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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글

by 루펠 Rup L

내면과 외면이라는 주제.

글은 결국 표현일 뿐이다. 그림도 표현이고 노래 역시 표현이다. 부르는 것은, 혹은 연주하는 것은 작곡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림과 글은 작품이 만들어진 당시 그대로 감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작곡의 축에 속한다고 해야 할지, 작곡에서 연주까지가 하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이겠지. 그렇다면 그림이 스스로의 색과 모양을 내보임으로써 감상이 가능하다고 하면 연주까지가 음악을 이루는 요소인 것과 같이 글 역시 독자가 읽는 행위를 하는 데까지가 글의 영역이지 않을까? 그림은 누군가 보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감상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지만 음악은 만들어내고 다시 연주를 해서 그 연주를 들어야 비로소 감상이 가능하고 글은 글자를 해석해서 머릿속으로 장면이 만들어지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고.
이런 것은 단지 표현 방식의 차이기 때문에 솔직히 관심사는 아니다. 혼자 이리저리 생각을 하면 재미있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그뿐, 나에게도 도움이 될 것도 하나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보다는 그 작품 이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개념은 있었지만 아직 작품은 없는 상태. 작품이 작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상태. 처음 머리에 번뜩이는 뭔가가 생각난 시점부터 작품을 완성했다고 선언하기 전까지의 기나긴 과정 전체가 작품 이전이다. 그중에서도 그 번뜩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씨앗이 없이는 그 과정 전체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술 작품들을 보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이동진 평론가가 유튜브인지 어느 방송에서 한 말을 편집해서 올린 것을 보았다. 요약하자면, '오랫동안 받아들이는 인풋이 없이 가지고 있는 것만 계속해서 써먹는다면 언젠가 고갈되어 버리고 만다' 같은 말이었다. 위대해 보였던 이들이라도 언젠가 그렇게 바닥을 드러내면 더 이상 방송이나 강연에서 불러주지 않는데, 오랫동안 그런 명예에 익숙해지다 보니 공부를 하지 않아 본업에서도 한계를 보이게 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나왔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나 때는 말이야'도 같은 종류이지 않은가.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산업계 전반에서도 계산기에서 엑셀로 바뀌고 손글씨에서 타자기로, 다시 컴퓨터로 바뀌고 있었는데 그 과정을 보면서도 내 인생 하나만큼은 옛날의 어느 시점에서 캐온 이야기로 대표하려고 한다는 건 사실 멍청하다기보다는 오만한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내 경험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사실 하나만 기억하고 있더라도 그렇게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그 말이 내 마음을 찌른 이유는 인풋이라는 단어가 새삼 반갑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에는 세상으로부터의 자극이 필요하다. 그 자극이 숙성되어 소재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미 머릿속에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경험이 바탕이 되고, 공부한 내용이 그 위에 깔리고, 혹은 그 공부한 내용이 경험과 버무려져서 단단한 콘크리트가 되어야만 그 위에 세상을 보는 관점이 생기는 것은 맞지만, 그 관점 역시 세밀하게 조정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표현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공부한 내용과 경험들은 기본적인 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관점의 수정에도 꽤나 유용하다. 시간이 지나서 같은 것을 보는데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변화를 내 관점을 수정하는 데에 적용했다는 완벽한 증거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같은 것을 볼 때마다 똑같이 느낀다면 내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니까.
세상은 변하고 있으니 그 세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해석의 방식은 저절로 바뀔 수밖에 없다. 변화하는 세상을 적용해서 관점이 바뀌고 그 바뀐 관점을 사용해서 세상을 바라보는데, 세상이 달라졌다면, 표현 역시 영원히 바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파리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읽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내 가련한 영혼을 번역해 보려 합니다. 만일 그 사이에 그 영혼이라는 것이 죽어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내 영혼은 세상의 변화를 짊어진 내 생활을 반영할 텐데 그것을 번역하면 무엇이 나올까. 내가 세상을 보면서 쉼 없이 인풋을 넣어주고 그렇게 변화해 가는 나를 렌즈 삼아 글을 쓰려고 하는데, 그 글은 과연 내 영혼의 순수한 번역일까 아니면 영혼의 번역이 다시 세상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가공물일까.
그러고 보니 세상을 보면서 그것에 비추어 내 안에 있는 것을 남기는 것이 글인데, 과연 그것이 영혼에서 나오는 말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혼은 그토록 깊은 곳까지 무사히 파 들어갈 만큼은 단단하지 않다. 세상을 보면서 느낀 것들과 경험한 것들과 읽은 것들을 뭉쳐서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기초를 쌓았고 그 위로 거대한 프리즘을 설치했고 세상의 방향에 따라 각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서 나오는 것을 글로 쓰는데, 영혼의 번역이라면 순수한 영혼이 아니라 영혼을 이루는 그 기초를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처음은 과연 어디일까. 최초의 문장은 내 머릿속 어디에 있을까.
지금 기억하는 내 어린 시절 처음 문장은 이것이다.
"도망가!"(다섯 살 때,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자, 이제 1986년이니까, 5만 지우고 6으로 다시 쓸게."(유치원 선생님이 칠판의 날짜를 고치며)
"안 갖고 놀면 이 장난감 다 버릴게."(꿈속에서 엄마가)
실제로는 기억도 안 나는 수 없이 많은 문장들이 지반을 이루고 있겠지. 그것들을 모두 제치고 파 들어가서 나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영혼일까? 그렇다면 그것도 세상이 변해가면 다르게 보일까? 아직은, 아직은 그곳까지 들여다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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