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다른 세계이다. 다차원 우주나 다중 우주 같은 말은 제쳐두고 어쨌든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곳도 현실과 비슷한 배경인 곳도 있지만 컴퓨터 그래픽으로 조악하게 만들어낼 수도 있을 정도로 간단한 우주일 때도 있다. 오늘 새벽에 꾸었던 꿈은 말 그대로 '꿈의 세계'의 구조적인 부분에 대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첫 번째 꿈
나는 일행들과 함께 바위굴 틈을 탐험하고 있다. 물이 마치 계곡처럼 빠르게 흘러가지만 물의 양이 많지 않아 고무보트에서 노로 바위를 찍으면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가능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하류까지 내려가면 쉽게 걸어 오르는 길이 있어서 이렇게 가는 것뿐이다. 다시 올라가는 일이 힘들다면 어차피 들고 올라와야 할 배까지 동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위는 울퉁불퉁한 것이, 구멍이 없고 색깔만 하얄 뿐 거의 현무암 수준이다. 커다란 산을 계곡이 휘감아 돌며 내려가고 몇 바퀴를 도는지도 모를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계곡 옆에 산이 돌로 된 부분에 이것저것 알 수 없는 조각들이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두 바위틈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새겨 놓았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항아리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는데 이미 누군가 뒤져본 것처럼 일부는 깨져 있고 일부는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지만 모두 비어 있는 것은 똑같다. 우리는 모두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온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 꿈이니 내가 창조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다른 사람과 꿈이 겹치는 건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만 이런 꿈에서는 아니다.
이 바위산에서는 해가 뜨고 지지 않는다. 항상 어두침침한 가운데 하늘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으로 어스름하게 앞이 제법 잘 보인다. 밝기가 심하게 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눈이 그 정도 밝기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 밝기의 허공 안에 바위산이 있는데 이런 바위산 안쪽을 탐험한다는 것은 공포영화의 도입부에도 어울리는 일일지 모른다.
바위산은 엄청나게 크다. 조그마한 산이 아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놀라운 건 그것을 왜 여태 발견하지 못했냐였지, 여기 굴 같은 게 있다는 게 아니었다.
"들어가 볼까?"
나는 들어가려고 물었다. 하지만 두 명은 원하지 않았다. 한 명은 소극적으로만 동조했다. 어쩔 수 없이 두 명은 배를 가지고 밖에서 기다리고 나와 나머지 한 명만 들어가 보기로 했다. 도망가도 상관은 없다. 그리 나쁜 상황도 아니고 내가 도와달란다고 들어올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도망갈 데도 없다. 그 세계는 그 바위산이 전부였으니까.
동굴 안은 우리가 생각하는 동굴과는 매우 달랐다. 뭔가 벽이 푸석푸석한 게 스티로폼으로 만든 세트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실제 부스러기는 플라스틱이 아니었지만. 그런 굴을 한참 들어가자 조그마한 폭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 항아리가 놓인 움푹 파인 곳이 다시 나왔다.
"작은 폭포라니, 물이 더 내려오나 보다. 꼭대기에 올라가 봐야겠어."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그때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배를 출발하던 곳 주변을 살펴보는 건 괜찮은데 그보다 위는 안 올라갈 거야."
"하지만 내가 올라가는 걸 막을 건 아니지?"
"그건 막을 수 없지."
그는 헛기침을 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배를 탄 나머지 두 명에게 우리가 본 것을 말해 주었다. 두 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나머지 두 명에게 내가 꼭대기에 올라가 보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역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없었다.
한 명씩 번갈아가며 배를 끌고 위로 올라갔다. 우리가 출발한 곳에는 우리가 사는 작은 동네가 있다. 나름 버스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어디서 가져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버스를 타고 갈 만한 거리에 뭐가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고. 도착해서 다들 배를 정리하고 쉬러 마을로 돌아갈 때 나는 거기서 출발해 혼자 바위산을 기어 올라갔다. 인사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상태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도 며칠이고 있을 수 있는 사람들 같았다. 출발하는 것을 본 사람들도 그냥 흐리멍덩한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길은 생각보다 평탄했다. 암벽 타기 같은 것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오솔길 같은 폭의 길이 이어졌다. 오르막이라는 점이 내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유일한 단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바위섬의 꼭대기였다. 바위산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이 세계는 말 그대로 바위섬이었다. 바위섬은 공중에 떠 있었고 그 밖은 그냥 허공이었다. 더 빛나거나 하는 곳도 없다. 저 아래로 폭포가 보였다. 여기서 흐르는 물이 최종적으로 나가는 곳. 그리고 또 하나의 폭포가 보였다. 저 위에 있는 뭔가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섬의 꼭대기는 생각보다 넓었고 물도 많았다. 위에서 쏟아지는 물도 제법 양이되는 것 같다.
