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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Nov 11. 2024

강의실에서

문학 이론은 평소에는 그다지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아는 후배로부터 문학이론강의 같은 것이 생겼는데 혹시 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강사가 얼마나 유명한지와 관계없이 딱히 그걸 듣겠다고 시간을 비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단순한 시 분석이나 소설 독법 같은 딱딱한 주제가 아니라 어떤 글을 읽고 그 글을 내 문체에 흡수하는 방법론에 대한 강의이고 많은 작가들을 그들이 남겼던 '꼭 읽어야 할 책 목록'이라던가 인생책이라고 추천한 작품과 연계하여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이 포함되었다는 말에, 그리고 4주간 매주 토요일마다 이루어지는 짧은 강의라는 데에도 솔깃해져서 불과 이틀 만에 전화해서 수강신청을 하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강사는 현재 학교 안에서도 인기가 많은 교수라고 했다. 그래서 교양과목도 그 교수가 강의하는 과목은 이미 이수했더라도 다른 교수에게 수강한 경우라면 기회가 면 다시 들어보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아서 늘 필수 과목보다 먼저 수강신청이 마감된다고 한다. 나도 모교에 오랜만에 가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요즘은 대학 건물들도 함부로 드나들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니 말이다. 아무나 졸업생이라고 말만 하면 강의실이고 과 사무실이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문제이니 졸업생이 등록금도 내지 않는 주제에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가는 것이 권리라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게 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강의 수강이 확정되었다는 문자는 수강신청을 하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나서 월요일 오후에 왔다. 어차피 나는 학점이 필요 없지만 이미 5학점짜리 강의기 때문에 계절학기에 준하는 비싼 수강료는 입금해야 했다. 이메일에 입금 계좌번호와 그 밖의 주의사항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뭔가 지나치게 자세한 느낌이어서 프린트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 이름은 이민정. 남자 교수였다. 책도 다섯 권이나 썼다. 전공 서적인 건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책들이다. 강의실은 학생관 지하 1층이라는데, 내 기억에 학생관 지하에는 학생식당만 있었던 것 같았기에 미리 한 번 가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금증은 프린트물은 인정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은행에 가서 입금을 하고 도장 찍힌 입금증을 가지고 학생생활지원센터로 가지고 오라고 되어 있었다. 기한은 다음 주 수요일까지이고 다음 주 토요일부터 강의 시작이었다.
곧바로 지도를 열어서 확인해 보니 학교 위치가 바뀌었다. 생전 가볼 일도 없었던 곳에 학교가 있다. 원래 학교가 있던 곳을 보니 거기는 이미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가 이전을 하면, 그것도 서울 시내에 있는 학교가 옮긴다고 하면 뉴스에 나오고 그러지 않나? 비록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 별로 떨어진 거리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습게도 학교 정문 건너편에 있던 은행도 지금의 학교건물 바로 건너편에 다시 따라와 있었기 때문에 일처리도 그다지 어려울 건 없어 보였다.
바로 다음 날 휴가를 내고 학교를 찾아갔다. 아홉 시에 맞추어 은행에 들러서 수강료를 입금했다. 이메일을 보여주자 이미 그 강의 이름과 내 이름이 찍힌 납부증/영수증을 출력했다. 이체확인이 되자 그 영수증과 납부증에 각각 도장을 찍고 가운데를 찢어서 나에게 주었다. 오전인데도 사람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수강료 하나 납부했는데도 열시가 넘었다. 곧장 길을 건너서 학교로 향했다.
내가 나온 학교는 학과별로 건물들이 죽 늘어선 형태였는데, 여기는 무슨 시청이나 정부청사건물인 양, 혹은 병원인 양 옆으로 넓고 십오 층이나 되는 하얀 건물 하나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에서도 한참 걸어 들어가자 양쪽으로 루브르 박물관 사진에서 본 것 같은 푸르스름한 유리로 된 피라미드가 하나씩 솟아 있었는데, 피라미드의 한쪽 면으로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피라미드들 가운데를 지나서 건물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모든 유리문마다 권위적으로 학교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정말 병원 건물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내 기억에 우리 학교에는 의대가 없었다. 하긴 위치를 옮기고 이런 건물을 지어 올려도 몰랐는데 의대가 생겼어도 내가 알고 있었을 리가. 그리고 의대가 생겼으면 병원 건물이겠지 학교 강의실과 교수실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리도 없고.
