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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커피빈에서 글을 쓰던 날

by 루펠 Rup L

이야기를 쓰다 보면 이야기의 내용에 휘둘리게 될 때가 있다. 작가들은 단단히 고삐를 잡듯이 앞으로 보면서 방향을 일정하게 유지할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은 바쁘게 앞만 보면서 지금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방향이 맞는지 등을 일일이 주먹구구식으로 파악하는 것뿐이다. 말을 타면서 멀리 큰길의 사거리를 보고 우회전 준비를 하면서 슬슬 무게중심을 옮기는 기수가 있는가 하면 당장 내가 앉은 자세가 맞는지, 더 빨리 가도 되는지 등등을 노심초사하면서 처음부터 끝가지 머리로 생각해야만 하는 초보의 차이랄까.
아내와 함께 커피빈에서 마주 앉아 까망베르치즈 조각케이크를 카모마일 티와 함께 시켜 놓고 글을 쓰는데 글도 다 쓰고 다시 읽어볼 때까지 제대로 된 줄거리도 없이 머릿속에서 우왕좌왕했고 케이크 맛은 카모마일과 잘 어울리는 것 같은 정도만 기억나고 식감 같은 건 음미할 새도 없이 물리적으로만 씹고 삼켜 버렸던 것 같다.
오늘 글을 쓰면서 알리에서 구입한 60자루 볼펜 중 첫 번째가 잉크가 다 떨어져서 버렸다. 한 자루에 수첩에 한 50페이지 정도를 쓰는 잉크 양이 들어있는 듯싶다. 처음에는 잉크도 잘 나오지 않아서 꼭꼭 눌러서 써야 했고 원래 슬라이드식으로 옆으로 돌려서 심을 넣었다 빼었다 해야 하는데 너무 뻑뻑해서 싸구려 프라모델 로봇의 어깨를 돌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써서 두 번째 자루를 꺼내 쓰니 심을 꺼낼 때도 너무나 부드럽게 "딸깍"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고 볼펜도 꼭꼭 눌러서 쓰지 않아도 너무 편하게 글씨가 잘 써지는 것이었다. 원래 싸구려라 이상한가 보다, 그래도 싸게 사서 쌓아 두었으니 버려도 부담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멀쩡한 것도 들어 있는 걸 보니 다시 '싸구려라 그 안에서도 뽑기 운을 많이 타는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볼펜이 잘 나와서 손에 힘이 덜 들어가니 그다음부터는 글도 신나게 쓰게 되었다. 내용은 차치하고 그냥 물 흐름을 막지 않는 그런 부드럽게 진행되는 느낌. 볼펜의 상태를 따라서 앞부분보다 뒷부분이 더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쓰기가 좀 더 쉬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카페의 한쪽 끝에서는 노인들이 술 마시고 와서는 큰 소리로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떠들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볼펜을 바꿀 때가 그들이 음료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가면서 젊은 직원에게 반말로 이거 아느냐, 저거 아느냐 하면서 아는 척을 잔뜩 할 때였다. 기차에서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장면이었는데, 뉴스의 아나운서나 기자가 하는 말을 모두 옮기듯이 쓰는 게 나을까 그냥 요약을 하고 새로운 줄거리를 짜볼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걸 요약하면 결국 글을 쓰기 한 보름쯤 전 처음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요약해서 적어 두었던 것과 거의 다를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대로 써 보기로 했다. 그리고 반말을 듣고 줄거리의 흐름을 놓친 것은 의견을 개진하는 교수와 아나운서와의 대화에서부터였다.
수첩도 한 면에 쓰기로 하고 다 쓰면 뒤집어서 나머지 한 면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수첩을 뒤집어서 쓰기 시작한 것도 공교롭게도 이때쯤이었다. 즉 맥주를 주문하는 장면에서 수첩을 다 써서 뒤집어서 다시 쓰기 시작했고 조금 후에 노인들이 내 자리를 지나 (아직도 큰소리로 서로 욕설을 주고받으며) 밖으로 나가고 있을 때였고 뉴스에서 초대석에 앉은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할 때 볼펜을 교체해서 글씨가 급격히 가늘어졌다. 그 와중에 우리 옆테이블에 있던 커플도 나갔는데 그들이 언제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의외로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생각보다 중독성이 있다. 다시 컴퓨터로 옮겨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일단 글이 있어야 하고 쓸 수 있어야 하니 이것이 최선인 듯싶다. 옮겨서 다시 치는 것도 글이 다듬어지니 불편함이 걸림돌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말타기 자세에는 익숙한 기수처럼 글쓰기 자체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이제 독자들이나 그 밖의 환경, 문체 같은 것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리라. 그러나 그건 시간이, 글을 쓰는 시간이 누적되면 저절로 되는 일이다. 익숙함이라는 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하는 건 익숙함이라 하지 않고 훈련이라 한다. 총을 들고
'아, 손에 잡히는 이 익숙함'
이라는 말은 존 윅이나 하는 말이다. 군인은 그저 훈련한 대로 기계적으로 총을 든 손을 움직일 뿐이다. 나는 글쓰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기계처럼 훈련하고 싶지도 않고 멀어지기도 싫다. 하루하루 글쓰기도 추억이 되는 나날이 오늘처럼 쌓여가면, 그렇게 쌓인 무더기는
뭐라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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