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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5. 2024

호텔에서 글을 쓴 '기억'

벽에 붙여서 설치된, 폭이 매우 좁고 너비는 긴 책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얹고 글을 쓴다. 문득 손을 멈추고 멍한 상태로 글을 쓰던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낮이지만 예쁜 스탠드가 설치되어 있어 망설이지 않고 켰다. 스탠드에 끼워져 있는 램프가 주광색이어서 전자잉크 화면의 배경이 황금색으로 반사되어 빛난다. 오션뷰 호텔방에서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았지만 고층이라 파도소리는 크지 않게 들다. 살짝 집중을 하자 규칙적인 듯 불규칙적인 듯 파란색을 저절로 연상시키는 파도소리 틈으로 여자들이 소리 지르는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햇빛은 '작열'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지만 아직 공기 뜨거워지지 않아서 아마도 모래사장에서 차가운 파도에 발이 지 않게 뛰어다니는 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지만 나는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은 욕망과 충동이 마음속에서 마구 벽을 두드려대었지만, 그 벽은 나를 향한 벽이 아니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고개를 돌려야 했다면 그저 고개를 돌렸을 테지만 그래야 할 필요성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바닷물 소리와 사람들의 소음, 방 안에서 에어컨이 내는 바람소리, 키보드 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장면, 모니터 화면과 글자와 키보드에 시선은 고정했다. 소리라는 것은 진동이고 진동은 시간축이 있어야 이동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시간을 떠나서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불가능다. 그럼에도 나는 그 방 안에서 그대로 늙어 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가락만 움직이며 순간을 내 온몸으로 흡수했던 것이다.
택시를 타고 뜨거웠던 햇빛을 뚫고 호텔에 착해서 순식간에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속옷과 책과 이것저것들을 배치한 후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실 때까지는 그 모든 풍경과 소리와 공간을 즐기며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글을 썼다. 하지만 그 순간에 대한, 풍경과 소리와 공간에 대한 글은 쓸 수 없었다. 대신 감각이 불러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이틀이나 지나, 여운이 사라지고 기억이 조금 단단한 부분만 남기 시작했을 때에야 그 부분마저 날아가버리기 전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상황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순간 그 순간답게 되는,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세세한 촉감부터 복도의 카펫이 주는 방향제의 느낌까지 모든 가벼운 것들 마구잡이로 끼어 있어서 너무나 많은 정보들로 인해 무엇을 써야 할지조차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가벼운 것들이 날아가고 어느 정도 무거운 것들이 남았을 때, 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것들은 꼭 지금 쓰지 않아도 되니 그 무거운 것들 중에서 가벼운 축에 속하는 기억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그것들에 대해 써야만 한다.
호텔방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내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도상에서 공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곳에서 창문을 통해 실제로 보이는 풍경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서 언제나 방문을 열기 전에 약간의 설렘이 있다. 막상 열고 나실망스러운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실망스럽다고 해도 사실 풍경이라는 것이 방에 막 들어서는 순간만큼 중요한 때는 없어서, 글을 쓰면서 창밖을 바라보는 일 별로 없다. 문득 창문을 보아야겠다는 생각, 혹은 차라리 망막에 기록이라도 해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제야 한 번씩 바라볼 뿐이다. 내가 바라보기 좋아하는 것은 창문 밖의 풍경이 아닌 책상이다. 조그맣게 마련해 둔, 마치 배려처럼 느껴 만큼 전체 공간에 비해 항상 옹색하게 구색을 맞춘 책상에 책을 펼쳐 놓은 장면과 글을 쓸 준비를 해 놓은 장면 카메라가 발명되기 직전이던 옛날, 렌즈로 빛을 비추어 거기에 종이를 대고 밑그림을 그듯이, 천천히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새긴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때와 비슷한 환경이 되었을 때, 혹은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글을 쓰는 것이다.
호텔방에서, 혹은 비가 세차게 오는 날 우리 집 방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글을 쓸 의 기억은 그렇게 의식적으로 새겨 놓으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라보고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집중은 하되 당장 그 환경 속에서 그 환경이 대한 글을 쓰는 일은 불가능다. 비가 오는 날 비가 오는 날씨에 대해 글을 쓴 적은 아마도 내 기억에는 없다. 날씨에 대해 언급은 하되, 자세한 설명은 차라리 너무 습기가 가득하고 바람조차 따뜻해서 더운 날 그리워하듯 풀어놓았을 때가 훨씬 생기 있었다. 
무언가 닥치면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서 글을 짜내듯 뽑아낼 수 있착즙기 같은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렇게 쓸 수 있다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생생한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경험은 곱씹는 편이었다. 어떤 것에 대해 당장 말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자연스럽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충분하다 싶을 때 결론을 내는 대신 그 결론은 바뀌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 이것은 글을 쓰는 습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주관을 형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내가 착즙기처럼 글을 쓰는 일은 아마도 요원할 것이다. 재미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해서 나온 글은 일주일 이내에 취소하거나 삭제하려 들지 않을까 싶다.
기억 속에서 과거의 공간을 다시 상상하고 그 안에 들어가는 일은 나에게 익숙하다. 지금 당장 책에 집중하면서 20여 년 전 캐나다의 한 아파트 안의 좌식 책상에 앉아 있을 때로 돌아가 이미 아침에 버드와이저를 한 캔을 비우고 책을 읽었을 때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과거의 경험과,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과 내가 현재 읽고 있는 책이 만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또한 나중에는 별개의 기억으로 새겨질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든 기억이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하나의 창조이며 나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어째서 내 글은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며 변하는 데 서툰지...
연히 일상이 아닌 곳에서의 휴식은  일상보다 즐겁기 때문에 일상에서 일상이 아닌 곳에서 글을 쓴 기억을 소환하는 것조차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고 푹 쉬고 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일상이 있기 때문에 일상이 아닌 것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마도 바닷가 호텔에서의 생활이 일상이 된다면, 다른 뭔가를 바라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지루해한다. 내 정신만이라도 그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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