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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갈패드와 연필

by 루펠 Rup L

리갈 패드라고 한다. 노란 종이에 파란 줄이 가 있고 왼쪽에 빨간색 세로줄이 있으며 맨 위에는 가로로 두꺼운 종이가 있어서 한 장씩 찢어서 쓸 수 있게 해 놓은 종이뭉치. 아마 대학교 때, 리포트를 쓰기 전 연습지로 쓴 이후로 처음으로 구입한 제품일 것이다. 수첩이 보통 다이어리 크기일 때는 글을 잘 쓰지 않았지만 수첩을 손바닥으로 잡을 만한 크기가 되니 밖에서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렇지만 수첩 크기가 너무 작은 까닭에 굳이 집에서까지 움츠려서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주문한 리갈 패드였는데, 의외로 수첩과 짧은 볼펜 조합이 밖에서 보이는 케미만큼이나 리갈 패드와 연필 조합이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고 좋은 것 같다.
볼펜을 쓰다가 글이 막히면 중간에 돌리는 부분을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심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연필을 사용할 때는 그저 연필을 깎으면 그만이다. 오래 깎을 필요도 없다. 서걱, 하는 소리로도 충분하다. "깎이는구나'를 느끼는 순간 연필은 기뻐하며 즉시 다음 문장을 내놓는다.
이 노란 종이가, 3월이 되어 찾아간 새 교실처럼 이제부터 실내에서는 내가 찾아갈 새로운 글틀이다. 수첩에서보다 글이 더 잘 써지면 좋겠으나 '더 잘'이라는 것의 기준이 모호하니 더 못써져도 무방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단지 수단, 도구가 바뀌어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화장대의 형광등을 밝히고 화장대가 책상인 양 리갈 패드 위로 사각사각 거리며 연필이 지나간다. 초등학교 때의 기준이라면 하이샤파 연필깎이에 넣고 뾰족해질 때 알아서 손잡이를 돌리는 느낌이 헐거워질 때까지 돌렸어야 했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연필을 돌리면서 깎아야 하는 연필깎이이다. 연필의 양쪽을 깎아서 쓰고 있어서 조만간 몽당연필이 될지도 모른다. 연필에게는 억울한 이야겠지만 나에게는 그 협박이 통하기는커녕, 몽당연필이야말로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훈장 같은 게 아닌가 싶어서 내 연필은 언제 저렇게 짧아질까 내심 기다려왔던 차다. 연필에게는 아쉽겠지만 평안은 쉽게 찾아오는 법이 없다.
어차피 몽당연필 시절까지 지나고 나면 세상을 떠날 텐데 수없이 많은 동료 연필들에게 들은, 글 잘 쓰는 작가의 특징 같은 이야기 하나 내게 들려줄 생각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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