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박쥐
비 온다. 농번기는 끝났다지만 씨를 뿌린 뒤의 작물은 "탕!" 한 뒤의 운동회 주자 같이 일제히 결실을 향해 달리는 고로, 먼저 달리는 놈, 넘어져 무릎 까진 놈, 벗겨진 신발을 들고 엄마 찾아 우는 놈 할 것 없이 작물마다 뒤따라가며 토닥거려주고 엉덩이 두드려줘야 추수를 기대할 수 있다. 애정부족으로 비뚤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건 사람이나 작물이나 마찬가지. 아들래미 필통 형광펜 속에 펜심 대신 담배가 들었는지 살피는 일이나 고추잎 뒷면 먼지같은 응애벌레를 돋보기로 들여다 보는 일이나 매일반. '비뚤어질 테다!'의 위력을 셀프로 겪어 아는 처지여서 7월 땡볕도 싫다 못하는데.
비가 오신다. 어머니는 늘 '비님'이라시지. 장마라는데 비도 없고 기껏 오는 비라야 소나기 삼형제. 맏이가 급하게 성질 부리고 가면 둘째와 셋째는 '형아! 같이가' 허겁지겁 따라가느라 실속없이 분주하기만 하지. 비다운 비 안온 지 벌써 두달. 고추는 가물어 꽃이 떨어지고 오이도 껍질이 두꺼운데 그 와중에 마른 땅 좋아하는 참깨만 기세등등. 참깨 좋자고 서른 몇가지 작물들 오갈 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고마우셔라, 태풍님. 비록 태풍 바람에 쓰러질까 새벽 4시부터 고추 지주대에 줄을 매고 줄기를 모아주느라 체력은 진작 고갈되었지만. 감사하여라, 바람은 고만고만하고 차분차분 비가 온다. 수수를 솎다 돌아와 마루에 앉았노라니 창고 지붕 빗소리는 아들래미 치는 실로폰 소리 같은데 흐음, 비가 와서 일은 '땡' 쳤으니 감자를 캐다 삶아볼까나 당귀잎를 뜯어 안주를 할까나 밤나무는 느긋하게 흔들리고 토란잎은 먼지를 씻어 저리 맑은 얼굴이구나. 반갑게 오시는 비 날 저물 때까지만 그치지 말아다오 하는데 어맛, 뜨거라 아닌 밤 중에 비 피해 날아든 박쥐 한 마리.