 그 인생이 무라는 소리이다. 깨어나서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경험조차 현실에서는 소용이 없는 경험이다. 남는 것은 감정의 묶음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꿈이 누군가의 인생이라면, 우리는 꿈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꿈을 기록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사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알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