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본...
예전에 쓴 비슷한 글이 있다.
지금까지 가본 카페 중 글 쓰기 가장 좋은 곳은 남영역 근처에 있는 <오하요 도넛>이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기 좋은 곳도 많았지만 '책만 읽기 좋은 환경'과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좋은 환경'이 다르다는 것은 무척 특이한 일이다.
프랜차이즈 카페는 대부분 책 읽기 좋았지만 개중에는 지점에 따라 조도 때문에 책 읽는 게 눈에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은 곳도 있었고 또 지나치게 시끄러운 곳도 있었다. 시끄럽다는 건 인터넷에 종종 올라오는 것처럼 '공부하는데, 혹은 책을 읽는데 방해되니 조용히 해 주세요.'라는 예민함 때문이 아니고 유독 예식장 근처에 있는 카페의 경우 점심 식사 중에 술을 마시고 와서 카페에서 소리를 지르며 대화하는 어르신들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교회나 성당에서 모인 아주머니들이나 학원에서 함께 온 중고등학생들도 종종 깔깔거리며 큰소리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카페니까 대화를 하는 거지 술을 마시고 떠드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일이다.
그래도 그런 경우들에 해당되지 않는 무난한 곳들 중에서도 하나를 고르자면 종로 2가의 투썸 플레이스를 꼽고 싶다. 조용한 평일 오전에 가 보았을 뿐이지만 조도도 적당했고 길쭉하지만 시선이 겹치지 않게 테이블을 세심하게 배치해서 창가에 앉든 벽 쪽에 앉든 집중하기 편한 구조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날은 창밖을 내다보며 휴가를 만끽했기에 글을 써 보았지만 시간이 더 많았다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프랜차이즈와 일반 카페들을 모두 통틀어 고르라면 단연 '오하요 도넛'을 따라갈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공간이 조각조각 쪼개져 있어, 다른 공간의 말소리가 들리는데도 불구하고 한 공간에 테이블이 서너 개 밖에 없다는 시각적인 안도감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적당한 크기의 방과 그 구석구석에 위치한 테이블들은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는 능력이 많아졌을 때, 혹은 쓸 수 있는 돈이 평소에 비하면 무한대에 가깝게 늘어났을 때, 가만히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무리해서 사업을 일으키다가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망해 버리는 것처럼 내게 필요 없는, 여분이라기에는 너무 큰 공간이 허황된 여유와 자유의 환상을 머릿속에 심어주어 딴생각을 하거나 쓸데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막아주는 고마운 요소들이다.
그 오붓한 공간에서 아내는 책을 읽고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벽 한 면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는 커다란 창 밖으로 간간이 1톤 트럭이 지나가고 승용차가 지나가고 약속 시간이 되어 만난 친구들끼리 큰소리로 깔깔 웃으며 자리를 뜨고 조각 치즈케이크처럼 햇볕이 드는 자리에 고양이가 배를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이 덤덤한 영화처럼 지나간다.
책을 읽기 좋은 곳이라고 해서 책을 일부러 읽으러 가지는 않는다. 책은 어차피 지하철에서도 읽고 사무실에서도 읽고 집에서도 읽는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부엌에서 내려 마실 수도 있고 근처에는 <스트라다 로스터스>나 <만랩 커피>처럼 맛있는 전문점도 있어서 얼른 다녀오기도 한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KGML>도 새로 발굴한 맛있는 커피 집이다. 공항 또는 터미널 컨셉인 건지 한 줄짜리 의자에 앉아서 멍하게 창밖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기 좋다(여기선 책을 읽거나 하지 않고 창밖으로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만 본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건 다르고 또 신기한 일이다. 봄이 되면, 그리고 갑자기 추워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두세 번은 오하요 도넛에 가는데, 거기서 글을 쓰면 쓸데없는 소리만 잔뜩 쓰다가 결국 종이를 버리기도 하고,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햇살을 타고 들어온 것처럼 머릿속에서 번득여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뜻한 햇살과, 말과 지혜로 가득 찬듯한 공기와, 거울을 포함해서 벽에 걸려 있는 장식들과, 각기 모양이 다른 테이블들이 모두 어우러진 시각적인 공간이 맛있는 도넛과 커피를 만나면 수첩을 가지고 가지 않아도 어쩔 수없이 핸드폰의 메모장이라도 꺼내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분위기의 힘'이다. 그곳은 커피를 마시는 빵집이라 감동과는 거리가 먼 일상의 장소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파트 근처의 부동산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카페가 있어야 하는 장소라서 카페가 있는, 그냥 그런 곳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분위기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 아래를 간질이는 듯한 잔잔한 청량감이 느껴진다. 덥지는 않지만 따뜻한 봄날, 힘들게 산에 오르는데 훅 하고 지나가는 바람이 분명 차갑지 않아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지금처럼 글을 쓸 때 그곳의 생각만 해도 그곳에 있을 때와 똑같이 느낀다. 그래서 글을 쓰러 굳이 내 몸이 그곳에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있을 때 정도가 똑같거나 덜한 것도 아니어서 날이 따뜻하고 걷기 좋은 날이면 또다시 몇 번이고 다시 가게 되는 것이다.
똑같이 도넛을 보며 어떤 것을 먹을지 고민을 하고, 그렇게 고른 도넛과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아 쟁반을 피해 테이블 한쪽에 수첩을 걸쳐서 펴놓고 그 위에 볼펜을 던져 놓고 도넛을 한 입에 먹기 좋게 잘라 창밖을 보며 아내와 한 조각씩 포크로 찍어 먹는다. 카페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듯 움직이는, 널따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이는 먼지들이 내 시선을 잡아끌 때쯤, 시선의 초점이 창밖에서 실내로 들어오는 그 순간이 신호인 양 머릿속은 눈으로 본 것에서 시작한 생각들이 드디어 스스로 자라나기 시작해서 곧 새로운 그들만의 환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바로 반짝이는 먼지가 생각나고 그다음으로 테이블이 생각나고 이어서 봄을 끌고 오는 듯한 창밖이 생각난다. 그곳에서 눈으로 보다가 스스로 내면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는 것과 반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내면을 바라보기 직전의 광경에서 주변의 풍경으로의 확장이어서 마치 내 눈이 그곳에서의 현실과 머릿속에 있는 그곳에서의 기억 사이에 있는 거울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은 길을 걷기에는 추운 계절이다. 이런 때는 외투 때문에 가벼운 외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카페에 글을 쓰러 가는 것은 무거운 일이 아닌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외투일 뿐이지만) 뭔가 글을 쓴다는 행동의 의미를 실제보다 부풀리는 것 같아서 계속 미루게 된다. 가는 건 미루더라도 떠올리자면 떠올릴 수 있으니까. 페라스트의 잔잔한 해변 파도 너머로 성모성당 섬을 바라보던 기억이 지금도 순식간에 머릿속을 맑게 해 주듯이 기억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 그런 곳이 가까이 있어 때가 되면 기억을 새롭게 할 수 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