하도 정신이 없어서 가운데 인포메이션 센터라고 되어 있는 곳에 층별 안내가 붙어 있기에 가까이 가서 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학생생활지원센터? 거기로 오라고 돼 있어서요."
경비아저씨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지금 서있는 방향에서 왼쪽 말고 오른쪽으로 쭉 가시면 엘리베이터가 세 개 있는데, 거기서 제일 안쪽 엘리베이터에 '학생생활지원센터 전용'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그거 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너무 생소해서 나도 모르게 꾸벅하고 인사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에는 나 말고도 세 명이 더 탔는데 두 명은 누가 봐도 학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둘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튕기듯 달려가더니 내가 창구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학생증을 받아 들고 미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다시 올라타고는 내려가 버렸다.
수강료 입금 영수증을 보여주자 두꺼운 코팅지에 인쇄한 강의 설명서를 주었다. 강의 설명서 오른쪽 하단에는 하얀 네모칸이 쳐져 있고 거기에 카드가 하나 붙어 있었다. 강의는 학생회관 지하 1층이 맞는데, 학생회관은 학생들만 들어올 수 있도록 본관 안에 있고 학생회관 지하는 아까 내가 보았던 피라미드 모양의 덮개 밑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있는 공간모양이었다. 강의설명서에 붙어 있는 카드가 출입증이라고 했다.
"강의 마지막날 카드 반납하면 되나요?"
"아니요, 그건 그냥 가지셔도 되고 버리셔도 돼요."
본관 키가 아니라서 별도로 관리하는 모양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왔다. 점심을 가볍게 먹고 양치를 하고 지하철을 탔다. 오후 두 시부터 강의가 시작하기 때문에 한시 반까지 도착해서 앉아 있으려고 해도 시간에 부담이 없었다. 학교 앞에 가자 지난번 방문했던 평일과는 달리 사람이 매우 많았다. 평일에는 다들 강의를 듣느라 건물 안에 들어가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주말이라고 다들 밖에 있는 것도 의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때 학교 앞 상권을 생각해서 그렇게 짐작했을 뿐 사실 대학 건물이 옮겨가면 학생들이 원래 술을 마시러 가던 곳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상권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바로 납득이 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을 찾아보았다. 자유롭게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이던 계단이 사실은 일단 카드를 찍고 문을 열어야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천장은 푸르스름한 유리로 된 피라미드인데 문은 그냥 투명한 유리어서 미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하로 내려가자 밝은 LED 조명 덕분인지 푸르스름한 유리로 들어오는 햇빛과 조화를 이루어서 실내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다. 계단에 내려오자 라면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본관 방향으로 저쪽 끝에 매점이 있었는데 라면과 떡볶이도 팔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한두 명만 먹고 있어도 냄새는 똑같이 날 테니까.
강의실은 '오픈강의실'이라고 해서 세 개가 있었다. 나처럼 외부인도 들을 수 있는 강의는 보통 여기서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음식 냄새가 나는 곳에서 강의는 좀...이라고 생각했지만 두꺼운 나무문을 밀어서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문이 딱히 스프링이 없는 것 같은데 알아서 닫히는 것을 보니 어디선가 공기를 끌고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공기가 강의실로 들어온 다음 복도로 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라면 냄새나 떡볶이 냄새가 강의실로 들어올 수 없는 구조인 셈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쓴 작품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편이라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 맨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 줄에는 열두 명이 앉게 되어 있었는데 한 칸씩 띄우고 앉아서 여섯 명이 앉았다. 맨 앞줄에는 이미 여섯 명이 꽉 차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둘 줄에 앉는데 사람이 모두 들어왔을 때 보니 일곱 번째 줄까지 꽉 차 있었다.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듣는 강의를 수강 신청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다시 기분이 좋아지면서 마치 대학시절 학기 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강의는 평범했고 교수의 말솜씨도 좋았다. 둘째 주까지는 아무 일이 없이 재미있는 강의의 연속이었다. 네 시간짜리 강의였고 자유롭게 화장실에 드나들 수 있었지만 얼마나 일 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지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
문제는 셋째 주였다.
