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5., 이스탄불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그대로 공항을 향해 지하철을 탔다. 이스탄불에 언제 또 올까 싶지만 딱히 미련은 없다. 단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드는 정도? 페라 팔라스의 에스프레소 잔세트도 약간 탐이 나기는 했지만 어차피 한국에서는 환경이 다르므로 잔 세트의 가치도 그저 다른 커피잔들과 거기서 거기인 셈이 될 것 같아 생각 끝에 접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집에 있는 타자기로도 종종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구를 바꾸는 것도 하나의 '글 쓰는 장소', 즉 환경을 바꿔가는 것일 테니.
마침 공항에 온 김에 전통적인 건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커피를 시켜 놓고 한숨 돌리다 보니 갑자기 생긴 여유에 딴생각이 든 거지만.
절을 보자.
큰 대문 그리고 대문. 마당 석탑들, 그리고 기능에 따라 배치된 건물들, 그리고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 대웅전이 있다.
조선의 궁궐을 보자.
큰 대문, 그리고 대문. 조정이 열리는 마당과 조정 건물, 그리고 그 뒤와 옆으로는 기능에 따라 배치된 더 작은 건물들이 있다.
성당을 보자.
대문, 마당 그리고 대문. 성수대, 고해소, 신자석, 전례석, 제단과 제대, 감실과 십자가가 있다.
전통적인 건물들은 이렇게 의미에 따라 구역들이 나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대부분 2차원 평면 상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감각적으로 그 의미를 점차 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배치된다. 그렇지만 의미가 전부는 아니다. 절과 궁궐처럼 비교해 보자면 실용적인 목적에 따른 배치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사실 그 용도라는 것들 중에 의미를 나타내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바로크 양식의 성당에서 점차 감정을 고조시키는 십자가와 제단이 있는 구역, 절에서 무게 중심을 잡는 대웅전의 구역은 감정 고양이라는 특정한 용도의 일부가 된다. 다른 일부는 그곳에서 행해지는 나름의 의식(행사) 용이 된다. 그 의식들이 주 용도라도 사실 반드시 그것들이 그곳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의식이라면 어떤 곳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의식을 통해 어떤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하는지 알고 그 마음을 보다 쉽게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민 끝에 의식의 장소를 그곳에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공항의 커피숍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옆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보니 "Yellow Car Park Area", "Purple Car Park Area"라고 쓰여 있었다. 주차타워였다. 공항은 사실 용도에 따른 공간의 초밀집 결정체이다. 주차 구역도, 출입국 구역도, 수속 구역도 그 기능 하나하나가 공항의 고유한 기능들이고 구획을 나눔으로써 그 구역들이 한 공간 안에 퍼즐 조각들처럼 공존할 수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활주로, 주행구역, 게이트 구역, 건물. 이것은 종교적인, 혹은 권위적인 건물을 들어갈 때와 유사한 형태로 풀어쓴 <비행기의 입장에서 본 공항의 구조>이다. 도로, 출입구, 수속구역, 입국심사구역, 보안검사대, 출국심사구역, 면세구역, 항공기게이트. 이것은 <승객의 입장에서 본 공항의 구조>이다. 그리고 같은 건물이라도 엔지니어나 직원들의 관점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구조를 띨 것이다. 그러나 이 구조들이 실제로는 한 공간 안에 모두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비행기 게이트와 공항의 승객 게이트까지 모두 한 건물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조립한 공간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공항 내 어딘가에는 별로 사람이 많지 않은 곳과 미어터지는 곳이 항상 있을 만큼 꼭 공간 배분 자체가 효율적인 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서로 다른 건물이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커다란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불당이라는 이름의 공간이 이리저리 연결된 모양의 절이 있다면 어떨까? 지금처럼 단순한 모양이 아닌 성당은? 신자석 뒤쪽을 복층으로 만들고 그곳에 성가대가 위치하는 형태는 많이 있지만 그런 것 말고, 십자가와 제단이 무게 중심을 차지하되, 기능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다른 공간과 완전히 섞여 있는 형태는? 십자가와 제단이 건물의 중심이고 십자가 뒤편으로도 파이프오르간 연주석이라던가 고해소 같은 고유한 기능의 공간이 위치하는 형태라면? 그러면 공항처럼 서로 다른 기능의 공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듯 연결될 것이고 효율성은 훨씬 올라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둘러싸는 형태는 마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미로처럼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감정의 고양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천국제공항에서도 수속 구역의 식당에서 면세 구역을 내려다보면서 여행게의 기대가 점점 올라가는 걸 생각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아닌 것 같다. "전통적이지 않다"는 꼬리표만 조심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