위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를 가만히 바라보니 물살에 가려져 있었지만 흐릿하게 그 물살 너머로 공중에 떠 있는 다른 섬이 보였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올려다보니 편평한 바닥 부분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섬도 그보다 위에서 물을 받아서 이곳으로 흘려보내는 걸까? 어쨌든 궁금한 것은 해결했으니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는 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시간은 소요되었지만 올라올 때 걸렸던 시간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거리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올라올 때와 거리를 정확하게 알고 내려갈 때의 마음이 같을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어딘가 갔다가 하루를 보내고 다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이십 년 정도 살고 나자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으면 마을 뒤편에 있는 동굴 속에서 화장을 했다. 시체에 불이 붙으면 동굴이 온통 환해졌다. 사람들은 그 불타오르는 불꽃의 빛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 사람의 영혼이 스며든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동굴들은 모두 영혼의 무덤이자 명상의 성지였다. 나도 죽을 때가 다 되자 사람들이 동굴로 옮길 준비를 했다. 죽자마자 옮겨서 태워버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게 되면 침대 위에 들것을 놓고 그 위에 눕게 했는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보여서 그저 내 방에 들것을 세워 놓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주위 사람들을 불러 나는 시체를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죽기 전에 떠나고 싶소."
그게 내 바람이었다.
"죽기 전에 떠난다니, 여기에 다른 곳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성직자 역할을 하는, 모자 쓴 노인이 물었다. 그 노인이 정례 때는 화장을 하고 기도문을 읊는 모든 절차를 소화한다. 아마 절차가 달라지는 것에 대한 경계였을 것이다. 무엇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정으로 비치는 듯했다.
"아니요, 나는 이 섬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 바깥이라는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밖으로 나간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꼭대기에 가보았을 뿐, 이 산이 섬일 거라는 상상만 했지 아래로는 끝까지 내려가 보지 않았다.
"이 섬 밖에는 아무것도 없소. 섬처럼 보이지만 사실 섬이 아닌 무엇인가인 것이 아니라 섬이 맞소. 그리고 밖으로 나갈 수 없소."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뭐가 있습니까?"
"시간이라는 것의 실체가 이 섬의 영속성을 떠받치고 있지. 전설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척했다. 내가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내 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한참 말을 하지 않으니 노인이 대화를 마음대로 정리했다.
"이만 가보겠소. 생각이나 해 보시오."
나는 대충이나마 이 사람들에게 반기를 들거나 돌발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수긍만 하면 섬 밖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잊을 것이다.
"아닙니다. 하던 대로 해야지. 하자고 하는 그대로 따르겠소."
"그럼 쉬시오. 혹시 상태가 좋아지면 바로 사람을 불러서 보내세요. 들것은 바로 치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다 나갔다. 나는 그날 밤 바로 떠나기로 했다.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나는 것보다 몰래 떠나는 게 낫고 그러자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을 놓았을 때 출발해야 했다. 몸이 좋아지지 않을수록 느려져서 중간에 붙잡힐 가능성이 컸다. 나의 계획은 단순했다. 섬의 가장 아래쪽에서 물에 몸을 싣고 폭포로 떨어지는 것. 이유? 이런 것도 이유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충동처럼 단순한 사실이었다.
다른 물건은 없이 단지 비스킷 한 묶음만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둘렀다. 물은 어차피 계곡을 따라서 내려갈 테니 목이 마르면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다. 비스킷은 이를테면 노잣돈 같은 것이었다. 폭포에 가는 길에 먹으려고 한다기보다는 폭포로 뛰어내리고 나서도 살아있을 경우에 연명하기 위한 준비물이었다. 그밖에는 챙길 것이 없었다. 뭐가 있는지만 확인하면 그냥 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니 말이다. 간단하게 사람들이 문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집 뒤로 돌아서 산을 향했다. 사실, 계곡으로 가려면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가장 가깝지만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 쪽으로 바짝 붙어서 걸어야 했다. 사실 사람도 별로 살지 않기도 했고, 이곳이 유일한 평지인지라 사람들은 굳이 산에 집을 짓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평지가 있었다면 집도 마음에 드는 곳에 지었겠지만, 관광버스를 수십 대는 세울 수 있을 만한 공터가 있고 다른 곳에는 공터가 전혀 없다면 결국 사람들은 모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30분 걷자 바로 산에 도착했다. 바위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거기서부터 계곡까지는 별로 걷지 않은 것 같다.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천천히 아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하다 싶으면 미끄럼을 탔다. 넘어질 것 같으면 바로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생각보다 편안했다.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물속의 돌멩이들은 미끌거렸으며, 물이 조금만 세게 흐른다 싶으면 넘어지기는 했지만 물이 많아 엉덩방아는 찧지 않았다. 몇 개 이어지는 폭포로 내려가도 물이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았고, 또 그만큼 뛰어내리는 데에도 충분했다. 오히려 재미있었다고 하면 거짓말일까. 아마 두어 시간 정도 걸렸을까? 그때쯤 옷이 모두 젖은 채로 섬의 아래쪽에 도착해 있었다. 물이 허리까지 오는 강이 한 백 미터 흐르고 그 뒤로 섬 밖으로 떨어지는 폭포였다. 그리고 그 폭포가 내가 죽을 곳이었다.
