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상자

약속의 경계

by 루펠 Rup L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이익의 극대화 지점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상대방도 똑같이 하도록 강제해서 균형을 잡게 하는 것이라는 저울 이론에도 불구하고 다른 해석이 가능할까 싶어 학생들에게 글을 써오라고 했더니 한 학생이 이런 글을 써왔다. 그 학생은 아직도 이승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어린아이도, 놀이도 없다. 갓난아기도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이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게 아니다. 비유가 틀린 것이다.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더 오래 살아야 세상을 좀 제대로 보려나. 그 학생에게 경고도 할 겸 이렇게 전문을 공개하고자 한다. 아무쪼록 이승에 다시 태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조금이라도 인위적으로 앞당기기 위해 그것에서의 관점을 고수하는 어리석은 시도는 하지 않기 바란다. 단언컨대 이승에서의 모든 체화된 규칙들을 잊어버리기 전에는 이승은 꿈에도 가보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얄팍한 수를 쓰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범죄에 이르는 행위이다. 학생 신분으로 교수의 비호가 없다면 곧바로 갇히게 될 것이다. 다음은 그 학생의 전문이다. 경고 차원이라고 내가 직접 썼기에 그 학생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는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눈을 뜨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을 깨도 되는 것은 언제인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그 약속은 파기되는가? 혹은 어느 시점이 그 약속 위반에 대한 면책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가? 사실의 관점이 아닌 사고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암흑의 상태에서 눈을 뜬다면, 그래서 온 세상이 암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 역시 약속을 깬 것인가?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약속과 눈을 뜨지 않겠다는 약속은 다른 것인가? 혹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므로 약속을 지킨 것인가? 눈을 가렸으면 어떻게 될까? 눈을 뜨지 않겠다는 약속이 유효한가? 눈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틈으로 보여 눈을 뜨자 무엇을 보지 말라고 한 건지 알아차렸다고 하자. 하지만 내가 연기만 잘하면 상대방은 약속의 위반을 알지 못한다. 그런 경우라면 그것은 약속을 위반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눈을 떴지만 눈가리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약속을 위반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면책을 해 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법률적인 차원이 아니라 어린이들 장난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간단하지 않다.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개념이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각종 개념들 자체가 너무 단순한 탓에 현실에 적용하기에 오히려 어려워지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눈을 뜨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그 약속은 누구와 하는 것인가? 스스로 다짐한 거라면 어겨도 상관없다. 단지 스스로 의지가 부족하다는 점을 두고두고 후회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가능성일 뿐이다. 스스로 면책은 상호 합의가 필요 없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상대방이 죽으면 나는 그 약속에서 자동으로 풀려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눈앞에 메두사가 있기 때문이라면? 살아 있기 위해서는 눈을 뜨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면 그 약속은 상대방이 나 자신을 위해 한 약속이지 상호 간에 지켜서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나를 지키기 위해 애쓰다가 상대방이 눈을 마주쳐서 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면 나는 약속을 계속 지키고 있어야 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메두사가 칼을 들고 설치고 있다면 어느 쪽이든 죽겠지만, 메두사 역시 돌이 된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도 눈이 마주치면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한 약속이라면 눈을 뜨지 않는 것이 궁극적으로 목표한 것은 메두사를 쳐다보지 않는 것뿐이다. 따라서 눈을 감기까지 할 필요는 없고, 땅만 쳐다보면 되는 것이다. 땅에 무엇이 있는지, 천장은 어떻고 벽에 무슨 장식이 있는지 등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땅을 보면서 균형을 잡는 것 외에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그것은 약속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어겨도 상관은 없다. 단, 상대방이 살아 있어야 이것을 따져볼 텐데, 상대방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면, 약속에서는 저절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약속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약속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고개를 드는 순간 돌이 되어 버려서 약속이 목표로 한 바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촉각을 다투는 사안이 될 것이므로 실제로 메두사 석상을 갖다 놓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점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기 전에 모두 돌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마지막과 중간을 약간 살펴보았으니 처음 부분을 보자.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떤 경우를 상정하고 최소와 최대의 기대치는 얼마로 두었기에 눈을 절대 뜨지 않을 수 있는가. 손등 위로 거미가 기어가는 상황은 어떤가. 뭔가 기어가는데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한다. 약속을 하는 시점에서 아까처럼 생사를 다투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패닉에 빠질까 봐 그런 것이 살에 닿아도 눈을 뜨지 말라고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냥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생일을 어떻게 알고 케이크를 준비하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눈을 감은 상태에서 손등의 거미 대신 컵을 깨는 소리가 났다면, 그래서 상대방이 "앗"하는 소리를 내면 바닥에 주저앉은 것 같다면 눈을 떠도 되는가. 그것은 목표한 바의 가치보다 상대방의 부상 여부가 훨씬 큰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면책 조건이 될 것이다. 