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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by 루펠 Rup L

글은 읽히기 위해 쓰여진다. 모든 인공물은 목적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연물은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지만 인공물은 최소한 '만드는 재미'라는 이유라도 있게 마련이다. 글이라는 인공물은 의사소통의 도구이고 여러 면에서 말과 다르지만 또한 여러 면에서 말과 닮았다.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가 재미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 아무거나 글자를 조합한 무언가를 만들어낸 거라면 뭐든지 올려도 되는 블로그를 이용하면 된다. 잘게 찢어서 SNS를 사용해도 된다. 누군가 읽고 공감을 하거나 재미를 느꼈으면 싶은 글들이야말로 <글자를 조합한 무언가>가 아니라 글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적어도 내 글에 대해서만이라도 나 자신이 그 정도 교통정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좋은 건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글은 아예 손으로도 쓰지 않는 것이다. 일단 종이에 쓰여진 것은 어쨌거나 다 읽을 때까지는 다른 글들과 모양 면에서는 똑같으니 읽기를 원하지 않으면 글의 형태조차 부여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글이 아니라 말조차도 쓸데없이 내뱉는 조각이 얼마나 많은가. 회식 자리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자리가 끝날 만하면 새로운 주제를 끌어오고 끝날 만하면 새로운 주제를 끌어오는 '말을 위한 말'에 참다못한 직원들이 차장과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건 말건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 적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던 부장을 한 명 안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서 듣고도 쓸데없다는 생각이 드는 말이 있듯이 다 읽고 나서도 그 끝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내가 지금 왜 내 시간을 할애해서 이런 걸 읽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짜증이 나는 글도 있는 법이다.
그냥 쓰는 게 좋아서 쓴 글이 아니라 읽는 게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게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글을 쓰려면 그런 글이 나오는 나만의 패턴을 찾을 때까지 써 보아야 한다는 함정이 있다. 나도 그냥 정보를 전달하는 용도만 있는 글을 덮어 놓고 블로그에 올리던 시간들이 있었고 그게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비추어 보면 도움이 되는 시간도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쓴 글이 남에게 읽힐 영광을 입을지, 혹은 어떤 글을 남들 앞에서 숨겨야 하거나 아니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와 같은 구분에는 말이다. 지금도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다 공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글 한 편을 쓰고 고민하고, 올리기 전에 읽을 만한 글로 변신시키겠다고 여기저기 손보기도 한다. 그래도 모든 과정이 즐거운 건 아직도 초창기여서인지 아니면 내게 맞는 작업이어서인지 모르겠다. 후자이면 좋겠다고 당연히 기대는 한다.
눈이 오는 도로를 걷다 보니 머릿속에 아이디어도 어느 순간 눈처럼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가 바로 접었다. 눈이라고 해서 매일 내리는 게 아닌데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일단 볼펜을 든다거나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내려올 시기만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는 건, 그 글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시작했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각의 흐름을 조심스레 따라가는 재미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글의 시작, 그 생각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내가 짓고 싶은 글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AI가 만든 글은 AI가 만든 것이지 누가 시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AI를 이용한 저작물은 그 AI 회사에게 저작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A라는 사업가가 B라는 소설가에게
"무림 고수들이 대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거기에 외계인들이 불시착해서 벌어지는 혼란을 주제로 글을 써봐, 잘 나갈 것 같은데."
라고 제안을 하면 그 글의 저작권이 A라는 사업가에게 전적으로 있게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만약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그것을 우리는 불공정계약이라 부른다. 그러나 상대가 소프트웨어라서 괜찮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의 기준을 바꾸는 순간은 오직 우리 자신이 불리해질 때뿐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잣대가 적용되는 건 몰락의 표지이다. 나는 AI에 의해 만들어지는 글이 그럴듯해진다고 해서 사람이 쓰는 글이, 혹은 내가 글을 쓰는 일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더 다양해질 뿐이다. 너도나도 쉽게 인공지능을 착취해서 글이 흔한 싸구려 장식품이 되지 않는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글 쓰는 게 좋다고 외치는 그런, 혼자 산에서 외치는
"야호"
같은 글 말고 앞으로 펼쳐질 다양성 속에서도 읽어 보라고 내밀 수 있는 글을 써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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