그래도 그냥 뛰어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물살을 타고 떨어지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서(절대로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짧은 통나무가 하나 있었다. 누가 자른 것은 아니고 커다란 통나무가 썩어서 몽당나무만 남은 것이었다. 게다가 안쪽도 썩어서 배처럼 움푹한 모양만 멀쩡했다. 들어보니 쉬엄쉬엄 한 30분만 옮기면 될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제법 가벼운 것이어서 다른 나무는 찾을 생각도 못하고 질질 끌고 옮기기 시작했다.
30분이면 옮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두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어느새 하늘이 약간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하늘은 살짝씩 작은 변화만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변화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은 시간이 지난 것이다. 언제 사람들이 집이 빈 것을 찾아낼지 몰랐다. 마음이 급해져서 입으로 "우, 하"하는 소리가 나는 줄도 모르고 나무를 질질 끌고 왔다. 물에 담갔는데도 무게 때문에 어느 정도 잠기기에 허리 깊이가 되는 곳까지 계속 끌고 왔다. 이곳은 바닥이 돌멩이가 아니라 모래여서 끌고 오는데 더 힘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되자, 허벅지 정도 되는 깊이에서 나무가 더 이상 가라앉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강 한가운데까지 끌고 온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아 보았다. 물밖으로는 간신히 가슴과 머리만 내밀 수 있었다. 그리고 다리를 들자, 그대로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금씩이지만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 누가 외쳤다.
"저기 있다!"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강의 끝에 도착했고 물과 함께 떨어졌다. 떨어지는 무중력상태의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서 만약 강의실에 있었다면 책상을 박차며 잠에서 깼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다음에 보게 될 장면이 너무 궁금해서 떨어지는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이 느낌은 무시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다시 엉덩이 아래에 있는 나무가 어딘가에 부드럽게 찰싹, 하며 닿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다음순간, 내 허리뼈가 두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순간적으로 굽혀졌다가 펴졌다. 나는 물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곳은 조금 전의 강보다 물이 조금 더 깊을 뿐 눈에 익어 보였다. 나무를 떠내려가게 놔두고 힘겹게 물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물속에 있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못 보던 광경을 둘러보았다. 이십 년 전 내가 올라왔던 꼭대기였다. 틀림없었다. 이십 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이 있다면 바로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했다.
그대로 마을까지 걸어 내려왔다. 그때 알았다. 이곳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맨 위의 샘은, 그러니까 그 위의 폭포수를 받는 그 연못은 포트 같은 것이었다. 죽으면 그곳으로 돌아오는. 그렇지만 단순한 죽음으로는 안 된다. 그곳에 방문한 적이 있으면서 아래 폭포로 떨어져야 다시 위 폭포에서 떨어져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 반복되는 삶이 행운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렇게 된 지 이천 년, 모두가 수많은 생을 살았고 모두 엄청난 지혜를 쌓았다. 우리는 이 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 기록이 없어도 모두의 기억이 하나같이 증명한다. 돌가루 하나하나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한 번의 생만 계속해서 반복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 사람들은 폭포로 뛰어내리기를 거부하고 한 번의 생만 살고 화장으로 마무리하기를 원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한히 같은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누적된 삶을 자랑하는 괴짜들로 보이겠지만. 몇 번이고 뛰어내렸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죽음을, 진정한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아쉽지 않다. 진정한 죽음이 편안하다고 해도 내가 돌아가면 그 사람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시간이 가면서 내 세대 이후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여기서 지혜를 쌓으면서 우리의 후세도 바뀌고 있을 거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삶이 천년, 이천 년 반복된다면 그 반복에서 벗어난 십 년 뒤도 엄청나게 바뀔 것이다.