혹시 케이크가 아니고 보석류의 선물이었고 컵이 깨진 것은 맞지만 상대방이 쓰러지는 소리가 아니고 컵과 함께 케이크가 바닥에 철푸닥 쏟아진 소리라면 눈을 떴을 때 상대방이 화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상을 가진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걱정을 끼쳤다는 이유로 면책을 강요할 수 있다. 상대방은 애초에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에 사과해야지 약속 준수 여부를 따져보아서는 안된다. 그러면 전체 문장을 다시 보자.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절대 뜨지 않아야 한다. 무슨 일의 경중에 따라 약속 이행의 강제 정도가 정해진다. 눈을 뜨지 않는다는 말은 암묵적으로 물리적인 안구 노출의 정도에서부터 실제로 시신경을 통한 이미지 해석 단계만 이루어지지 않으면 되는 정도까지 다양화될 수 있다. 그리고 문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숨겨진 것은 상벌이다. 위반했을 때의 벌과 지켰을 때의 이익이 주어진다면 그로부터 눈을 뜨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고 그것이 이행의 강제 정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이 간단한 문장조차도 문장 앞뒤의 조건을 문맥상 파악해야 하고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상대방과의 관계와 같은 암묵적인 사항들도 문맥에 포함하여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것들이 초기화된 상태로 해석을 극도로 간단하게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어린이들의 놀이이다. 이것은 해석이 틀렸다고 해서 누군가 다치지도 않고 돈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그 차이점은 그저 지역마다 다른 고스톱의 룰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기서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무생물이었던 것이 사실 미생물의 토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확대해서 분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뜨지 않는다는 것을 극도로 축소하면 "눈 뜨면 안 돼"가 된다. 여기서는 결론의 "안 돼"가 막연한 지시, 약속으로만 제시되고 그 후의 지시의 이행과 미이행에 대한 결과가 "재미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너 때문에 재미가 없었다고 비난받을 것이다." 두 가지로 대략 추측할 수 있다.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약속을 이행하라는 압박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만 있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모든 놀이가 매일 재미있는 것은 아니고 재미있고 사간이 빨리 흘러가 버릴 만큼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건 그 가능성을 높일 행위로 어느 정도는 맞춰줄 필요가 있는데 이 약속 역시 그 일환에 불과하다. 의무의 부분은 이 정도, 합의의 암묵적이고 도덕적인 강요 수준으로 대부분의 놀이의 규칙에 적용되는 일상적인 것이다. 행위 부분은 눈을 감으라는 것, 이것은 눈을 떴을 때의 위험 대신 눈을 뜨고 볼 때의 일상성을 감소시키는 목적이 크다. 어린이들의 놀이에서 눈을 감거나 가리는 행위는 앞이 보이지 않아 의도한 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비웃음이 보통 목적이 된다. 따라서 눈을 감은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정서적 또는 물리적 장치라기보다는 놀이의 부차적인 조건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놀이가 눈을 감아서 더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아니다. 숨바꼭질도 눈을 가리고 하게 되면 다른 장치가 더 필요해지는 것처럼 눈을 감게 되면 오히려 더 번거로워지는 경우가 많고 보통 놀이를 위해 눈을 감으라는 조건을 내걸면 눈을 가리는 쪽은 별로 움직일 일이 없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역할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눈 감는 것이 중요한 놀이의 경우에는 앞이 보이게 되면 확보할 필요가 없는 안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자연적으로 부가되어 오히려 시시한 놀이가 되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방을 약 올리기 위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을 수 있다. 그 대상자는 위에 나열한 목적을 가지고 눈을 가리거나 눈을 감고 있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목적을 빌미로 그 사람이 기대하고 반응하는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 숨겨진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대상자가 그 사실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매우 다양하다.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서 즉시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시작하자고 하고 눈을 못 뜨는 상태를 틈타 모두 나가 버려서 한참이나 눈을 떠도 되는지 물어보는 경우까지 수많은 경우가 있지만 후자로 갈수록 괴롭힘에 가까운, 놀이가 아닌 상태가 된다. 목적이 모든 참여자에게 공통되지 않으면 다른 목적을 가진 소수는 괴롭힘의 표적화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대상자 또한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 일쑤이다. 단순화를 꽤 강도 높게 진행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우의 수가 매우 많아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어쩌면 단순화를 했기 때문에 더욱 경계가 넓어졌는지도 모른다. 어란아이들이라면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폭이 넓지 않으리라고 속단했지만 사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은근한 폭력이나 따돌림이 동반되지 않는 단순한 놀이에 그친다면 그 폭은 어린아이들의 놀이라고 해서 딱히 좁아지지 않는다. 순수한 놀이라면 정해진 틀이 있기 마련이고 단순한 재미만 고려한 행동이라면 오히려 어른이 되면서 줄어들기 때문에 총넓이는 비슷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뜨지 않겠다. 사실 이 말은 어린이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무겁다. 무지막지하게 무거워서 저 말은 단어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과장을 통한 농담에 사용하기에 딱 좋다."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당근은 먹지 않겠다."처럼 그런 화법은 어른들의 입가에 웃음을 띠게 한다. 하지만 놀이에 사용하면 하나의 규칙이 추가되는 정도에 머무르는 재미있는 문장이 된다. 전쟁터에서는 어떤가. 어떤 규칙과 어떤 배경을 만드느냐에 따라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기고 그에 따라 적절한 행동, 그러니까 약속을 충실히 준수하는 행동이 어떤 것이냐도 서로 다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저 약속을 지키는 행위가 다른 경우에는 저 약속을 짓밟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사의 경우들은 각각의 체인을 가지고 있고 말은 그 경우들의 팔목의 체인을 묶을지 발목의 체인을 묶을지 쉬지 않고 감시하고 판별한다.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약속은 항상 지켜지지는 않지만 약속이라고 불리는 한은 최대한 경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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