첫 번째 주에 앉았던 자리에 모두 계속해서 앉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졌는데, 내 바로 앞에는 재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의자를 앞뒤로 마주 보고 하는 토론 비슷한, 그렇지만 토론은 아니고 단순히 문장을 만드는 연습을 몇 번 했었는데, 그날도 그럴 예정이어서 첫 번째 시간에 강의를 듣고 다시 홀수 줄의 책상을 앞뒤로 돌려놓고 여학생이나 나나 마주 본 자세로 둘 다 핸드폰 들여다보는 상황이었다. 그때 왼쪽 끝에서 비명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라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남자의 비명이자 신음 소리 같은 것이었다. 둘째 줄이나 셋째 줄인 것 같지만 알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더니 몸을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면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학생들이 무슨 일인가 보려고 다가가려고 하자 교수가 소리쳤다.
"가까이 가지 마! 저런 일이 있으면 와서 봐주겠다는 말을 미리 한 사람이 있어! 가까이 가지 말고 그 자리에 계세요! 나가야 하면 바로 얘기할 테니까 나갈 수 있게 준비하고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일 분인가 지났을까, 노트르담의 꼽추에 출연한다면 아무 분장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콰지모도 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의 아저씨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바로 쓰러진 아저씨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손! 손"
이러고는 도망가 버렸다. 교수는 왠지 안도한 것 같은 표정이면서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뭔지 알겠네요. 일단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급차는 혹시 모르니까 일단 119에 신고해 주세요."
어떤 남학생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신고하는 것이 들렸다. 교수가 말을 이었다.
"이거, 무슨 감염증 같은 건데 내가 불을 제일 어둡게 할 테니까, 상대방에게 보이게 입을 크게 아, 하고 벌려서 보여주세요. 별거 없으면 된 겁니다. 근데 뭐가 났다거나 하면 얘기해 주도록 하세요. 아마 없을 것 같기는 한데, 혹시나 해서 해보는 겁니다. 한 번씩만 하고 수업 계속하도록 하지요."
그래서 내가 먼저 크게 입을 벌리고 여학생이 들여다보았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뭐가 있었냐고 표정으로 묻자 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학생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다시 다물려고 하는데 입속에 아기의 손 같은 것이 보였던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무난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내가 뭔가 잘못 봤겠지, 하고 모른 척했다. 어쩌면 그때 이미 무서운 기분이 들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러댔다.
"손! 손가락! 주먹! 너 뭐야?"
그리고 도망가려는 듯 책상과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가 우당탕탕 났다. 그 이후로는 소리만 들어도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입속에서 나온 손이 마주 보고 있는 남자의 턱을 잡은 것이었다. 남자는 입 속으로 들어온 네 손가락을 깨물어서 끊으려고 마구 턱에 힘을 주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손가락이 끊어지지 않는 듯했다. 나는 공포에 질린 채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칠판을 쳐다보았다. 그때 여학생의 입에서 손가락 하나가 나왔다 들어갔다. 입속에 있을 때는 아기 손 같았는데 나왔다 들어간 검지손가락은 어른의 것만큼이나 굵고 길었다. 나는 다시 못 본 척하고 칠판을 보려고 했다. 시선을 느끼고 여학생의 눈을 보자 여학생이 보고 웃었다.
"봤죠? 본 거죠?"
그리고는 활짝 웃었다. 일부러 무서운 모양을 만들려고 하는 일본 애니나 영화에서처럼 입이 찢어지듯 웃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일반 학생처럼 청순한 미소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안에서 손가락들이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뒤에서 소리 지르던 사람은 계속 손가락을 무는 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아~'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턱이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는 여학생도 입을 벌렸다. 입 속 저 멀리서 앞으로 나오는 손이 보였다. 내 옆에 있는 남자도 앞줄에서 뒤돌아보고 있는 남학생을 향해 입 속에서 손을 뻗고 있었다. 교수가 문을 활짝 열었다. 구원군이 오는 건가 하고 희망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내 옆에 대각선에 앉아 있던 남자도 같은 표정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교수가 크게 외쳤다.
"됐지? 이만큼이면 나는 할 만큼 한 거지? 이제 나는 내버려 두는 거지?"
그 말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순간 강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때 나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이었으면 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손이 내 얼굴에 닿기 전에 깨어나야 한다고 온몸으로 소리를 쳤다. 몸부림을 치자 LED시계의 조명이 느껴졌다. 마침내 현실에서 눈을 떴다. 나는 손가락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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