두 번째 꿈
첫 번째 꿈의 웅장한 면에 비해 두 번째 꿈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나에게는 여섯 살짜리 딸이 있고 나는 매일 저녁마다 딸에게 창문의 방범창을 기어 오르내리는 법을 가르친다. 나중에 폭포로 떨어져야 할 때에 대비한 훈련이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밖에는 버스들이 서 있고, 언젠가 그 버스를 타야 한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마을회의에서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주에 마을회의에서 드디어 그때가 임박했다고 알려왔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모두 비밀통로를 통해 버스에 올라타십시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정확히 3분 만에 버스는 출발합니다. 그 안에 모두 버스에 탑승해야 하니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우리 아파트는 계단이 두 개다. 하나는 복도 밖으로 나 있고 하나는 층별로 쓰레기를 투하하는 구조물 안쪽으로 나 있어서 전자는 갈만 하지만 후자는 냄새를 극복해야 한다. 아파트는 3층짜리여서 계단으로 내려간 다음 지하로 달려가서 버스로 올라타도 충분히 시간은 확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호루라기가 울릴 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중팔구 밤에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자기 전에 어김없이 딸은 방범망을 기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훈련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인사하고 침대에 가서 잠이 들었다. 마을회의에서 탈출이 임박했다고 하기에 달리기 훈련을 하루종일 한터라 딸은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나도 잠자리에 들려고 불을 껐다. 호루라기를 불면, 버스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버스로. 그런데 호루라기를 부는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를 모르겠다. 그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있었으니 탈출해야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이 들었나 보다. 문득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리듬에 맞추어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그러다가 그게 휘파람이 아니라 호루라기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창밖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빨간 불빛이 마구 흔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후레시 불빛이지만 꿈에서는 당시 뭔지 알 수 없었던 강렬한 불빛도 있었다. 놀라서 잠에서 깼는데 그때 힘껏 불던 호루라기 소리가 딱 끊겼다. 나는 놀라서 바로 딸을 깨웠다. 여섯 살짜리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었다.
"지금 가야 돼. 초콜릿만 챙겨서 얼른 나가."
"아빠는요?"
"지금 어떻게 될지 몰라.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다가 멈췄어. 우리 둘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으면 누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했지?"
"저요."
딸은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벌써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뛰어가."
딸이 미적거렸다.
"빨리!"
딸이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가 두세 발자국만 들리고 멎은 듯했다. 소리 없이 앞꿈치로 뛰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야지, 안 그러면 버스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 혼자 서 있을 수도 있다.
그때였다. 창문으로 버스를 보며 딸이 제발 버스가 문을 닫고 출발하기 전에 도착했기를 빌었는데, 버스들이 동시에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서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 소리도 들렸다. 버스 안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파트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몸이 굳어서 조그맣게 신음소리만 냈을 뿐이었다. 내 딸이 저 안에 있을까? 아니면 가는 길일까? 모르고 앞에서 문을 열었다가 불길에 쓸데없이 휩싸이게 될까? 심장이 마구 고동쳤다. 머리에 흐르는 혈관들이 모두 뛰는 것 같다. 나는 정신없이 문을 열고 나가서 쓰레기 버리는 곳 옆의 비밀통로를 열고 계단으로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도 냄새가 느껴질 정도면 평소 같으면 쓰레기를 버리자마자 문을 닫아버린 것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 안에서 뛰고 있는 것이다. 딸이 이런 곳을 힘겹게 뛰면서 통과해서 간 결과가 불에 타 죽는가라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딸이다.
"왜 여기 있어? 버스로 안 갔어?"
"버스에 가는데 은지가 버스에 불났다고 다시 들어가래요."
"맞아. 버스에 불났어. 잘 왔어."
나는 딸을 끌어안았다. 이제 집으로 다시 가서 좀 씻겨야겠다. 그때였다. 밖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며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주민 목소리가 아니다. 뛰어다니는 소리도 보통 일상화가 아니라 군홧발 소리다.
"탈출한 지 얼마 안 됐어! 보이면 쏴!"
"내려다보고 잘 겨누고 있어!"
"복도에도 있고 일부는 집안에 숨어!"
나는 딸을 다시 껴안았다. 여섯 살 짜리는 아빠가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에서 당분간 그대로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이들이 철수를 하기나 할까? 이들은 누구일까? 버스는 어디를 향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섯 살짜리 딸은 눈앞에 없었다. 현실의 형광등이 천장에서 나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